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 헌터의 역사 (6)
“한 가지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태주가 특유의 덤덤한 얼굴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 “뭐야, 태주도 1개야?”
- “그래도 한계를 모르는 자의 한 개는 차원이 다르겠지?”
- “야, 설마 창민이랑 똑같이 국제 대회 우승을 적은 거 아니야?”
- “어? 그럼 대놓고 경쟁을 하겠다는 거잖아. 어차피 우리 기수 중에선 1명밖에 못 나가는 건데.”
- “으음. 창민이 입장에선 살짝 기분이 나쁘면서도 쫄리겠는데?”
- “그러게. 뭐, 우리가 그랬으면 신경도 안 썼겠지만.”
태주에 대한 동기들의 기대감 덕분에 목표의 개수밖에 밝히지 않았음에도 흥미로운 추측들이 이어졌다.
“한 가지라……. 자, 준비가 됐으면 시작해보게.”
다양하고 창의적인 목표들을 기대했던 한 교수가 28기를 대표하는 실력자 2명의 지나친 신중함에 약간의 아쉬움을 드러냈다.
바로 그때.
“네. 제 목표는 한 해도 빠짐없이 이름을 올리는 겁니다. 바로 이 책에.”
빈손으로 서 있던 태주가 한 교수에게 교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
학생들과 비슷한 추측을 하고 있던 한 교수가 태주의 답변에 흠칫 놀랐다.
“그 말인즉슨 개정판에 추가될 만한 의미 있는 족적들을 매년 남기겠다는 건가? 프로도 아닌 학부생의 신분으로?”
얼핏 보면, 국제 대회 우승이라는 허창민의 구체적인 목표보다 난이도도 높아 보이고, 막연하다는 느낌 또한 지울 수 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태주가 노리고 있는 것은 모두가 느끼고 있는 그 막연함의 함정이었다.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뭐가 돼도 상관이 없는 모호한 성공 조건.
한 교수가 아직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올해 안에 목표를 이룰 시 특별한 보상이 있다는 것을 아는 태주는 허창민처럼 특정한 목표를 정할 경우 그 어떤 유의미한 성과를 내도 해당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순간 한 교수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지만, 포괄적인 목표를 정할 경우 분야의 제한이 없는 다양한 도전을 통해 달성 확률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력해보겠습니다.”
태주가 한 교수의 우려 섞인 물음에 겸허한 태도로 답했다.
“참고로 쉽지는 않겠지만, 올해 안으로 개정판에 추가될 만한 목표를 달성한 학생에겐 아주 특별한 선물을 주도록 하겠다.”
보상이 존재한다는 소식에 강의실의 분위기가 잠시 술렁였지만, VIP 초청권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해 보상에 대한 기대치는 상당히 낮아진 상태였다.
- “저, 교수님, 혹시 이번 선물도 입장권 같은 겁니까?”
한 학생이 보상의 종류에 대해 물었다.
물론 단순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질문일 뿐, 한 교수가 제안한 조건을 달성할 자신이나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지만.
“으음.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내년에 미국에서 열릴 국제 컨퍼런스에 동행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니까 일정 부분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지?”- “뭐야, 국제 컨퍼런스에 동행을 한다고? 그것도 교수님이랑?”
- “야, 그건 상이 아니라 벌칙 아니야? 완전 대학원 선배들이 하는 수행비서 역할이잖아.”
- “에이, 그럼 뭐, 죽자고 매달릴 과제는 아니네.”
- “그러게. 그냥 예비 헌터로서의 목표를 수립해보라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는 거 같은데?”
- “난 또 무슨 대단한 아티팩트라도 하나 떨어지는 줄 알았네.”
그나마 있던 아이들의 작은 기대감마저 한 교수의 대답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물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자리 빛내기 배지를 노리는 태주의 입장에선 초청 횟수를 반으로 줄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지만.
사실 자리 빛내기 배지는 헌터 협회에서 주관하는 공식 행사에 3번을 초청받아야 획득할 수 있었다.
단, 헌터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학부생들에겐 초청의 기회가 많지 않아 기준을 만족시키는 것이 어려웠는데, 헌터 박물관의 재개관식처럼 대한헌터협회에서 주최하는 행사와 달리, 해외에서 열리는 국제 컨퍼런스처럼 국제헌터협회에서 마련한 공식 행사에 초청된 경우 예외적으로 회당 두 번의 참석으로 간주해주었기 때문에 두 차례의 참여만으로도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혹시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나?”
한 교수가 다음 발표자를 물색하기에 앞서 태주의 각오를 물었다.
“하고 싶은 말보단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었던 태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묻는 말에 답했다.
회귀 전, 개정판에 추가될 만한 목표를, 그것도 입학 첫 해에 달성한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는데, 태주의 경우 이미 한국 헌터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업적 두 개를 인정받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 편하게 물어보게.”
“네. 다름이 아니라 개정판에 추가될 만한 목표의 달성 시점이 정확히 언제부터를 의미하는지 궁금합니다.”
“언제부터?”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한 교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으음. 그러고 보니 기준을 언제로 잡느냐에 따라 조건이 이미 성취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군.”
대부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몇몇 눈치 빠른 아이들은 상황 파악을 끝낸 뒤 태주의 득실 관계를 따져보고 있었다.
- “어? 이건 진짜 좀 애매한 문제 같은데?”
- “그러게. 세계 최초의 매직 아처나 레이드 경험이 없는 유일한 N차 각성자 모두 개정판에 실을 만한 역사적인 키워드들이긴 한데, 이게 또 수업을 듣기 전에, 그러니까 교수님이 과제를 내주시기 전에 이룬 성과들이라…….”
