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71화 (71/242)

071. 글로벌 영어 (3)

“건설적인 제안이요?”

순간, 제안의 내용이 서로에게 윈윈일 순 있지만,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하는 최 총장의 성격상 자신에게 좀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 협회장과 5대 길드 수장들의 모임에 동석할 것이라 들었다. 물론 여름 인턴십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지만, 오늘 뜬 기사로 인해 새로운 이야기가 오가게 되겠지.”

‘역시 모르시는 게 없구나.’

협회장과의 관계를 떠나 최 총장의 정보력과 정치력은 늘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새로운 이야기라면, 해외 길드의 러브콜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헌터사 35년, 아니,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를 놓치게 생겼으니 콧대 높은 길드 마스터들도 기꺼이 을(乙)의 포지션을 취할 걸세. 한마디로 태주 군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본격적인 베팅이 한 줄의 기사로부터 비롯된 셈이지.”

주목을 받은 당사자는 태주였지만, 목소리와 표정만 놓고 봤을 땐 최 총장이 더 들떠 보였다.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 속물처럼 들리겠지만, 헌터의 가슴을 뛰게 하는 건 비단 몬스터만이 아니네. 능력을 인정받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는 것. 그것이야말로 헌터를 성장시키는 강력한 동기 부여이자 이 바닥을 지탱하는 유일한 원동력이지.”

최 총장이 앞에 놓인 테이블 위를 검지로 두어 번 두드리며 자신의 신념을 강조했다.

“어떤가? 자네를 기다리고 있을 유례없는 계약 조건들에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나?”

“네. 두근거립니다.”

“허허, 이거 반응이 영 시원치 않구먼. 다른 사람 같았으면, 벌써 입꼬리가 올라가다 못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시뻘게졌을 텐데 말이야.”

최 총장이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태주의 절제된 미소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한편으론 눈앞의 이익에 동요하지 않는 의연한 모습에 남다른 자신감을 느꼈다.

“혹시 내 입에서 사명감이나 정의로움 같은 고상한 단어가 나오지 않아 실망한 건가?”

“아니요. 전 그저 총장님의 건설적인 제안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허허, 사설이 길었다는 소리군. 좋아. 그럼 감질나지 않게 바로 얘기하도록 하지.”

격양된 어조를 누그러뜨린 최 총장이 태주를 향해 기울였던 상체를 뒤로 편안하게 기댔다.

“졸업하기 전까진 선택을 미루게.”

“선택이라면…….”

“국내가 됐든 해외가 됐든, 그 어떤 길드도 50퍼센트 이상의 희망을 갖지 못하게 하는 거지.”

“……?!”

태주가 자신의 계획과 일치하는 최 총장의 제안에 흠칫 놀랐다.

‘어? 안 그래도 밀당만 할 생각이었는데…….’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최 총장의 의중을 파악한 태주가 확인 차 질문을 건넸다.

“앞서 말했듯이 퀸스맨과 캘리포니아 불리스는 시작에 불과하네. 오늘은 유럽과 북미, 다음은 남미와 아시아, 더 나아가 아프리카를 비롯한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태주군의 존재를 알게 될 걸세. 쉽게 말해, 관리 대상으로 분류되어 받고 있는 소정의 용돈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지.”

재능 있는 각성자를 선점하기 위한 투자 문화가 한국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에 있는 학생이 해외 길드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는 경우는 이례적이다 못해 파격적인 결단에 속했다.

‘으음. 잘하면 이것도 개정판에 추가시킬 수 있겠는데?’

별개의 사안이긴 하지만, 한중연 학과장이 전설 등급의 아티팩트를 걸고 제시한 조건에 부합할 수 있는 후보군이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 이 모든 혜택은 어디까지나 특정 길드와의 구체적인 계약 논의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네. 어차피 졸업 후 정식 라이센스를 취득하기 전까진 급할 게 없으니까요.”

더 많은 길드로부터의 지원을 통한 수익의 극대화를 꽤하고 있던 태주의 입장에선 자신의 계획과 정확히 일치하는 최 총장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태주군의 선택이 늦어질수록 기다림에 지친 길드들이 하나둘 손을 떼려하겠지. 하지만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게, 매년 있을 국제 대회에서의 화려한 수상 실적이 그들의 인내심을 저절로 키워줄 테니까.”

“총장님께선 제가 국제 대회에서 입상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하시는 겁니까?”

“근거 없는 확신은 도박과도 같네만, 난 그 확신의 근거를 태주군, 자네에게서 얻었다네.”

태주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한 빈말로 치부하기엔 최 총장이 보내는 신뢰 어린 눈빛이 너무 진실해 보였다.

“난 지금껏 수많은 학생들을 봐 왔네. 특히 국제 대회를 준비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재능들과는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었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난 그 누구에게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네. 왠지 아나?”

“글쎄요.”

“그들은 내 앞에서 패배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네. 국제 대회에서의 수상을 요구하는 내 한마디만으로도 말이야.”

예민한 감지 능력을 지닌 태주가 최 총장이 뿜어내는 마력의 미세한 증가를 통해 감정이 고조되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태주군, 자네는 참으로 이상한 관상을 가지고 있네. 얼핏 보면 세속적인 것에 달관한 사람처럼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반대로 욕심과 이상이 너무 커 작은 이득엔 무감각해진 야심가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눈매를 지니고 있지만, 그 안엔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는 산군의 안광이 들어차 있지.”

