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 헌터의 역사 (7)
‘갑자기 무슨 일이지?’
민대엽과는 사적인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태주라 지금의 상황이 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형 때문인가?’
그나마 추측할 수 있는 명분은 하루 앞으로 다가온 민주엽과의 만남이었다.
“1분이면 되는데…….”
듣는 귀가 부담스러웠던 대엽이 태주의 곁에 있던 세준을 힐끗 쳐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뭐야, 지금 나더러 빠져달라는 거야?”
대엽의 짧지만 노골적인 눈짓을 읽어낸 세준이 검지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미안. 내가 태주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무안을 줄 의도까진 없었던 대엽이 세준에게 황급히 양해를 구했다.
“들었지? 금방 따라갈게.”
이유가 궁금했던 태주가 세준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아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소외감이 들지?”
재룡과 대엽으로부터 들러리 아닌 들러리 취급을 당한 세준이 혼잣말을 하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자, 이제 얘기해 봐.”
“……어, 그래.”
세준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대엽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참 한결같네.’
태주의 눈엔 조심성 많은, 달리 표현하면 소심한 구석이 있는 대엽의 모습이 그리 새롭지는 않았다.
물론 내성적인 모습에 감춰진 A급 어쌔신으로서의 잠재력은 회귀 전부터 이미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사실 친형이자 영원한 비교 대상인 S급 어쌔신, 민주엽으로 인해 저평가된 케이스이긴 하나, 레이드의 기초 시간에 이루어진 생존 미션에서 허창민 다음으로 오래 버틴 탈락자로 랭크될 만큼 대엽 역시 태주의 잠재적인 경쟁자들 중 한 명이었다.
“내일이지? 던전 실습1이.”
대엽의 첫마디는 태주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어.”
“우리 형이 그러더라. 내일이 아주 기대된다고.”
“아, 너희 형……. 곱창집에서 마주쳤다고는 얘기 안 해?”
“평소에 대화를 잘 안 해. 그냥 일방적으로 와서 떠들다 가는 거지.”
“그래도 좋겠네. 클래스가 같은 형한테 노하우도 배울 수 있고.”
대엽의 속사정을 모르는 척 태연한 얼굴로 말하긴 했지만, 태주는 이미 남다른 교육열을 가진 대엽의 어머니가 두 형제의 우애를 경쟁심으로 변질시켰다는 걸 알고 있었다.
“노하우……. 대화가 없는데 무슨 노하우를 공유해.”
태주의 빈말임을 알 리 없는 대엽이 시선을 떨어뜨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뭐, 딱히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아, 미안. 1분이면 된다고 해놓고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놨네.”
“아니. 쓸데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판단할 테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쫓기지 말고 얘기해. 어차피 다음 수업도 없으니까.”
긴장감에 조급해진 대엽이 준비한 말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태주가 먼저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고마워. 우리 형 같았으면 진즉에 꺼지라고 했을 텐데……. 역시 인성도 S급이라는 소문이 사실이었네. 솔직히 공대원 전원을 전력 외 멤버로만 구성했을 땐 이미지 메이킹을 하면서 포인트를 독식하려는 속셈이 아닐까 의심했었는데……. 미안. 내 생각이 짧았어.”
태주의 배려심에 감동한 대엽이 자신의 지나친 상상력을 자책하며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S급 인성은 무슨…….”
‘뭐지? 의외로 예리한 구석이 있는데?’
대엽의 착각 아닌 착각에 뜨끔했던 태주가 터무니없는 오해인 양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했다.
물론 그마저도 대엽의 눈엔 타인의 칭찬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겸손한 모습으로 비춰졌지만.
“그건 그렇고, 내일 있을 던전 실습1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자신에게 집중된 화제를 자연스럽게 돌린 태주가 본론을 유도하며 물었다.
“아, 그게……. 내일 가서 기죽지 마.”
잠시 뜸을 들이던 대엽이 비장한 어조로 당부의 말을 전했다.
“…….”
두 귀를 의심케 하는 대엽의 허무한 대답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게……. 다야?”
“어.”
장난기 하나 없는 진지한 표정이 태주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론 진심이 전해지는 한 줄의 조언이 백 마디 말보다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음……. 기죽지 말라는 소리가 꼭 기죽을 일이 생긴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역시 기선 제압을 할 생각인가?’
위협이 예고되어 있음을 알게 된 태주가 민주엽의 견제를 의심하던 바로 그때.
“선배들의 노골적인 따돌림이 있을 거야.”
“뭐?”
4학년 과탑인 민주엽만 의식하고 있던 태주의 입장에선 별로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민주엽이 배후에서 지시하는 건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민주엽 정도의 실력과 영향력을 갖춘 인물이면, 동기들을 이용해 심리적인 압박을 가할 수 있을 것이란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형이 동기들이랑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듣게 된 거라 나도 정확히 어떤 식으로 따돌리겠다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따돌림을 제안한 사람이 형은 아니었다는 거야.”
아이러니하게도 대엽은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주엽의 결백을 확신하고 있었다.
‘민주엽이……. 아니라고?’
순간, 자신의 알리바이를 위해 일부러 통화의 내용을 흘린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마저 들었다.
“확실해? 형이라고 두둔하는 건 아니고?”
“좀 전에 얘기했잖아. 서로 말도 잘 안 섞는다고……. 심지어 내가 통화 내용을 들은 것도 모를걸?”
“그래? 그럼 너희 형은 뭐라고 그랬는데?”
민주엽의 동조 여부가 궁금해진 태주가 다소 예민해진 눈빛으로 적나라하게 물었다.