- “한마디로 한 해도 빠짐없이 개정판에 이름을 올리겠다는 태주의 기준에 따르면 시기와 상관없이 조건을 충족하게 되는데, 만에 하나 교수님께서 오늘 이후로 성취한 목표에 대해서만 인정하시겠다고 하시면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업적을 달성해야 된다는 거네.”
- “뭐, 기준점을 정하는 건 전적으로 교수님 마음이니까.”
- “근데 기준점 이전이어도 최소한의 보상은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어차피 다음 개정판엔 무조건 실릴 내용인 거 같은데.”
기성 업적의 포함 여부를 둘러싼 동기들의 논의가 곳곳에서 들려왔지만, 정작 당사자인 태주의 얼굴에선 기준점을 앞당기고 싶다는 의지나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헌터학과 체제 이후의 최연소 던전 참가자.
사실 태주는 앞선 두 가지 업적의 포함 여부와 상관없이 새롭게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확실한 기회를 확보해 둔 상태였다.
과거, 아무런 제한 없이 게이트를 들락거리던 1세대 헌터들과 달리 협회가 설립되고, 헌터학과를 통해 최소한의 자격 요건을 부여하는 시스템이 자리 잡힌 이후부터는 최소 3학년 이상이 되어야 수업 혹은 인턴십 등의 명분으로 실제 던전을 체험할 수 있었는데, 태주처럼 던전 실습1의 수강이 확정된 상황에선 20살의 나이로도 던전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5대 길드로부터 여름 인턴십 제안까지 받고 있는 태주의 입장에선 던전 실습1이 아니어도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존재했지만.
“좋아.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지.”
고심 끝에 합의점을 찾은 한 교수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우선 국제헌터협회로부터 공인받은 사안을 함부로 누락할 순 없으니 예외적으로나마 개정판에 추가될 만한 목표를 이미 달성한 것으로 인정, 미국에서 열릴 국제 컨퍼런스에 동행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도록 하겠다.”
아이들의 우려와 달리 합리적인 성격의 한 교수는 태주가 예상한 경우의 수 중 가장 이상적인 판단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자리 빛내기 배지를 획득하기 위한 최적의 수단을 확보하는데 성공한 태주가 한 교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바로 그때.
“단.”
단호한 울림이 있는 한 교수의 한마디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와는 별개로 이전에 없던 새로운 업적을 올해 안에 달성한다면, 내가 보유한 전설 등급의 아티팩트 중 하나를 선물로 주도록 하겠다.”
한 교수는 새롭게 도입한 동기 부여 과제를 시작과 동시에 달성해 버린 태주가 목표 의식을 잃지 않도록 솔깃한 제안 하나를 덧붙였다.
‘오호라.’
뜻밖의 호재를 맞이한 태주의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혹시 내 결정에 이의가 있나?”
“아니요. 쉽지는 않겠지만, 열심히 노력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제 다음 사람을 호명해도 되겠지? 최원무.”
태주의 궁금증을 200퍼센트 풀어준 한 교수가 이번엔 동기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소영과 한 몸처럼 붙어 있는 원무의 이름을 불렀다.
“네, 교수님. 바로 일어나서 발표하면 되나요?”
갑작스러운 부름에 허겁지겁 책을 든 원무가 한 교수의 눈치를 살피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니. 그보다 좀 떨어져 앉는 게 어떻겠나?”
“네? 아, 네, 죄송합니다.”
지목이 아닌 지적이었다는 걸 깨달은 원무가 민망함에 달아오른 볼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조용히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
*
*
잠시 후.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다.”
두 번의 쉬는 시간을 포함한 3시간짜리 강의를 알뜰하게 활용한 한 교수가 드디어 묵직한 교재의 하드커버를 덮었다.
“별도의 과제는 없지만, 1372페이지에 작성한 내용은 늦어도 다음 시간 전까지 강의 게시판에 올려두길 바란다.”
- “네.”
한 교수와의 첫 시간부터 제대로 진이 빠진 아이들이 고3 시절을 방불케 하는 알찬 강의 구성에 혀를 내둘렀다.
“와아, 막판엔 너무 졸려서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네……. 야, 태주야, 차라리 몸으로 배우는 게 더 낫지 않냐? 오래 앉아 있었더니 허리도 아프고, 으짜짜짜!”
오만상을 찌푸리며 일어난 세준이 깍지를 낀 두 손을 머리 위로 힘차게 밀어내며 요란하게 기지개를 켰다.
“뭐, 그렇다고 딱히 몸으로 배우는 수업을 열심히 듣는 것도 아니잖아.”
“어? 아, 뭐, 그건 그렇지만……. 어휴, 갑자기 잠이 확 깨네.”
태주의 뼈 있는 농담에 뜨끔한 세준이 머쓱한 표정으로 황급히 가방을 챙겼다.
“태주야, 난 다음 수업이 있어서 먼저 갈게.”
태주의 등을 가볍게 터치한 재룡이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친근하게 말했다.
“어, 그래. 단톡방 만들면 초대하고.”
공대원 모임을 잊지 않은 태주가 인벤토리에 책을 넣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어. 이따 세준이랑 같이 초대할게. 세준아, 그럼 다음에 보자.”
“어? 어, 잘 가.”
재룡과의 사이가 아직은 서먹한 세준이 한쪽 입꼬리를 어색하게 실룩이며 손인사를 건넸다.
“태주야, 넌 오늘 수업 이거 밖에 없었지?”
휴대폰으로 강의 시간표를 체크하던 세준이 태주에게 물었다.
“어. 난 금요일만 빼곤 다 하나야.”
두 장의 초청권 등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어내는데 성공한 태주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나려던 바로 그때.
“저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애써 용기를 낸 티가 나는 부자연스러운 표정과 조심스러운 목소리.
“어?”
태주가 자신의 앞을 가로 막은 의외의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