077. 던전 실습1 (5)
이번에도 역시 던전 실습1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대부분의 아이들만 이 교수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일명 비밀 평가 제도.”
- “……?!”
비밀이란 단어가 주는 묘한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킨 아이들이 조용히 이 교수의 설명을 기다렸다.
“시험 당일, 그러니까 게이트에 입장하기 직전에 내가 너희들에게 쪽지 한 장씩을 줄 거야.”
이 교수가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종이 한 장을 꺼낸 뒤 아이들에게 들어 보였다.
- “…….”
순간, 거북목이 된 아이들이 가늘게 뜬 눈으로 종이에 적힌 내용을 유심히 쳐다봤다.
[비밀 평가지]
[☆: ]
[○: ]
[●: ]
[★: ]
“자, 여기에 뭐가 적혀 있지?”
이 교수가 맨 앞줄에 있던 우등생 슬아에게 쪽지를 들이밀며 물었다.
“비밀 평가지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서로 다른 그림이 각각의 칸에 하나씩 그려져 있습니다.”
“맞아. 맨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흰색 별(☆), 흰색 동그라미(○), 검은색 동그라미(●),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은색 별(★)이 그려져 있어.”
이 교수가 뒷사람들까지 알 수 있도록 슬아의 입을 빌려 쪽지의 구성을 설명했다.
“그럼 이 그림들이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으음. 잘은 모르겠지만, 비밀 평가지라고 적혀 있는 걸로 봐선 특정한 점수를 그림으로 표시한 것 같습니다.”
“굿잡. 정확한 추측이었어.”
이 교수가 슬아의 막힘없는 대답에 또 한 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 그림 옆에 남겨진 빈칸은 이름을 적는 곳이야. 칸마다 딱 한 명씩만.”
이 교수가 쪽지 속 여백에 검지를 갖다 대며 말했다.
“흰색 별(☆) 옆엔 자신이 생각하는 이번 레이드의 키 플레이어를, 흰색 동그라미(○) 옆엔 키 플레이어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그에 버금가는 플레이를 했다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의 이름을, 검은색 동그라미(●) 옆엔 레이드 과정에서 아쉬운 플레이를 보여준 사람의 이름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은색 별(★) 옆엔 이번 레이드 과정에서 느낀 최악의 플레이어를 적으면 돼. 아, 그리고 익명 평가인 만큼 작성자의 이름을 적는 공간은 따로 없으니까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적으면 돼.”
설명을 마친 이 교수가 비밀 평가지를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참고로 이번 평가 점수의 구성은 교수인 내가 30%, 조교들이 20%, 그리고 너희들의 비밀 평가 점수가 무려 50%를 차지하도록 비율을 조정했어.”
- “뭐? 50퍼센트씩이나?”
- “50퍼센트면, 동기들의 평가에 따라서 점수가 뒤바뀔 수도 있겠는데?”
경쟁자의 학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아이들이 술렁거렸다.
- “그럼 실력과 상관없이 인기투표처럼 되는 거 아니야? 인싸는 A, 아싸는 D, 뭐 이런 식으로?”
- “뭐야, 그럼 난 D야?”
- “글쎄. 경쟁자한테 후한 점수를 주면 상대적으로 내 점수가 떨어지는 건데 정말 인기투표로만 흘러갈까? 난 오히려 익명에 기대서 자기 자신에게 흰색 별을 줄 것 같은데?”
- “어? 듣고 보니 또 그러네.”
- “근데 실력과 상관없이 자기 자신을 찍으면, 평가의 객관성이 너무 떨어지는 거 아닌가? 솔직히 친한 애들이나 같은 클래스끼리 흰색 별을 품앗이하기로 짤 수도 있는 거잖아.”
- “반대로 개인적인 유감이 있으면, 상대가 딱히 잘못한 게 없어도 검은색 별을 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 “아아, 그래서 10명씩 끊어서 안 하고 101명이 동시에 평가를 받는 건가? 소수의 인원으로 공대를 구성하면, 비밀 평가란 이름이 무색하게 누가 날 평가했는지 쉽게 눈치 챌 수 있으니까?”
- “확실히 나를 제외한 9명을 의심하는 것보다 100명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게 익명성 보장의 측면에서 더 합리적이긴 하지.”
- “이거 뭐, 시험 보기 전에 커피라도 한번 돌려야 되나?”
- “그러다 커피만 받고 안 찍으면?”
- “그러게. 의도가 너무 빤해서 역효과만 날 것 같은데?”
- “근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이번 비밀 평가가 전술이나 팀워크 없이 솔플로 독식하는 애들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지 않을까?”
- “하긴, 이기적으로 행동하다 비호감으로 찍히면 바로 검은색 별이니까.”
- “그리고 소위 말하는 품앗이의 정황이 보이면, 거기에 연루된 애들한테도 검은색 별을 주면 되잖아.”
- “아니지. 품앗이는 한 명이 하는 게 아니니까 차라리 교수님한테 얘기해서 단체로 페널티를 먹이는 게 더 낫지.”
- “이야, 다들 시작부터 경계심이 장난 아니네. 이거 뭐 무서워서 시험이나 보겠어?”
- “하지만 서로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가 오히려 부정행위에 대한 자정 작용이 될 수도 있잖아.”
- “나도 나쁘진 않은 것 같아. 솔직히 다수의 조교들이 평가에 투입된다고 해도 개개인의 순간적인 이기심이나 미세한 실수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체크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잖아.”
- “하긴, 교수님이나 조교들보다 3년 넘게 부대끼고 산 동기들이 더 서로의 성향을 잘 알고 있으니까.”
- “으음. 학점에 대한 우리들의 욕심과 걱정을 평가에 반영하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겠네.”
