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 글로벌 영어 (2)
- “뭐? 인생 2회차?”
- “갑자기 뭔, 개소리야.”
아는 것이 많아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의 신조어였지만, 태주가 자리하고 있었다면 흠칫 놀랐을 만한 농담이었다.
“아니. 내 별명이 예전부터 인생 2회차였다고.”
계산에 없던 냉정한 반응에 당황한 정웅이 황급히 상황을 수습해보려 했지만, 아이들의 시선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 “야, 근데 쟤 아까부터 말할 때마다 은근 잘난 척하지 않냐?”
- “은근이 아니라 대놓고 하던데? 말투도 꽤 거들먹거리고.”
- “하긴, 자신은 각성과 상관없이 한국대에 왔을 거라고 했을 정도니 뭐……. 새터 때 같은 조였던 애들은 다 알걸?”
정웅의 겸손하지 못한 태도를 문제 삼은 일부 아이들이 입을 가린 채 속삭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 “그나저나 태주 이제 영어 열심히 해야겠네.”
- “그러게. 실력도 실력이지만, 일단 말이 통해야 적응 기간도 짧아지고, 게이트 안에서의 의사소통도 훨씬 원활해지니까.”
- “야, 근데 태주도 우리처럼 기초반에 갈 것 같지 않냐? 막말로 우리가 한국대를 머리로 들어온 건 아니잖아.”
- “넌 그냥 태주가 영어라도 못 하길 바라는 거 아니야? 영어까지 잘하면 너무 배가 아플까 봐?”
- “아니, 뭐, 사람이 너무 완벽하면 인간미가 없으니까.”
- “그건 그렇고, 강의 계획서엔 100퍼센트 영어로만 진행된다고 나와 있던데, 제대로 수업이나 따라갈 수 있을까?”
- “보니까 세 반 중에 두 반은 외국인 교수님이던데?”
- “뭐? 두 분씩이나?”
- “그래도 우리가 너무 못 알아들으면 한국말도 하시겠지?”
- “그냥 안 되겠다 싶으면 대충 보디랭귀지나 해. 어차피 영어가 하루아침에 느는 것도 아닌데……. 혹시 또 알아? 너의 애잔한 몸부림에 감동한 교수님께서 후한 점수를 주실지?”
- “아아,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부터 영어 울렁증이 도지는 것 같네.”
- “야, 근데 태주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 오지? 첫날은 학번 순으로 분반을 해서 우리 반이 맞을 텐데?”
- “그러게. 태주가 원래 지각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혹시 복도에서 국제 전화라도 하고 있나?”
- “세준아, 너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
“안 그래도 지금 어디냐고 톡을 보냈어.”
메시지 옆에 뜬 숫자 1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세준이 문 쪽을 힐끗거리며 수업 시간을 체크하던 바로 그때.
덜컥!
강의실 앞문을 밀고 들어온 수업 조교가 양손 가득 든 종이 뭉치를 강의대 위에 내려놨다.
- “어? 교수님이 아니네?”
순간, 삼삼오오 모여 있던 아이들이 자신의 자리로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오늘 교수님은 안 오세요?”
영어에 나름 자신이 있던 정웅이 교수님의 지시를 받고 온 교양영어실 조교에게 당당히 물었다.
“네. 오늘은 별도의 수업 없이 레벨 테스트만 진행되고요. 점수 구간에 따른 수준별 반 배정 결과는 다음 시간 전까지 개별 문자로 공지될 겁니다. 아, 참고로 이번 테스트에선 간단한 독해 실력과 어휘, 그리고 약간의 문법적 지식 정도만 파악할 예정입니다. 혹시 질문 있으신 분?”
설명을 마친 조교가 시험지를 정리하며 학생들의 얼굴을 둘러봤다.
- “저, 혹시 실력에 비해 학점이 잘 나오는 경우도 있나요?”
영어 울렁증을 호소했던 동기 한 명이 소심하게 손을 들며 물었다.
“으음. 아쉽지만 없습니다.”
잠시 고민하는 듯했던 조교가 해맑게 웃으며 질문자의 기대감을 무너뜨렸다.
