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 글로벌 영어 (4)
“뭐? 계산?”
찰나였지만,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최 총장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네. 지금까지 나온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총장님이 플러스 1, 저는 마이너스 2가 되거든요.”
“마이너스 2? 허허, 어느 나라 계산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손해를 보고 있는 의견엔 동의할 수가 없네.”
쓴웃음을 짓던 최 총장이 인정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물론 그러실 겁니다. 총장님이 제안하신 내용이라서가 아니라 표면적으론 총장님과 제가 각각 한국대 헌터학과의 순위 상승과 용돈의 기하급수적인 증가라는 이익을 하나씩 얻게 되는 아주 공평한 그림처럼 보이거든요.”
“그래. 그런데 뭐가 문제라는 건가?”
“희생의 정도가 다릅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저에게만 희생이 강요된 불공정한 거래인 셈이죠.”
대화의 주도권을 잡게 된 태주가 당황한 최 총장을 기세 좋게 압박했다.
“이미 말씀하신 대로 한국대 헌터학과의 순위를 높이기 위해선 국제 대회에서의 수상 실적과 더불어 학과 자체의 국제적인 인지도가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전, 언론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야 한다는 첫 번째 희생과 길드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계약 시점을 지연시켜야 한다는 두 번째 희생을, 마지막으로 한국 최초의 국제 대회 입상이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에 도전해야 하는 세 번째 희생까지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고요.”
반론을 제기하는 타이밍도 적절했지만, 무엇보다 대화중에 나온 사실만을 있는 그대로 열거했기 때문에 자신이 내뱉은 말임을 기억하는 최 총장의 입장에선 반박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총장님께선 용돈의 기하급수적인 증가에 대해 그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용돈의 증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 조금 전에 언급한 제 세 가지 희생들이고요.”
태주의 예상대로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인 최 총장은 윈윈처럼 보이는 제안 속에서도 자신의 의무를 최소화시키고 있었다.
“…….”
태주의 치밀한 빌드업에 제대로 당한 최 총장의 말문이 처음으로 막혔다.
“따라서 한 가지 이득을 얻기 위한 대가로 세 가지 희생을 하게 된 저는 마이너스 2를, 이득의 개수는 같지만, 희생으로부터 자유로운 총장님께선 플러스 1을 기록하게 되는 다소 형평성에 어긋난 모양새가 갖춰지기 때문에 외람되지만, 총장님께서도 이 점을 재고해주셨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이자 가장 확실한 계산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고작 몇 초간의 정적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정신적인 체감 시간을 더디게 흐르도록 만들었다.
바로 그때.
“허허.”
살 떨리는 정적을 깬 최 총장의 첫마디는 백 마디 말보다 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절제된 웃음소리였다.
“내가 자네를 너무 어리게만 봤구먼.”
“무례를 범했다면 죄송합니다.”
자신의 의견을 빠짐없이 전한 태주가 매서운 눈빛을 거두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니. 자네의 희생에 대해 간과하고 있던 내 불찰이네.”
태주의 역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썩 달갑지는 않았지만, 이유 없는 거절은 곧 소인배임을 인정하는 꼴이었기 때문에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는 최 총장의 입장에선 상대방의 입맛에 맞는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이제 내가 어떤 식으로 재고해야 계산이 맞을지 한 번 말해보게.”
자신의 목표를 이뤄줄 수 있는 유일한 적임자와 대립해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최 총장이 태주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네. 우선 저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하는 해외 길드가 추가될 때마다 전설 등급의 아티팩트를 주셨으면 합니다.”
전설 등급 아티팩트의 희귀성과 가치를 고려했을 땐 상당히 무리한 요구였지만, 시작가를 높여 놔야 흥정이 이루어져도 최대한의 이익을 낼 수 있다는 생각에 초반부터 강하게 밀고 나가는 태주였다.
“허허, 이거 시작부터 아주 대담하게 나오는군.”
태주의 예상대로 최 총장이 헛웃음을 지었다.
“내 그릇의 크기를 가늠해 보려는 의도라면 그리 나쁘지 않은 전략이네만, 순간적인 욕심에 의한 현실성 없는 생떼라면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걸세. 물론 그간의 일들을 돌이켜봤을 땐 전자의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 말이야.”
역시나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닌 최 총장이 자신을 떠보려는 태주의 호기로운 탐색전에 적정선을 지켜 달라 경고했다.
“네. 맞습니다. 전자……. 사실 총장님이시라면 충분히 맞춰 줄 수 있는 조건이라 생각했거든요.”
최 총장의 신사적인 으름장에 위축될 법도 했지만, 자신과 척을 질 수 없는 아쉬운 처지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태주는 오히려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대처로 거래의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아니. 나는 협상 테이블에 앉은 전략적 파트너지 자선 사업가가 아니네. 물론 전설 등급 아티팩트의 지급 기준을 한 곳이 아닌 열 곳으로 늘린다면, 얘기가 또 달라지겠지만 말이야.”
태주가 그랬듯 최 총장 역시 합의점을 찾아가기 위한 극단적인 기준을 제시했다.
“그럼 한 곳이 아닌 세 곳은 어떠십니까?”
“일곱 곳.”
“일곱 곳이라……. 글쎄요. 오늘처럼 단순히 해외 길드의 관심만 받아도 되는 조건이면, 열 곳이란 기준도 충분히 받아들일 의향이 있지만, 제가 말씀드린 건 용돈이라는 구체적인 지원을 받았을 때만 성립되는 조건이라 난이도나 희소성의 측면에서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화의 양상만 놓고 봤을 땐 서로의 의견을 좀처럼 좁히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두 사람 모두 5곳이란 기준점을 머릿속에 정해둔 상태였다.
