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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75화 (75/242)

075. 던전 실습1 (3)

‘역시…….’

스트레칭을 위해 간격을 넓히던 선배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자 맨 뒷줄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엽의 모습이 드러났다.

“…….”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은 채 몸을 풀고 있던 주엽이 태주가 다가오는 모습을 확인하곤 말없이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

선배에 대한 예의로 가벼운 목례를 건넨 태주가 주엽이 자신을 위해 비워 둔 듯한 옆자리로 자연스럽게 들어섰다.

“따로 몸을 안 풀어도 되겠는데?”

주엽이 태주의 행동에 대한 뼈 있는 농담으로 입을 열었다.

공개적인 굴욕의 당사자는 성규였지만, 한편으론 자신을 비롯한 4학년 선배 모두에 대한 무언의 무력시위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보면 네가 어쌔신인 줄 알겠어.”

더구나 주엽은 자신의 은신 능력을 상회하는 태주의 점멸 스킬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아 참, 그리고 학과장님한테 얘기 들었어. 교수님한테도 따로 확인했고.”

“네? 뭘…….”

앞뒤 내용을 잘라먹은 듯한 주엽의 일방적인 대화에 태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날 이겨야 커리큘럼의 자율권을 얻는다며?”

스트레칭을 멈춘 주엽이 태주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

학과장과 이 교수, 그리고 자신만의 비밀이라 여겼던 태주가 새로운 정보 공유자의 등장에 흠칫 놀랐다.

“학과장님께서 그러시더라. 원래는 나한테 비밀로 하려고 하셨다고.”

주엽이 학과장실에서 나눈 대화의 내용을 태주에게 가감 없이 전달했다.

“1학년을 상대로 전력을 다할까 봐 걱정이 되셨던 거지. 내가 워낙 승부에 민감하니까.”

“근데 왜 알려주신 거죠?”

“오늘 아침에 뜬 기사를 보고 생각이 바뀌셨대. 내 입장에선 아주 기분이 묘한 상황이지.”

제안의 내용을 알리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주엽이 우세하다는 전제하에 대결이 과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의도적인 침묵이었지만, 그러한 부작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실을 밝혔다는 건 주엽의 승리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는 뜻인 동시에 태주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대결의 프레임 자체가 바뀐 거야. 4학년 대 1학년에서 S급 대 S급으로. 아주 동등하게.”

‘동등하게’란 단어를 내뱉는 주엽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물론 학과장님의 생각에 동의하는 건 아니야. 그럴 마음도 없고.”

대엽의 말대로 누군가의 재능에 대한 열등감이나 무력감을 느껴본 적이 없는 주엽에게 있어 학과장의 판단은 선배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봐.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학과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지.”

순간, 이유를 묻는 주엽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학과장이 제시한 무리한 조건을 수락했다는 건 결국 자신보다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그 대답이 듣고 싶어서 절 여기로 부른 겁니까?”

“아니. 이건 그냥 개인적인 궁금증. 진짜 이유는 따로 있고.”

“진짜 이유요?”

“어. 학과장님처럼 나도 생각이 좀 바뀌었거든. 따로 귀띔해 줄 것도 있고.”

“…….”

태주가 주엽의 의미심장한 고백에 스트레칭까지 멈추며 집중했다.

“며칠 전에 박성규한테서 전화가 왔었어.”

“박성규 선배라면 조금 전에…….”

“맞아. 그 앞머리……. 아무튼 걔가 그러더라. 까마득한 후배가 선배들 틈에서 날뛰는 꼴은 못 보겠다고. 그래서 수업 내내 기를 죽일 생각인데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대엽이가 우연히 들었다는 통화의 발신자가 박성규였구나.’

기죽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선배들의 노골적인 따돌림을 경고했던 대엽의 조언 속 의문의 퍼즐 조각들이 하나씩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근데 이 얘기를 왜 나한테 하지?’

대엽의 귀띔을 먼저 들어서인지 위협을 경고해줬다고 해도 순수한 호의로 느껴지진 않았다.

주엽이 따돌림을 지시한 건 아니었지만, 성규의 견제로 자신의 멘탈이 흔들렸을 때 가장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인물은 수업 내에서의 경쟁 구도가 뚜렷한 주엽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움을 줄 겁니까?”

“어.”

“…….?”

“물론 박성규가 아니라 너한테.”

“……?!”

앞선 대답으로 인해 좁아졌던 태주의 미간이 뜻밖의 지지 표명에 놀라 팽팽하게 펴졌다.

“의외네요. 학과장님의 말씀을 듣고도 제 편에 선다는 게.”

“성격상 핑곗거리를 제공하는 건 딱 질색이거든.”

‘뭐야, 제공? 핑곗거리를 제공한다는 건 핑계를 대는 쪽이 나라는 거잖아.’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주엽의 오만한 단어 선택이 태주의 심기를 단단히 거슬리게 했다.

“네가 학과장님한테 선배들의 견제가 너무 심해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면 내 승리가 마치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된 것처럼 보일 거 아니야. 내가 동기들에게 사주한 것도 아닌데.”

“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태주가 주엽의 불쾌한 가정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래? 근데 여기서 그럴 일이란 건 뭘 의미하는 걸까? 핑계? 견제? 아님……. 패배?”

태주가 그랬듯 기 싸움에 능한 주엽 역시 태주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꼭 하나만 골라야 되는 겁니까?”

곱창집에서 오간 아슬아슬한 신경전이 되풀이됐지만, 최 총장 앞에서도 기죽지 않았던 태주가 학부생에 불과한 주엽의 기세에 위축될 리 없었다.

피식.