부릅뜬 눈으로 태주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최 총장은 재능만을 가진 아이들과는 확연하게 결이 다른 날것 그대로의 호전적인 분위기를 확신의 근거로 삼았다.

“따라서 난 근거 없는 확신으로 도박을 하려는 게 아니라 총장으로서의 내 마지막 목표를 이뤄줄 수 있는 유일한 재목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는 것이네.”

“총장으로서의 마지막 목표라면 혹시 전에도 한 번 말씀하셨던…….”

“그래. 한국대 헌터학과의 순위를 세계 30위권 안으로 올리는 것이네.”

한국대 헌터학과의 경우 아시아 내에선 그나마 10위 안에 랭크되어 있었지만, 세계 랭킹에선 늘 40위 전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 대회의 수상 실적과 더불어 학과 자체의 국제적인 인지도 또한 순위 산정 기준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처럼 업계를 들썩이게 만드는 기사가 지속적으로 나오게 된다면 태주군은 물론 자네가 속한 한국대 헌터학과의 존재감까지 덩달아 상승하게 될 걸세.”

밋밋한 소재 따윈 관심 없는 언론의 입장에선 프로의 자격도 갖추지 못한 학부생의 소식을 다룰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입시 때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태주의 경우 단순한 신입생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행보 하나하나가 이슈화되고 조명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게 최대한 선택을 미루라고 하신 거군요. 제가 특정 길드의 잡은 물고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최 총장의 제안에 숨겨진 의도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모른 척 상대방의 입을 통해 구체적인 계획을 재확인하는 태주였다.

“사실 난 태주 군이 어떤 곳과 계약을 해도 상관이 없네. 심지어 해외 길드를 택한 뒤 귀화를 결심한다고 해도 말이야.”

한국대 헌터학과의 위상이 곧 자신의 명예라고 여기는 최 총장에게 필요한 건 재학생 신분의 태주였기 때문에 졸업 이후의 결정에 대해선 크게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귀화 얘기까지 나온 걸 보니 길어야 4년짜리 동맹이란 소리네.’

영원한 적도 벗도 없는 업계의 냉혹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터라 최 총장의 냉정한 발언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지만, 받아들이는 관점에 따라 최 총장의 비호를 학부 시절 내내 받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방향으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특정 길드가 50퍼센트 이상의 영입 가능성을 확보하는 순간, 자네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나머지 길드들이 다른 대안을 찾아 주저 없이 눈길을 돌릴 걸세.”

“으음. 그렇게 되면, 제가 소개될 때마다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수식어인 한국대 헌터학과도 인지도를 높일 기회가 줄어들겠네요.”

최 총장의 제안에 대한 실익을 머릿속으로 따져보던 태주가 거래의 주도권을 넘겨받기 위한 물밑 작업에 들어갔다.

“단순히 우리 학교가 최고라는 식의 막연한 언론 플레이로는 인지도를 올리는 것에 한계가 있네. 순위 선정을 담당하는 국제 헌터협회 또한 그러한 편법을 경계하고 있는 상황이고…….”

“한마디로 실체가 없는 홍보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국제 대회에서의 수상이 됐든 해외 길드의 러브콜로 인한 일시적인 화제성이 됐든 한국대 헌터학과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선 국제헌터협회가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꾸준히 만들어줄 수 있는 누군가의 활약이 반드시 필요하겠네요.”

태주는 최 총장의 제안에서 자신의 역할이 차지하는 비중이 월등히 높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시켜주고 싶었다.

“허허, 그 누군가가 지금 내 눈앞에 있지 않은가.”

최 총장이 태주를 향해 오른손을 들었다 내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차선책 정도는 마련해둬야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저와 같은 S급 각성자이자 고교 시절부터 이미 소문이 자자했던 허창민이 괜찮…….”

“대체자는 필요 없네. 아니, 누구도 자네를 대체할 순 없네.”

최 총장이 단호한 목소리로 태주의 말을 잘랐다.

물론 태주가 라이벌 구도에 있는 허창민을 추천한 건 어디까지나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한 번 더 짚고 넘어감과 동시에 자신에 대한 최 총장의 의존도를 높이려는 의도적인 액션에 불과했지만.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라……. 다른 사람도 아닌 총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자신에게 걸고 있는 최 총장의 기대감과 총애의 크기에 대한 검증을 마친 태주가 감사의 뜻을 전하며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허허, 내 진심이 통했다니 다행이군. 자, 그럼 이제 내 제안에 대한 답을 들려주지 않겠나? 물론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하면…….”

“아니요.”

이번엔 태주가 최 총장의 말을 끊었다.

“총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최 총장의 우려와 달리 태주는 흔쾌히 답을 내렸다.

“역시 자네는 말이 통할 줄 알았네.”

태주의 승낙에 한시름을 덜은 최 총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던 바로 그때.

“단.”

태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단?”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최 총장이 태주의 조건을 채 들어보기 전에 황급히 되물었다.

“내 제안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요. 총장님께서 제안하신 내용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건설적인 제안이라 하신 만큼 계산은 확실히 해야 될 것 같아서요.”

순간, 최 총장이 해석한 관상대로 순수한 눈매 속에 감춰져 있던 야생 호랑이의 매서운 눈빛이 최 총장의 기대감을 긴장감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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