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헌터의 역사 (4)
- “뭐야, 갑자기?”
- “어? 난 앞쪽만 예습하고 왔는데.”
- “그나저나 책 한 번 더럽게 두껍네.”
그리 긴 역사를 지닌 건 아니었지만, 사진을 비롯한 참고 자료들이 많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어리둥절한 아이들과 달리 태주는 1372페이지가 의미하는 바와 한 교수의 평가 방식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 “어?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 “그러게. 그냥 빈 페이지네? 메모장인가?”
- “교수님이 잘못 말씀하신 거 아니야?”
- “아니면 편집이 잘못된 걸 알려주시려고 그랬나?”
이런저런 추측을 해보던 아이들이 한 교수와 책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1372페이지에 뭐가 있지?”
아이들의 의아한 반응을 기다리고 있던 한 교수가 고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해당 페이지가 백지로 남겨진 의도를 알아내지 못한 학생들이 합창하듯이 대답했다.
“그래. 아무 것도 없다. 물론 너희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비워 둔 공간이지만.”
실수가 아니었다는 걸 확인한 아이들이 또 한 번 술렁였다.
“내가 집필한 내용은 정확히 1371페이지까지다. 최근의 동향을 정리함과 동시에 장차 마주하게 될 헌터의 미래를 조심스럽게 예측하면서 책은 마무리되고 있지. 자, 그럼 여기서 문제.”
- “뭐? 문제?”
한 교수의 깜짝 퀴즈에 아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비워둔 이유를 맞추는 이에겐 작은 보상을 주겠다.”
- “작은 보상? 혹시 성적과 관련된 건가?”
- “‘작은’이란 수식어가 좀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손해를 보는 건 아니니까.”
- “마지막 페이지를 비워둔 이유라……. 좀 전에 분명 우리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비워두신 거라고 하셨는데…….”
보상이 존재한다는 말에 솔깃해진 아이들이 의욕적인 눈빛으로 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 “저, 교수님.”
한 교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아이가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그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 “아니요. 이유를 말씀드리려는 게 아니라 제가 가지고 있는 책엔 빈 페이지가 없어서요.”
“선배에게 물려받은 건가?”
- “네. 아까부터 말씀드리려고 그랬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구판의 경우 개정판에 비해 분량이 적어 1372페이지 자체가 없을 거다. 더욱이 빈 페이지는 개정판에만 추가된 사항이라 선배에게 물려받은 책엔 없는 게 당연한 거고.”
- “아, 네…….”
“따라서 책을 물려준 선배에게 몰래 메시지를 보내도 원하는 답을 얻을 순 없을 거다. 물론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기회마저 제한할 생각은 없지만……. 자,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되었나?”
- “네. 감사합니다.”
나름의 수완으로 책값을 아꼈다 생각했던 아이가 펼쳐놨던 책을 덮으며 개정판을 마련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그때.
- “교수님!”
- “교수님!”
한 교수의 의중을 헤아려보던 아이들이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거침없이 손을 들기 시작했다.
“아, 참고로 적극적인 참여 자세는 좋지만, 보상이 있으면 페널티도 있는 법이니 신중하게 손을 들기 바란다.”
- “뭐야, 페널티가 있다고? 그럼 얘기가 또 달라지지.”
- “그러게. 괜히 초반에 나섰다가 틀리면, 똑같은 오답을 생각했던 애들만 이득을 보는 거잖아.”
- “으음. 듣고 보니 또 망설여지네…….”
- “근데 어차피 생각하는 건 다 거기서 거기니까 한두 명만 먼저 오답 판독기로 쓰면 맞힐 확률이 올라가지 않을까?”
어떠한 페널티가 예정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 있게 도전했던 모든 아이들이 주위를 둘러보다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바로 그때.
“…….”
신중하다 못해 소극적으로 변한 아이들 틈에서 말없이 손을 드는 한 사람.
- “어! 들었다!”
- “누가?”
- “야, 저거 태주 아니야?”
- “어? 진짜네?”
- “으음. 너무 섣부른 거 아니야?”
- “역시 페널티 따윈 두렵지 않다는 건가?”
- “덕분에 페널티의 정체가 공개되니 나쁠 건 없지 뭐.”
- “그럼 우린 태주가 틀린 답만 빼고 말하면 되겠네?”
오답 판독기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 모두 태주의 성급한 도전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물론 동기들의 오답 판독기 따위로 이용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래. 신태주. 이유가 뭐지?”
학생들의 창의적인 오답을 기대했던 한 교수가 유일한 도전자인 태주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물었다.
“그건 마지막 장을 집필할 수 있는 권한을 저희에게 양보하셨기 때문입니다.”
“……?!”
강의실에 발을 들인 이후 단 한순간도 흔들린 적이 없는 한 교수의 냉정한 눈동자가 태주의 대답에 처음으로 요동쳤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찰나의 감정을 숨긴 한 교수가 호흡을 가다듬은 뒤 질문을 이어갔다.
“우선 첫 번째 힌트는 1372페이지를 제외한 모든 페이지였습니다.”
“뭐?”
“목차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교재는 처음 게이트가 열린 시점부터 불과 몇 개월 전까지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서술 방식은 다른 역사책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구성일 텐데.”
“네, 맞습니다. 따라서 한국 헌터의 역사와 미래라는 제목에 걸맞게 헌터의 바람직한 미래상과 앞으로의 전망으로 끝맺음으로 하고 있는 이 책의 흐름상 1371페이지의 다음 장에 올 수 있는 유일한 내용은 아직 써내려가지 않은 역사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 지금까진 그리 나쁘지 않은 추론이었다. 하지만 아직 써내려가지 않은 역사의 주인공을 왜 너희라고 단정했지?”