“Speech is silver, silence is golden. 흔히들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라고 하는데, 수업 참여도에 따른 태도 점수가 꽤 비중 있게 반영되는 만큼 강의 시간엔 정반대로 하셔야 좋은 학점이 나올 겁니다.”
- “어? 그러다 실수를 하면 더 마이너스가 되는 거 아니에요?”
“아니요. 교수님들께선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적극적인 학생들을 더 좋아하세요. Failure is the mother of success.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 들어 보셨죠? 언어를 배울 때 과묵한 건 절대 금물이니까 최대한 질문도 많이 하시고, 자신감 있게 대답하세요.”
- “네.”
A급 각성 수준에 어울리지 않는 E급 영어 실력에 위축됐던 질문자가 수업 조교의 친절한 조언에 약간의 희망을 얻었다.
“자, 더 이상의 질문이 없으시면 바로 테스트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업 조교가 각줄의 인원수대로 나눈 문제지를 맨 앞줄에 앉은 아이들의 책상 위에 차례대로 올려놓던 바로 그때.
“저, 아직 한 명이 안 왔는데요?”
자신이 보낸 메시지가 읽히지 않았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세준이 조교에게 태주의 부재를 알렸다.
“아아, 혹시 신태주 학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 그걸 어떻게 아세요?”
태주의 절친이라 자부하고 있던 세준이 자신도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한 수업 조교의 태연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분은 이미 이수 면제를 받아서 수업에 안 나오실 거예요.”
사실 태주는 수강 신청 당일, 궁수 모임에서 마주친 민주엽과의 예상치 못한 신경전을 계기로 선택과 집중이란 전략을 택하게 되었고, 같은 날에 속한 글로벌 영어로 시간을 뺏기지 않기 위해 특별 추가 접수 기간을 이용, 졸업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부했던 토익 실력을 발휘해 이수 면제를 받아 둔 상태였다.
“네?! 면제라고요?!”
조교의 답변에 소스라치게 놀란 세준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되물었다.
“네. 수강 정정 기간 안에 이수 면제 신청서랑 일정 점수 이상의 공인영어 성적표 원본을 스캔해서 메일로 보내주시면 바로 처리해드리거든요. 혹시 못 보셨어요? 강의 계획서에 다 나와 있을 텐데?”
덤덤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조교와 달리 강의실의 분위기는 태주의 이수 면제 소식으로 술렁였다.
- “야, 근데 그거 면제 기준이 꽤 높지 않았냐?”
- “토익 기준으로 아마 850점 이상인가 그랬을걸?”
- “뭐?! 850점 이상?! 그럼 990점일 수도 있다는 거잖아?”
- “와아, 난 아직 토익이 뭔지도 모르는데…….”
- “그나저나 태주는 언제 공부를 한 거지?”
- “그러게. 영미권 길드의 러브콜 때문에 영어 열심히 해야겠다고 그랬는데, 정작 영어 공부는 우리가 해야겠네.”
- “역시 연예인과 재벌, 그리고 태주의 걱정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어.”
- “아아, 이거 점점 인간미가 없어지네.”
대부분의 아이들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며 부러움을 표했지만, 동기들에게 영어 실력을 자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정웅은 자신의 안일한 준비성을 자책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아……. 내가 왜 시험을 안 봤지?”
물론 정웅의 자존심에 금이 가든 말든 아이들의 관심은 온통 태주에게 집중되어 있었지만.
“어? 그럼 면제를 받으면 그냥 A플러스를 주는 거예요?”
세준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질문을 이어갔다.
“아니요. 이수 면제된 과목은 취득 학점으로 인정되지 않아 결과적으로 글로벌 영어에 배정된 2학점이 이번 학기에 신청한 총 학점에서 차감되지만, 덕분에 교양 필수 과목에 대한 졸업 요건도 충족되고, 빠진 학점을 새로운 강의로 채울 수도 있기 때문에 18학점까지만 들을 수 있는 신입생의 입장에선 20학점을 채운 것과 같은 이득을 보는 셈이죠. 뭐, 물론 여유로운 대학 생활을 원하면 굳이 빈 학점을 메울 필요가 없지만.”
