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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73화 (73/242)

073. 던전 실습1 (1)

“입상이 아니라 우승을 하는 것으로 조건을 수정해 주었으면 하네.”

최 총장의 입장에선 수상의 범위가 모호한 입상보단 우승처럼 확실한 등수가 정해진 단어를 조건에 포함시키는 것이 더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으음. 3등 안에 드는 것도 엄청난 성과인데, 1등을 했을 때만 상을 주시면, 오히려 동기 부여가 어렵지 않을까요? 솔직히 우승이 아닌 입상만 해도 헌터학과의 순위를 높이려는 총장님의 목적엔 충분히 부합하지만, 준우승을 해도 아무런 보상이 없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해가 안 돼서요.”

첫 번째 제안과 달리 조건을 수정할 생각이 없는 태주가 난색을 표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상에 대한 보상의 의지가 없는 건 아니네. 그저 보상의 내용에 합당한 기준을 세우고 싶었을 뿐이지.”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긴 했지만, 최 총장의 마음속에 보상 확률을 줄이려는 불손한 의도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재앙 등급은 S급 던전에서도 아주 가끔씩만 입수할 수 있는 희귀한 아티팩트네. 사겠다는 사람은 넘쳐나지만, 매물이 나오지 않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

전설 등급 아티팩트의 거래는 나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재앙 등급의 경우 부르는 게 값임에도 불구하고 그 희소성으로 인해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지금으로선 내가 가진 것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네. 내 피와 땀이, 그리고 젊은 시절의 치열했던 순간들이 고스란히 담긴 훈장이자 전리품을 말이야.”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 최 총장의 입가에 벅찬 미소가 번지던 바로 그때.

“하지만 그건 과거의 영광이지 않습니까?”

태주가 인정에 호소하는 전략을 택한 최 총장의 사사로운 추억팔이에 일침을 가했다.

“뭐?”

달콤한 회상에 젖어들고 있던 최 총장이 태주의 직설적인 화법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과거의 영광?”

“네.”

뒷감당이 안 될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발언이었지만, 실수처럼 보이지 않는 태주의 당당한 태도가 오히려 최 총장으로 하여금 무례함에 대한 책임이 아닌 이유를 묻고 싶게 만들었다.

“패기인지 객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외의 모습을 보고 나니 저의가 궁금해지는군……. 그래. 내 공적을 폄하하려는 까닭이 뭔가?”

“과거의 영광을 저에게 주십쇼. 그럼 총장님께서 바라시는 미래의 영광을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결례를 범하면서까지 최 총장의 미적지근한 거동을 자극한 태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당찬 포부로 승부수를 띄웠다.

“…….”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또 한 번 정적이 흘렀다.

“태주 군,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책임이란 단어는 함부로 입에 담는 게 아니네.”

“네. 맞습니다. 총장님께서 근거 없는 확신을 도박에 비유하신 것처럼 말이죠.”

자승자박.

아이러니하게도 태주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과정에서 내뱉었던 말들이 오히려 최 총장을 곤란하게 만드는 족쇄가 되어 돌아왔다.

마치 반상 앞에 마주한 두 사람이 같은 색깔의 돌로 바둑을 두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 전에 말씀하셨죠. 총장님의 마지막 목표를 이뤄줄 수 있는 유일한 재목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는 거라고……. 그럼 먼저 지어주십쇼. 총장님께서 입에 담으신 그 신뢰라는 단어에 대한 또 다른 책임을…….”

“……?!”

나름 유리한 수 싸움을 벌이고 있다 착각하고 있던 최 총장이 형세를 뒤집는 태주의 묘수에 말문이 막혔다.

“허허, 이거 아주 제대로 한 방 먹었군.”

그리고 이어진 씁쓸한 인정.

“좋아. 자네의 마지막 제안을 받아들이겠네. 어차피 자네를 위한 일이 곧 나를 위한 일이 아니겠나.”