“그건 바로 교수님이 주신 두 번째 힌트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힌트?”
“네. 너희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비워둔 공간이라고 하셨던 교수님의 말씀. 전 그 말씀에서 첫 번째 힌트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확신이라……. 설마 오답엔 페널티가 있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정답엔 보상이 있다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사제 간의 팽팽한 신경전에 숨죽이고 있던 아이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야, 이거 기 싸움이 장난 아닌데? 무슨 취조하는 줄?”
- “그러게.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지?
- “와아, 진짜 안 하길 백번 잘했다.”
- “근데 태주가 말한 게 정답이 맞을까?”
-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걸 어떻게 한 번에 맞혀. 아직 오답도 안 쌓이고, 추가 힌트도 안 주셨는데.”
- “하긴, 지금 분위기로 봐선 토시 하나도 안 틀리고 맞혀야 인정해주실 것 같긴 하네.”
태주의 정답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은 대체로 회의적이었다.
물론 퀴즈의 당사자인 태주와 한 교수는 생각이 좀 달랐지만.
“좋아. 그럼 정확히 어떠한 내용을 적을 생각이지?”
“장차 이루고 싶은 것들을 적을 생각입니다. 이 교재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의미 있는 발자취로만.”
다른 학생의 입에서 똑같은 대답이 나왔다면 비웃음을 사거나 허황된 목표로 치부되었겠지만, 매순간 스스로를 증명해보이고 있는 태주의 남다른 무게감이 발언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하하하하.”
시종일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한 교수가 태주의 대답에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웃었다.
- “어? 갑자기 왜 웃으시지? 정답이 어이없어서 그러신가?”
- “어! 그럼 바로 손들어야겠다.”
웃음의 의미를 오해한 아이들이 다음 차례를 노리며 움찔거리던 바로 그때.
“정답이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아주 완벽한…….”
오답 퍼레이드를 예상했던 한 교수가 제법이라는 표정으로 태주의 정답을 인정했다.
- “오오, 대박!”
- “뭐야, 진짜 한 번에 맞혔다고?”
- “야, 오티 때 운빨 쩔었던 거 기억 안 나?”
- “그래도 이번 건 단순한 운이 아닌 거 같은데? 나름 근거도 있었고.”
- “그러게. 단순히 피지컬만 좋은 게 아니라 추론 능력도 장난 아니네.”
- “그나저나 보상이 뭐지?”
정작 정답자인 태주보다 제3자들이 더 호들갑을 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자, 그럼 약속대로 작은 보상을 주어야겠군.”
한 교수가 책 속에 끼워둔 손바닥만 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 “어? 저게 뭐지?”
- “생긴 건 무슨 콘서트 티켓 같은데?”
한 교수의 손에 들린 종이의 정체가 궁금했던 아이들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가늘게 눈을 떴다.
바로 그때.
“브리즈.”
한 교수가 나지막이 주문을 외자 셔츠의 소매가 펄럭이며 한 줄기 미풍이 일었고, 쥐고 있던 종이가 그 바람에 실려 태주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 “오오.”
아이들의 시선이 춤추듯이 부유하는 종이의 움직임을 따라 저절로 이동했다.
툭!
한 교수가 마법을 그치자 정처 없이 떨어지는 낙엽 같던 종이가 태주의 책상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어? 이게 뭐지? 헌터 박물관 재개관식 VIP 초청권?”
호기심 많은 세준이 얼굴을 들이밀며 종이에 적힌 문구를 읽었다.
“내가 준비한 작은 보상에 실망하진 않았겠지?”
초청권이 제대로 전달된 것을 확인한 한 교수가 태주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아니요. 헌터 박물관엔 아직 가본 적이 없어서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미소로 화답한 태주가 VIP 초청권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 “야, 근데 솔직히 박물관 입장권은 좀 아니지 않냐? 저런 건 원래 3천 원 정도만 내면 들어갈 수 있잖아.”
- “그러게. 애초에 작은 보상이라고 해서 설마설마했는데, 교수님 스케일이 저 정도로 작을 줄은…….”
- “어차피 가지도 않을 거 포기하길 잘했네.”
- “난 중학교 때 단체로 한 번 가 봤는데, 딱히 볼 것도 없고 지루해서 한 10분 정도 돌다가 바로 PC방으로 빠졌어.”
VIP 초청권의 의미를 알 리 없는 아이들이 평범한 입장권 취급을 하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물론 확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도전했던 태주와 초청권을 마련한 한 교수만큼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아이들의 경솔한 반응을 속으로 비웃고 있었지만.
‘일단 3분의 1 확보 완료.’
사실 태주는 200종이 넘는 리더스 배지 중 달성 난이도가 높은 편에 속하는 ‘자리 빛내기 배지’를 노리고 있었다.
이미 ‘수석 합격 배지’의 획득으로 동기들과의 수집 경쟁에서 한 발짝 앞서 나간 태주였지만, 회귀 전 허창민의 기록인 31개를 일찌감치 뛰어넘기 위해선 잠시도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 “야, 그럼 페널티도 별 거 없었던 거 아니야?”
- “그러게. 내가 한번 물어볼까?”
페널티의 존재에 몸을 사리던 아이들 중 한 명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 “저, 교수님, 오답에 대한 페널티도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페널티……. 제자가 궁금하다는데 당연히 알려줘야지.”
순간,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한 교수가 질문자를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