“좋아. 그럼 한 발씩 양보해서 다섯 곳은 어떤가?”
“다섯 곳이요……. 으음. 네, 좋습니다. 그럼 다섯 곳으로 하시죠.”
최 총장이 제시한 절충안에 대해 고심하는 척 잠시 뜸을 들이던 태주가 결국 +1이던 최 총장의 합산 점수를 0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자, 그럼 이제 나도 첫 번째 희생을 감수하게 된 건가?”
“네. 긍정적으로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이토록 예의 바른 혀에서 이번엔 또 어떤 섬뜩한 부탁이 나올지 벌써부터 긴장되는구먼.”
계산상 아직 두 번의 희생이 더 남아 있는 최 총장이 뼈 있는 농담으로 엄살 아닌 엄살을 부렸다.
“자, 어서 다음 제안을 말해 보게.”
“네. 저의 두 번째 제안은 저를 둘러싼 명백한 허위 사실이나 부정적인 추측들이 기사화되는 걸 총장님께서 막아 주시는 겁니다.”
타인과의 경쟁과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업계의 특성상 흠집내기식의 음해 공작과 근거 없는 악성 루머의 확산은 레드오션으로 접어들기 전부터 이미 하나의 고질병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으음. 허위 기사를 막고 정정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네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범위에 범죄 사실이나 변명의 여지가 없는 개인적인 일탈까진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만 명심해 두게.”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최 총장이 후폭풍의 우려가 있는 항목들을 언급하며 일찌감치 선을 그었다.
“네. 그래서 저도 허위 사실이나 부정적인 추측들이라고 미리 말씀드린 겁니다. 뭐, 제 이미지가 안 좋아지는 건 총장님께서도 원치 않으시니까요.”
물론 언론 기관에 정정 보도를 청구하거나 변호사를 통해 법적 대응을 할 수도 있지만, 효율성의 측면에선 전화 한 통만으로도 모든 기사를 내릴 수 있는 최 총장의 입김과 화려한 인맥을 이용하는 것이 더 확실한 방식이라고 판단한 태주였다.
“지금 설마 내 걱정을 해 주는 건가?”
“아니요. 걱정이 아니라 협조를 부탁드리는 겁니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전략적 파트너로서의 긴밀한 유대 관계를…….”
최 총장의 표현을 빌린 태주가 자신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확실한 명분을 제시하며 위트 있게 받아쳤다.
“허허, 이거 참 빠져나갈 구멍이 하나 없군.”
태주의 치밀함에 혀를 내두른 최 총장이 강적임을 인정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알았네. 내 그렇게 하도록 하지.”
최 총장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지친 기색이 묻어났다.
예정보다 길어진 대화 시간도 한몫했지만, 그보다 없던 빚이 생긴 듯한 심리적 부담감이 최 총장의 정신적 피로도를 한층 더 가중시켰기 때문이다.
“자, 그럼 이제 하나만 남은 건가? 이쯤 되니 오히려 어떤 제안을 준비했을지 궁금해지는군.”
“네. 그럼 바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최 총장 못지않게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하는 태주가 거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마무리 단계에 돌입했다.
“재앙 등급…….”
쉽지 않은 제안을 준비한 태주가 온전한 문장이 아닌 핵심 단어부터 언급하는 화법으로 최 총장의 솔직한 반응을 살펴보기로 했다.
“……?!”
동공 지진까진 아니었지만, 순간적인 마음의 동요가 최 총장의 눈빛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국제 대회에서 입상을 할 때마다 재앙 등급의 아티팩트를 받고 싶습니다.”
“…….”
태주로부터 더 들을 말이 없었음에도 최 총장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물론 제안을 철회할 생각이 없는 태주 역시 불편한 침묵에 동참하며 최 총장의 대답을 재촉했지만.
“으음.”
내적 갈등이 묻어나는 중후한 저음이 최 총장의 성대를 울렸다.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대범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웃음기마저 사라진 최 총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이유에 따라 총장님의 대답이 달라지는 겁니까?”
“소유가 사용을 보장하지 않는 저주받은 물건이네. 재앙 등급 아티팩트의 소유권을 인정받은 최초 발견자들 또한 결계 속에 모셔 둔 채 관상용으로만 즐기고 있지.”
재앙 등급 아티팩트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최 총장이 소유권 이전 시 발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점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네. 그래서 저도 관상용으로만 보관할 생각입니다.”
재앙 등급 아티팩트를 사용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려 한다는 식의 의욕적인 답변은 의도적으로 피했다.
단순히 사용 가능성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일시적인 체험을 유도해 실패를 맛보게 한 뒤 그것을 빌미로 소유권을 넘기지 않으려 할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으음. 사용이 아닌 소유가 목적이라고 하니 더 이상 위험성을 핑계로 거절하지도 못하겠군…….”
태주의 예견대로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최 총장이 또 한 번 고민에 빠졌다.
“외람되지만, 총장님께서 염려하시는 부분에 대해선 저도 이미 경각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재앙 등급 아티팩트의 안전한 보관을 위한 경제적인 투자도 아끼지 않을 계획이고요.”
최 총장이 지적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까지 밝힌 태주가 마지막 오케이 사인을 기다리던 바로 그때.
“좋아.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네. 단…….”
확실한 계산을 요구한 태주가 그랬듯 용의주도한 성격의 최 총장도 조건부 승낙의 여지를 남기며 말끝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