결국 태주의 의도대로 세 가지 희생을 부담하게 된 최 총장이 거래의 성사를 알리는 악수를 청했다.

“재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받친 태주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손을 맞잡았다.

“내 얼마 남지 않은 미래가 자네로 인해 얼마나 영광스러워질지 참으로 기대되는군.”

짧은 악수를 마친 최 총장이 후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그리고 총장님.”

최 총장을 따라 일어난 태주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허, 이젠 자네가 부르기만 해도 덜컥 겁이 나는구먼. 그래. 뭐, 더 하고 싶은 얘기라도 있나?”

“네. 실례가 안 된다면, 작은 약속의 증표를 하나 주셨으면 합니다.”

“약속의 증표? 지금 날 못 믿겠다는 건가?”

“아니요. 제가 원하는 약속의 증표는 이행을 강요하고 서로를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장차 있을 역사적인 순간의 시작을 기억하기 위한 하나의 상징적인 물건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물론 의지가 흔들릴 때마다 잡아 줄 수 있는 동기 부여의 역할도 겸할 수 있고요.”

이런저런 명분을 갖다 붙이긴 했지만, 실상은 약속의 증표를 핑계로 리더스 배지를 얻기 위한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으음. 듣고 보니 그렇군……. 그럼 자네 생각엔 어떤 증표가 적절할 것 같나?”

녹록치 않았던 협상 과정에 지친 최 총장이 별다른 고민 없이 태주의 추가 제안을 받아들였다.

“제가 봤을 땐 리더스 배지 정도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가 마무리된 마당에 아티팩트처럼 값비싼 물건을 요구한다면, 증표를 구실로 악착같이 뜯어내려는 몰염치한 심보로 비춰져 강한 거부감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최 총장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이득을 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택한 태주였다.

“오호라.”

태주의 예상대로 최 총장의 반응은 호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총장의 직권으로만 줄 수 있는 배지가 좋겠군.”

책장으로 다가간 최 총장이 대한 헌터협회의 마크가 찍힌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자네 혹시 마패라고 들어봤나?”

“네. 암행어사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원래는 역마를 빌릴 때 사용하는 용도라 꼭 암행어사만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네만, 경우에 따라 신분증의 역할도 담당했던 아주 중요한 물건이지.”

“예를 들면, 임금님과의 각별한 관계를 증명하는 것처럼 말입니까?”

“내가 총장으로 있는 한 이 배지가 자네에게 마패와 같은 권한을 부여할 걸세.”

최 총장이 케이스 안에 들어 있던 황금색 리더스 배지를 태주의 왼쪽 가슴에 손수 달아주었다.

《총장 최지문》

수여 조건이 위치한 배지의 정중앙엔 최 총장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허허, 오늘이 벌써 두 번째 수여식이군.”

놀랍게도, 회귀 전, 31개의 리더스 배지를 획득했던 허창민마저 끝끝내 받지 못한 총애의 상징이 약속의 증표로 수여되었다.

“감사합니다. 과잠을 받으면, 수석 입학 배지와 함께 꼭 달고 다니겠습니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은 태주가 왼쪽 가슴에 부착된 배지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

*

잠시 후.

태주는 트레이닝 돔 지하에 위치한 던전 실습1의 강의실, 정확히 얘기하면 모의 던전의 대기실에 뒤늦게 도착했다.

지리에 어둡거나 늑장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신입생의 이례적인 수업 참여인 만큼 일찍 도착한 태주가 선배들 틈에서 어색해하지 않게 이종도 교수가 5분 늦게 도착하도록 특별히 배려를 했기 때문이다.

- “쟤가 이번 기수 최고의 신입생으로 뽑혔다며?”

- “어. 2학년 학생회 애들이 그러는데, 새터 때 협찬 받은 선물도 싹쓸이하고, 술롱도르까지 타갔대.”

태주의 등장과 동시에 대기실 안이 술렁였다.