“어……. 내가 들었을 땐 확실히 맞장구를 치거나 동참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어. 그냥 방관자의 느낌?”
“방관자…….”
회귀 전, 무려 4년이란 긴 시간동안 지속됐던 태주의 외로운 싸움.
물론 가해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방관자의 냉담한 시선과 외면 역시 태주의 학교생활을 녹록치 않게 만드는 요소들 중 하나였다.
‘결국 막을 생각은 없다는 거네.’
태주는 따돌림을 기획한 누군가가 동기들의 그릇된 행동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주엽에게 먼저 허락을 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무튼 내일 가서 기죽지 않을게. 알려줘서 고마워.”
기껏 도움을 준 대엽에게 친형의 태도를 문제 삼아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쉽게도 선배들의 견제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까진 들을 수 없었지만, 덕분에 심리적인 대비도 가능해졌고, 민주엽에게 국한된 경계심의 범위도 확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그리고?”
끝인사를 나누기 위해 책상에서 일어난 태주가 대엽의 머뭇거림에 발걸음을 멈췄다.
“우리 형 좀 대신 이겨 줘.”
“뭐?”
대엽의 황당한 부탁에 놀란 태주가 한쪽 귀를 들이밀며 되물었다.
“진심이야?”
“어.”
이번에도 역시 장난기 하나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말이 하고 싶어서 보자고 한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너밖에 없어서…….”
“그래도 핏줄 아니야? 솔직히 남의 집안싸움에 휘말리는 것도 썩 내키진 않고.”
대엽의 부탁이 아니어도 커리큘럼의 자율권을 보장받기 위해 주엽을 넘어서야 하는 태주였지만, 타인의 개인적인 유감에 응해 경쟁을 하고 싶진 않았다.
“단 한 번이라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어. 누군가의 재능에 대한 열등감과 무력감을…….”
“그 감정……. 혹시 네가 느끼고 있는 거야?”
“어. 태어나서 딱 두 명에게만…….”
습관처럼 시선을 떨구던 대엽이 태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강요하려는 건 아니야. 사주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고……. 그냥 너에 대한 응원 정도로만 가볍게 여겨도 돼. 어차피 이런 사적인 얘길 맨 정신에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후련하니까.”
태주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대엽이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터주었다.
“시간 내 줘서 고마워. 아, 그리고 세준이한테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전해줘.”
“그래. 꼭 그럴게. 근데…….”
점멸을 준비하던 태주가 대엽의 한쪽 어깨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네가 이렇게 부탁하지 않아도 어차피 이길 생각이었어.”
“……?!”
단순한 허세나 객기로 느껴지지 않는 태주의 자신만만한 언행에 대엽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아, 그리고 미리 경고해 줘서 고맙긴 한데, 앞으론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 내가 봤을 땐 너도 충분히 재능이 있으니까.”
“태주야…….”
“그럼 먼저 간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짧은 격려의 말을 남긴 태주가 대엽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물론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상대로부터 뜻밖의 위로를 얻은 대엽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에 살짝 목이 메었지만.
“맞네. S급 인성…….”
*
*
*
다음 날 아침.
교양 필수 과목인 글로벌 영어를 듣기 위해 모인 아이들이 교수님을 기다리며 잡담을 하고 있었다.
- “분반 수업이라 그런지 뭔가 고3 때 느낌이 나는데?”
글로벌 영어 수업의 경우 수준별 분반 수업이 예정되어 있어 30명 전후의 인원만 수용할 수 있는 작은 강의실이 배정되었는데, 아직은 반 편성을 위한 레벨 테스트를 거치기 전이라 학번 순으로만 반을 나눈 상태였다.
- “아아, 나 영어 진짜 못 하는데 어떡하지? 오늘 레벨 테스트 있다며.”
-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냥 나랑 같이 기초반이나 가면 되지.”
수능 점수를 반영하지 않는 헌터학과의 특성 상 각성과 동시에 학업을 등한시하는 케이스가 상당수 존재했다.
- “야, 그나저나 입학한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왜 이렇게 피곤하냐?”
- “뭐야, 너 어제도 술 마셨냐?”
- “마셨지. 근데 맨날 술만 마시니까 뭔가 좀 늘어지는 거 같아. 개인 훈련도 자꾸 미루게 되고…….”
- “야, 뭘 그런 거 가지고 혼자 스트레스 받고 그래. 오티 때 선배들 얘기 못 들었어? 원래 죄책감 없이 놀 수 있는 유일한 시기가 지금이라잖아.”
- “그럼 그럼. 왜 그런 말도 있잖아. 헌터학과 신입생의 숙취는 패시브 스킬의 일종이다.”
- “어차피 2학년만 올라가도 학점 관리에 취업 스펙 쌓느라 잘 시간도 부족하다니까 지금은 그냥 남들 놀 때 같이 놀아. 괜히 어설프게 멀티 플레이 하다가 후회하지 말고.”
- “맞아. 물론 오늘 할 훈련을 내일로 미루면 안 되겠지만, 솔직히 고생하는 건 내일의 나지 오늘의 나는 아니니까.”
- “으음……. 그런가?”
- “그렇다니까.”
- “에잇! 그래 뭐 까짓것, 1년 논다고 A급이 C급 되는 것도 아니고. 야, 오늘 불금인데 끝나고 술이나 먹으러 가자.”
입학과 동시에 학점 관리는 물론 리더스 배지를 비롯한 각종 스펙들까지 성실하게 쌓고 있는 태주와 달리 대부분의 아이들은 뒤바뀐 우선순위를 신입생의 특권이라 여기며 안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바로 그때.
- “어? 뭐야, 이거. 야, 너희들 이거 봤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한 아이가 호들갑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