꼼꼼한 성격의 조교가 두 가지 선택지를 알려주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태주가 원하는 것은 던전 실습에 집중할 수 있는 간소한 시간표일 뿐, 부족해진 학점은 커리큘럼의 자율성을 확보한 이후에 만회해도 늦지 않다고 판단했다.
“으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네요.”
태주의 이례적인 노쇼 사태에 대한 궁금증을 소상하게 풀어준 조교가 설명에 소요된 시간을 체크하며 테스트를 서둘렀다.
“자, 그럼 학번과 이름은 꼭 표기하시고, 별도의 답안지는 없으니까 정답은 문제지에 체크해주시기 바랍니다.”
조교가 신호를 보내자 첫째 줄에 앉은 아이들이 뒷사람에게 시험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참고로 40분간의 테스트지만, 문항 수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시간 내에 풀지 못한 문제는 모르는 것으로 간주하시면 됩니다.”
문제지가 전달되는 모습을 확인한 조교가 휴대폰의 타이머를 맞추던 바로 그때.
지이잉!
【미안. 지금 좀 바빠서. 나중에 설명할게. 시험 잘 봐.】
테스트를 위해 진동으로 해놨던 세준의 휴대폰에 태주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뭐? 바빠? 진짜 해외 진출 건 때문에 그런가?’
테스트를 앞둔 세준의 보잘 것 없는 집중력이 태주를 둘러싼 불길한 예감으로 인해 더더욱 흐트러졌다.
‘아아, 이거 우리 길드도 뭔가 손을 써야 되는데…….’
물론 심리적인 핑계를 대기엔 세준의 기초 실력 자체가 터무니없이 부족했지만.
*
*
*
같은 시각.
“안녕하세요.”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은 태주가 총장실 안으로 들어서며 가벼운 목례를 건넸다.
“오오, 그래. 이리 와서 앉게.”
소파의 상석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최 총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안내했다.
“네. 그럼…….”
예상치 못한 부름이긴 했지만, 정황상 어떠한 이유로 자신을 보자고 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기사 잘 봤네. 덕분에 한국대 헌터학과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도 덩달아 높아졌더군.”
최 총장은 여전히 한국대 헌터학과의 대외적인 명성과 순위에 집착하고 있었다.
“네. 아직 정식으로 제안이 온 건 아니지만, 제 실력에 비해 조금 이른 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은 태주가 차분한 목소리로 겸손하게 대답했다.
“허허, 정말 이르다고 생각하는 건가?”
미소를 띤 최 총장이 태주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사람은 곧잘 나무에 비유되곤 한다네. 능력 있는 사람을 지칭할 때 재목(材木)이란 표현을 쓰는 것처럼 말이야.”
테이블 위에 놓인 고급 소나무 분재를 지그시 바라보던 최 총장이 손끝으로 푸른 솔잎을 쓰다듬었다.
“어떤가? 크기는 작지만 천년송 못지않은 기백이 느껴지지 않나?”
“네. 총장님께서 직접 가꾸신 겁니까?”
“아니. 선물로 받았네.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실 이 분재라는 것이 나처럼 과정을 즐기지 못하는 조급한 인간에겐 아주 곤욕스러운 취미거든.”
최 총장이 결과만을 중시하는 자신의 참을성 없는 성격을 분재에 빗대어 말했다.
“하지만 태주 군을 보면서 알게 됐다네. 그 지루한 기다림이 누군가의 즐거움일 수도 있다는 것을.”
“과찬이십니다.”
“허허, 누가 보면 내가 칭찬에 후한 사람인 줄 알겠군.”
대의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가벼이 여길 만큼 냉정한 면모가 다분한 인물이었지만, 유독 태주에게 있어서만큼은 너그럽고 관대한 경향이 있었다.
“태주 군은 스스로를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한 씨앗쯤으로 여기겠지만, 내가 봤을 땐 이미 묘목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훌륭한 재목감이네. 퀸스맨과 캘리포니아 불리스의 선택만 봐도 확실히 알 수 있지.”
물론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태주의 역사적인 행보가 자신의 목적에 부합한다는 판단하에 행해진 대가성 짙은 친절이었지만.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하네.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아주 건설적인 제안을 말이야.”
최 총장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