- “으음. 별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실물로 보니까 훨씬 포스가 넘치는데?”

- “야, 오늘 아침에 기사 뜬 거 봤지? 퀸스맨이랑 캘리포니아 불리스에서 공개적으로 관심을 표명했대.”

- “당연히 봤지. 애들도 하루 종일 그 얘기밖에 안 하는데.”

- “와아, 진짜 개부럽다. 이따 말이라도 한번 걸어볼까?”

- “야, 근데 4학년 전필 과목에 신입생을 넣은 건 좀 아니지 않냐? 막말로 1학년 2학기도 아니고, 첫 번째 수강 신청인데?”

- “이종도 교수님 픽이라잖아. 학과장님도 오케이 하셨고.”

- “하긴, 따로 불러서 활까지 주셨다니 뭐, 말 다했지.”

- “이거 이러다 우리만 찬밥 신세 되는 거 아니야?”

- “그러게. 남의 잔치에 들러리 되는 건 딱 질색인데.”

- “에이, 4학년 짬바가 있는데, 설마…….”

- “아니야. 전에 입시 때 영상 올라온 거 봤었는데, 확실히 클래스가 달라. 그냥 미쳤어.”

- “아, 그 S급 궁수랑 1대1로 붙었던 거? 그 사람 아레나에서 온 2차 각성자였다며.”

- “잘하긴 잘하지. 심지어 협회장님 라인에 총장님까지 싸고 돌 정도니까.”

- “야, 근데 실력만 믿고 깝치면 어떡하지? 한번 잡고 가야 되나?”

- “뭐야, 초장부터 기선 제압을 하자는 거야?”

- “까마득한 후배가 선배 알기를 우습게 알면 좀 곤란하지.”

- “오오, 그래? 그럼 나도 오랜만에 꼰대짓이나 해 볼까?”

- “근데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성규랑 세종이가 알아서 할걸?”

선배들의 입에서 나온 두 명의 실명이 모른 척 걷고 있던 태주의 귀에 희미하게 들려왔다.

‘성규랑 세종?’

회귀 전, 위계질서가 엄격한 헌터학과의 분위기상 빠른 인사를 위해 선배들의 프로필을 기억하는 건 필수였지만, 직속 선배인 2학년의 얼굴과 이름을 100% 암기하고 있는 것과 달리, 거의 마주칠 일이 없던 4학년의 경우 민주엽처럼 특출 난 선배가 아닌 이상 상대적으로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대엽이가 엿들었다는 따돌림의 설계자가 둘이었구나.’

물론 핵심 주동자는 2명인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들에게 동조한 가담자나 방관자들의 수는 섣불리 예측할 수 없었다.

- “슬아야, 너도 이따 쟤한테 한마디 할래? 솔직히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너 정도 클래스면 그래도 되잖아.”

태주를 곁눈질하고 있던 선배 한 명이 S급 법사 공슬아에게 합류를 종용했다.

“아니. 난 별로.”

남자는 민주엽, 여자는 공슬아라는 말이 나올 만큼 동기들 사이에선 이미 정평이 난 실력자였지만, 남의 일에 워낙 관심이 없는 성격이라 이번에도 역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 “어? 왜? 넌 신입생이 저렇게 치고 올라오는데 신경 쓰이지 않아?”

“글쎄. 내가 궁수가 아니라 그런지 매직 아처든 뭐든 딱히 관심이 없어서……. 뭐, 나 먹고 살기도 바쁜데, 잘 나가는 신입생까지 신경 쓸 겨를도 없고.”

호기심, 경계심, 적개심, 그리고 무관심.

태주 한 사람에게 느끼는 선배들의 감정은 다양했지만, 태주는 그 모든 감정을 경외심 하나로 통일시킬 예정이었다.

바로 그때.

“신입생, 어서 오고.”

무리 중에 섞여 있던 A급 궁수 박성규가 다짜고짜 태주를 겨냥해 활시위를 당겼다.

‘선 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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