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헌터의 역사 (3)
“무슨 일이지?”
한 교수가 손을 든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차분하게 물었다.
“출석 체크 중에 죄송하지만, 교수님의 말씀 중 바로잡아야 될 부분이 있어서요.”
당돌한 발언을 서슴지 않은 학생의 이름은 허창민이었다.
“내가 말실수를 했다는 건가?”
“말실수라기보다는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아서요.”
“그래. 내가 정확히 어떠한 점을 오해했지?”
보는 이에 따라 다소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지만, 한 교수는 신사적인 태도로 문답을 이어가고 있었다.
“조금 전 교수님께서 차석으로 입학한 저를 1등을 놓친 아쉬운 사람으로 묘사하셨는데,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수석에 대한 아쉬움도 없고, 태주에 대한 자격지심이나 열등감 따윈 더더욱 없습니다.”
고교 시절부터 이미 높은 각성 수준으로 유명했던 허창민은 한국대 헌터학과로의 입학이 기정사실화 되었을 만큼 지원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아이였지만, 태주의 등장으로 인해 2인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고, 잦은 비교로 인한 압박감으로 인해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물론 평소에는 여유로운 척, 겸손한 척, 신사다운 행동으로 태주에 대한 질투심과 성장에 대한 조바심 등을 애써 숨기고 있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기분이 많이 상했나 보군.”
“아니요. 전 그저 태주와의 불필요한 경쟁 구도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 그 발언에 대해선 정정하도록 하지. 하지만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느끼지 못했다니 오히려 실망스럽구나. 마치 1등의 자리를 영원히 포기한 사람처럼 말이야.”
“……?!”
자신의 의견을 똑 부러지게 피력하던 창민이 정곡을 찌르는 한 교수의 예상치 못한 일침에 말문이 막혔다.
“물론 입시 당일에 2차 각성을 한 전례 없는 경쟁자의 등장에 힘이 빠졌겠지만, 전국구 기대주였던 네가 고작 일주일도 못 가 승부욕을 버린다면, 태주와의 경쟁 구도를 부담스러워하는 네 주제넘은 우려와 달리, 그 누구도 널 태주의 라이벌로 여기지 않을 거다.”
“…….”
반박의 의지마저 꺾어버리는 한 교수의 날카로운 지적에 창민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차마 외면하고 있던 내면의 진실.
이미 3번의 판정패를 당한 적이 있는 창민은 태주를 영영 이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직접적인 대립을 본능적으로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심리를 경험적으로 간파한 한 교수는 자신의 한계를 일치감치 정해버리려는 창민의 자존심을 노골적으로 자극, 태주와의 끊임없는 경쟁을 통한 동반 성장의 시너지 효과를 끌어낼 심산이었지만.
“다행히 깨달은 바가 있는 눈치니 더 이상의 잔소리는 하지 않겠다. 류정웅.”
창민의 반론에서 시작된 한 교수의 일방적인 가르침이 끝나기 무섭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목소리로 다음 학생이 호명되었다.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네.’
두 사람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태주의 한쪽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뭐, 원래 비교 대상이 있어야 더 돋보이는 법이니까.’
이미 승자는 정해져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라도 왕좌를 위협하는 라이벌의 존재가 있어야 장기 독주체제로 인한 매너리즘도 방지할 수 있고, S급 각성자들의 대결이라는 화제성을 이용해 자신의 존재감을 효과적으로 어필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야, 근데 교수님이 뭔가 싸움을 붙이려는 거 같지 않냐?”
- “그러게. 평화롭게 지내려는 창민이의 심기를 자꾸 건드리시네.”
- “신태주 대 허창민이라……. 이거 완전 팝콘각인데?”
- “뭐, 현재까지의 성적만 놓고 보면 태주의 압승이지만, 그래도 S급의 클래스가 있는데 설마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하겠어?”
- “하긴, 솔직히 두 사람이 1대1로 맞붙은 적은 없잖아.”
- “이야, 이거 졸업할 때까지 아주 볼만하겠는데? 역시 1년 더 재수하길 잘했어.”
- “형, 그건 좀…….”
눈치 빠른 아이들로부터 시작된 S급 더비의 기대감이 강의실 곳곳을 웅성거리게 만들었다.
잠시 후.
“첫 날이라 사설이 길어졌군. 대신 다음 시간부터는 짧게 이름만 부르도록 하겠다.”
100퍼센트의 출석률을 확인한 한 교수가 흡족한 표정으로 책을 들어 보였다.
“앞으로 한 학기 동안 이 교재로 헌터사(史)를 공부하게 될 거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받은 교과서에 비해 만만치 않은 무게지만, 이 안에 든 역사의 무게를 생각하면 절대 무거운 짐이 아니니 매 시간 꼭 지참하도록.”
- “네.”
준비성을 중시하는 한 교수의 묵직한 당부의 말에 학생들이 한목소리로 답했다.
“아, 그리고 혹시 선배로부터 책을 물려받은 사람이 있다면, 개정판에 추가된 내용들을 정리해 강의 게시판에 올려놨으니 다음 시간까지 프린트해서 빠짐없이 첨부하길 바란다.”
- “네.”
“자, 그럼 이제 5페이지를 펴라. 책이 없는 사람은 옆 사람과 함께 보도록.”
- “네.”
순간, 교재를 펼친 동기의 곁으로 자리를 옮기는 아이들의 어수선한 움직임이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졌다.
“태주야, 나도 같이 보면 안 될까?”
한 칸 떨어져 있던 재룡이 태주의 옆자리로 슬그머니 이동하며 물었다.
“그래.”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해 질리도록 공부했던 태주가 자신의 책을 재룡이 볼 수 있도록 흔쾌히 밀어주었다.