태주의 대답을 들은 주엽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재밌네.”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는 후배의 당돌한 태도가 심히 거슬릴 법도 했지만, 한편으론 지루한 학교생활에 자극제가 될 수 있는 태주의 도전적인 화법이 반갑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무슨 생각으로 학과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지 알겠어.”

우두둑. 우두둑.

주엽이 스트레칭을 빙자해 이리저리 목을 꺾으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사실 동생한테 따로 물어봤었거든. 네가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근데 걔가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 자기도 모르겠대. 한계를 모르니 평가할 수도 없다고. 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나더러 직접 느껴보라고…….”

수강 신청 당일, 대엽의 방에서 나눈 대화의 기억을 더듬어 보던 주엽이 태주에 대한 극찬에 헛웃음을 지었다.

물론 대엽이 태주를 찾아가 부탁한 내용을 알게 되면,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겠지만.

“걔가 원래 그런 말 하는 얘가 아니거든. 더구나 내 실력을 가장 잘 아는 놈한테 그런 소릴 들으니까 기분이 더 묘해. 질투심도 좀 생기고.”

비교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주엽의 입장에선 대엽의 주관적인 평가나 학과장의 제안 하나하나가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참에 진지하게 한번 붙어보려고. 학과장님이 우려했던 내 전력을 다해서…….”

각오에 서려 있는 비장한 기운은 태주를 향하고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강해진 주엽의 마력은 주변에 있던 동기들마저 멈칫하게 만들었다.

- “어이 씨, 뭐야, 갑자기 소름 돋았어.”

주엽의 앞에서 몸을 풀고 있던 아이가 팔뚝에 돋은 닭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뒤를 돌아봤다.

- “주엽야, 너 괜찮아?”

아이는 이 교수가 지시한 양팔 간격보다 훨씬 여유롭게 떨어져 있는 주엽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어. 스트레칭 때문에 혈액순환이 잘돼서 그런가 봐. 신경 쓰지 마.”

태주와의 대화 내내 나지막했던 목소리를 높인 주엽이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태연하게 둘러댔다.

- “그래? 근데 너희 둘만 너무 가까이 붙어 있는 거 아니야?”

태주와 주엽을 번갈아 바라보던 아이가 두 사람의 위치 선정을 의아하게 여기며 물었다.

- “그러게. 아까부터 둘이 뭔가 끊임없이 얘기하던데?”

이번엔 다른 아이가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냥 내 동생이랑 동기라 이것저것 물어본 거야. 그치?”

주엽이 태주를 돌아보며 친근한 척 물었다.

바로 그때.

“어이, 거기 뒤에 왜 이렇게 시끄러워. 내가 스트레칭 할 땐 잡담하지 말고, 호흡에만 집중하라고 그랬지.”

이 교수가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주의를 주었다.

“자, 이번엔 옆 사람이랑 짝을 지어서 할 거니까 괜히 친한 사람 찾아다니지 말고, 가까이 있는 사람이랑 해.”

- “네.”

이 교수의 말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아이들이 하나둘 파트너를 이루기 시작했다.

“성규야, 넌 나랑 하자.”

이 교수가 짧아진 앞머리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성규를 불러냈다.

태주로 인해 수강생이 101명으로 늘어난 터라 둘씩 짝지을 경우 한 명만 덩그러니 남았기 때문이다.

“아니요. 전 그냥 얘랑 할게요.”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 맨 앞줄에 서 있던 성규가 옆에 있던 동기의 곁으로 황급히 자리를 옮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야, 어차피 한 명은 혼자 해야 되니까 잔말 말고 빨리 나와.”

성규를 앞쪽으로 직접 끌고 나온 이 교수가 곧바로 첫 번째 동작의 시범을 보였다.

“자, 일단 마주본 상태에서 두 손을 상대방의 양쪽 어깨에 하나씩 올린 다음에 허리를 숙여 서로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줘. 반동 없이. 어깨부터 허리까지 일자로 쭉 펴고.”

- “네.”

대부분의 아이들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스트레칭을 따라했지만, 어쩔 수 없이 마주보게 된 태주와 주엽의 분위기는 마치 머리를 맞댄 채 파이팅 포즈를 취하는 파이터들의 대치 상황을 연상케 했다.

“우리도 하던 얘기나 마저 할까?”

선배인 주엽이 먼저 태주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네. 그러죠.”

마지못해 자세를 취한 태주가 이 교수의 구령에 맞춰 주엽의 어깨를 눌렀다.

“……?!”

다행히 서로 바닥을 보고 있어 표정을 읽히진 않았지만, 태주의 힘이 어깨를 통해 전해지는 순간 주엽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뭐지, 이 힘은……. 설마 일부러 세게 누르는 건가?’

스트레칭이 아니라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만큼 태주의 위력은 부담 그 자체였다.

물론 주엽의 착각과 달리 태주는 평온한 표정으로 호흡에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사실 널 예의주시하고 있는 건 나와 박성규뿐만이 아니야.”

어깨를 짓누르는 강한 압박감을 숨긴 주엽이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를 이어갔다.

“장세종.”

‘역시…….’

유력한 용의자의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렸던 태주가 주엽의 한마디에 확신을 얻게 됐다.

“날 포섭하기 위해 전화한 건 박성규지만, 뒤에서 전화를 걸도록 지시한 건 장세종이거든.”

‘장세종이 박성규의 브레인이거나 박성규가 장세종의 수족이라는 소리네.’

두 사람이 한 몸처럼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된 태주는 박성규가 저지른 도발의 배후에도 장세종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궁금하네요. 그 장세종이란 선배가 누구인지.”

스트레칭 자세를 푼 태주가 상체를 곧게 세운 뒤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어? 이미 만나 봤을 텐데?”

순간, 태주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주엽의 한쪽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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