비밀 평가 제도의 장단점에 대해 아이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는 동안 태주의 정체에 대해 모르는 주엽이 우월감에 젖은 너그러운 표정으로 조용히 위로의 말을 전했다.
“걱정하지 마. 애들이 널 경계하긴 해도 무조건 검은색 별을 주진 않을 거야.”
“아, 네.”
태주가 위로를 가장한 주엽의 교만한 동정을 한쪽 귀로 흘려버렸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우리가 아무리 경쟁 관계에 있다고 해도 잘한 건 잘했다고 해주는 게 상대방에 대한 리스펙트이자 일종의 스포츠맨십인 건 알지?”
흰색 별을 확신한 주엽이 태주에게 사심 없는 평가를 부탁하며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네. 선배님께서도 꼭 그래 주시길 바랍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태주가 공손하면서도 뼈 있는 당부의 말로 주엽의 도발을 응수했다.
- “저, 교수님, 그럼 만약에 이름이 하나도 안 적힌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예를 들어, 흰색 별에 자신의 이름을 적지도 않았고, 100명의 경쟁자들 역시 그 사람의 이름을 단 한 명도 적지 않았으면요.”
충분히 있을 법한 상황에 대한 가정이었지만, 곳곳에선 안쓰럽다는 반응들이 이어졌다.
- “뭐지? 정직하지만, 존재감은 없는 아싸의 경우를 말하는 건가?”
- “뭐야, 그런 예시는 너무 극단적이면서도 슬프잖아.”
- “근데 오히려 검은색 동그라미나 별을 받은 사람보단 좋은 거 아니야? 일단 부정적인 평가가 없으면 감점도 없다는 거잖아.”
- “하긴, 이럴 땐 오히려 적도 벗도 없는 상태가 더 나을 수도 있겠네.”
물론 일부 아이들의 경솔한 반응과 달리 이 교수는 해당 질문을 가볍게 웃어넘기지 않았지만.
“아니야. 아주 중요한 질문이야. 사실 테스트 후에 평가지를 걷어보면, 중복된 이름도 많고, 본인을 추천하는 비율도 생각보다 적어서 이름이 아예 없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나오거든.”
경험에 의거한 이 교수의 답변에 아이들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누군가 얘기했듯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보단 지목을 안 받는 게 더 유리하기도 하고, 설령 눈에 띄진 않더라도 모두가 각자의 클래스에 맞게 자신의 역할을 하면 되는 거니까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감이 없다거나 인간관계가 나쁘다는 식으로 매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테스트와 관련된 핵심적인 사항들을 어느 정도 전달했다고 판단한 이 교수가 슬쩍 시계를 들여다봤다.
“자, 그럼 또 질문 있는 사람?”
- “…….”
질문이 없어야 일찍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학생들이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굳게 입을 닫았다.
“없어? 없으면, 수업 첫날이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다음 시간부턴 게이트에 들어가는 날짜가 잡히기 전까지 쭉 모의 던전에서만 훈련할 거니까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 그리고 5월 중순부턴 언제 연락이 갈지 모르니까 수업 시간 이외엔 휴대폰을 꼭 소리로 해놓고.”
- “네!”
수업 시작 이후 가장 우렁찬 대답 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이, 깜짝이야. 뭐야, 지금 나더러 빨리 나가라는 거야?”
- “아닙니다!”
“오케이. 지금 대답 크게 한 사람들은 다 감점이니까 알아서 해.”
학생들과 친밀한 농담을 주고받은 이 교수가 교직원 전용 출입구를 통해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가자. 어차피 트레이닝 돔 입구까진 목적지가 같으니까.”
주엽이 태주의 등을 가볍게 터치하며 말했다.
“아니요. 먼저 가세요.”
태주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박성규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말했다.
“뭐?”
짧은 눈길조차 받지 못한 주엽이 의아한 표정으로 태주의 시선이 가리키는 곳을 돌아봤다.
“아아.”
금세 상황 파악을 마친 주엽이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나 먼저 갈게.”
중립을 자처한 주엽이 태주만을 남긴 채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야, 너 내 눈썹이랑 앞머리 어떻게 할 거야.”
오른손으로 앞머리를 가린 박성규가 다짜고짜 시비조로 물었다.
“어떻게 하고 오래요?”
태주가 긴장감 하나 없는 태연한 얼굴로 성규에게 물었다.
“뭐?”
후배의 당당함에 살짝 당황한 성규가 태주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세종 선배가 뒤에서 어떻게 하고 오라고 지시하지 않았어요?”
“뭐? 지시?”
“선배는 원래 세종 선배가 시키는 대로만 하잖아요. 전화 하라면 하고, 시비 걸라면 걸고, 지금도 따지라고 시켜서 온 거 아니에요? 난 그런 줄 알았는데?”
태주가 능청스러운 태도로 성규의 속을 서서히 긁기 시작했다.
“뭐? 너 지금 무슨 소…….”
“아까부터 계속 모른 척 뭐, 뭐, 거리시는데, 따지고 싶으면, 저 말고 저기 있는 친구 분한테 가서 따지세요. 아, 친구가 아니라 주인님인가?”
성규의 말을 끊은 태주가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는 장세종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성규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이간질을 통한 와해의 유도.
태주는 장세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순한 박성규를 공략함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야 이 씨, 누가 주인이야. 어!”
순간, 태주의 도발에 발끈한 성규가 두 눈을 부릅뜨며 버럭 화를 냈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불편한 진실과의 대면.
친구 사이지만, 미묘한 지시 복종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던 성규의 입장에선 태주의 일침이 더욱 치욕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찾았다. 발작 버튼…….’
성규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태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