“맨 위에 뭐라고 쓰여 있지?”
한 교수가 자신에게 쏠린 아이들의 시선을 텍스트 위로 유도했다.
- “헌터의 탄생과 사명.”
“헌터의 탄생과 사명……. 여기서 말하는 사명은 헌터에게 주어진 임무로 해석할 수 있다. 최원무.”
강의실을 둘러보던 한 교수의 눈에 불필요하리만큼 바짝 붙어 앉아 귓속말을 나누고 있는 원무와 소영의 애정 행각이 포착되었다.
“네?!”
갑작스러운 지목에 화들짝 놀란 원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한 교수를 바라봤다.
“헌터의 사명이 뭐라고 생각하지?”
단순해보이면서도 심오한 한 교수의 근원적인 물음이 다정하게 속삭이던 원무의 혀를 굳어지게 만들었다.
“어, 그러니까 그게…….”
소영에게 눈짓을 하며 힌트를 구하던 원무가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말끝을 흐렸다.
“아!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전에 몬스터를 잡고 게이트를 닫는 것입니다.”
정석적인 답변을 떠올린 원무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래. 하지만 그 사명은 이미 부와 명예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 “…….”
딴짓을 하는 순간 지목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 아이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한 교수의 수업에 집중했다.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기 전에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몬스터를 처리하는 일련의 과정엔 용기와 희생이 따르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의 이익을 위한 선택일 뿐,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안전을 위한 이타적인 명분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난 지 오래라는 뜻이다. 주소영.”
“네?”
원무가 대표로 걸렸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있던 소영이 한 교수의 부름에 흠칫 놀랐다.
“자네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어……. 제 생각엔 자연스러운 흐름인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헌터가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건 맞지만, 어디까지나 수많은 직업들 중의 하나이고, 직업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사익의 추구 자체를 비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야무진 성격의 소영이 소신 있는 발언으로 동기들의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 “하긴, 우리도 다른 학과 애들처럼 등록금도 꼬박꼬박 내고, 취업을 위한 스펙도 4년간 열심히 쌓는데, 목숨 걸고 무료 봉사만 하라는 건 좀 아니지. 안 그래?”
- “당연하지. 무기 강화 비용에 내구도 떨어진 방어구도 수리해야지, 때마다 포션 같은 소모품들도 구매해야지, 와아, 하나씩 따져보니까 매달 나가는 고정 비용도 만만치 않네.”
- “그리고 요즘은 취업난 때문에 모든 헌터가 돈을 잘 버는 것도 아니잖아. 막말로 C급 이상은 돼야 어디 가서 이력서라도 찔러보지 D급 이하는 정말 하아……. 진짜 할많하않이다.”
- “야, 근데 돈은 1세대 헌터들이 더 밝히지 않았냐? 솔직히 그땐 블루오션 시절이라 꿀이란 꿀은 다 빨았잖아. 게이트와 관련된 이권이나 각종 요직들도 독점하다시피 했었고.”
교과서와 현실의 괴리를 일찌감치 깨우친 아이들이 소영의 말에 동조하며 까마득한 선배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다들 일찍 태어나지 못해 한이 된 것 같구나. 작년에 이 수업을 들었던 너희 한 학년 선배들처럼.”
해를 거듭해도 바뀌지 않는 신입생들의 피해의식과 성공에 대한 열망.
학생들의 수군거림을 조용히 경청하고 있던 한 교수가 예상했던 반발이라는 듯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차분하게 대응했다.
- “뭐야, 2학년 선배들도 우리랑 똑같이 얘기했다고?”
- “원래 본인이 살던 시대가 제일 암울하다고 생각하잖아.”
- “하긴, 지금 태어난 애들은 또 우리한테 꿀만 빨았다고 하겠지?”
- “하지만 각성자의 수가 빠르게 누적되고 있는 것도 팩트고, 업계의 전망이 어두운 것도 팩트잖아.”
- “근데 한편으론 게이트나 헌터에 대한 데이터가 없던 1세대가 시행착오를 겪어 줬기 때문에 헌터학과도 생기고 효율적인 시스템 안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된 것 같긴 해.”
- “그래. 또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노련한 한 교수는 평균이 A등급인 높은 각성 수준에 비해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고 느끼는 아이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매년 반복되는 무의미한 원망임을 스스로 깨닫게 만들었다.
“미안하지만, 너희들의 교수로서 정도를 가르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난 앞으로도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안전을 헌터의 주된 사명으로 여길 것이다. 물론 어떠한 가치를 쫓아갈지는 순전히 너희들의 몫이 되겠지만.”
- “으음. 듣고 보니 교수님이 공익적인 측면을 배제한 채 돈이나 많이 벌라는 식의 현실적인 조언만 해주시는 것도 좀 이상하네.”
- “그러게. 뭐, 개중엔 함 교수님처럼 지독하게 현실적인 분도 계시지만, 교육자의 입장에서 보면 타협할 수 없는 부분도 있으니까.”
원리 원칙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한 교수의 입장을 어느 정도 납득한 아이들이 흥분을 가라앉히며 다시금 수업에 집중했다.
‘앞으로 있을 강의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선수를 친다……. 괜히 학과장에 오르신 게 아니네.’
태주는 주교재인 한국 헌터의 역사와 미래가 한 교수의 성격답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가감 없이 반영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책장이 넘어갈수록, 다시 말해, 현재와 가까워질수록 드러나는 과거의 영광과 레드오션으로 변한 현실의 갑갑함 사이에서 오는 아이들의 지속적인 불만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부정적인 관점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설득할 것이란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바로 그때.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면, 이제 5페이지가 아닌 1372페이지를 펴 보도록.”
수업의 주도권을 가져오는 데 성공한 한 교수가 느닷없이 책의 맨 뒷부분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