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 헌터의 역사 (2)
“안녕.”
태주와 눈이 마주친 남학생이 순박하게 웃으며 어색한 손 인사를 건넸다.
“어?”
태주의 기억에 없는 유일한 동기.
B급 전사인 하재룡은 태주가 떨어뜨린 방우혁을 대신해 들어온 행운의 신입생이었다.
“여기 앉아도 돼?”
계단형 강의실의 책상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의자의 경우 개별적으로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태주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한 칸 떨어져 앉은 재룡이었다.
“어, 당연하지.”
“아, 그리고 어제 고마웠어.”
레이드의 기초 수업 중 공대를 편성하라는 함 교수의 지시에 찬밥 신세를 받고 있던 재룡은 자신을 비롯한 9명의 잉여 전력을 구제해준 태주의 결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물론 파리 목숨들 빼고 혼자 들어가라던 함 교수의 변칙적인 진행에 의해 도전의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재룡이지만.
“아, 어제……. 결과적으로 나 혼자 들어갔는데 뭐.”
“그래도 우리 공대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나온 거잖아. 덕분에 소속감도 느낄 수 있었고……. 아,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을 얘기 안 했네. 난 재룡이야. 하재룡.”
“아, 하재룡……. 난…….”
“에이, 네 이름을 누가 몰라. 입학시험 때부터 이미 네임드 중의 네임드인데.”
“네임드는 무슨…….”
“진짜야. 오티 때도 그렇고, 애들이 네 얘길 얼마나 많이 하는데. 아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들 너랑 친해지고 싶을걸?”
“나랑……. 친해지고 싶어 한다고?”
순간, 동기들로부터는 외부인 취급을, 교수님들에겐 탐탁지 않은 제자로 여겨졌던 회귀 전의 기억이 불현 듯 떠올랐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일단 인성부터가 훌륭하잖아. 솔직히 허창민이나 한유리 같은 애들로 드림팀을 만들 수도 있는데, 나처럼 쩌리 취급 받는 동기들을 챙겨서 공대를 구성한 것만 봐도 그렇고.”
태주는 재룡의 입을 통해 이미지 관리와 동시에 이득을 챙기려 했던 자신의 선택이 제대로 적중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그리고 공대원들끼리 술이나 한 잔 하자고 그랬는데, 혹시 다음 주에 시간 있어?”
“술?”
“어. 친목 도모 겸 감사의 의미로 모이는 건데, 아무리 봐도 주인공이 빠지면 안 될 것 같아서.”
동기들과의 술자리를 조심스럽게 제안한 재룡이 순박한 웃음과 함께 휴대폰을 내밀었다.
바로 그때.
“야, 나도 공대원이었는데 왜 나한테는 안 물어보냐?”
태주에게 가려져 있던 세준이 상체를 불쑥 들이밀며 재룡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어, 안녕.”
세준의 난입에 당황한 재룡이 머쓱한 표정으로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안 그래도 태주가 승낙하면 알려주려고 그랬어. 너도 알잖아. 태주랑 너만 빼곤 다 전사 클래스라 상대적으로 얼굴 볼 일이 많은 거.”
재룡의 말대로 태주의 공대원은 전사 8명과 궁수 2명이 모인 다소 생소한 구성이었다.
“아, 그리고 핸드폰 가져간 김에 네 번호도 찍어줘. 앞으론 단톡방에 초대해서 꼬박꼬박 물어볼 테니까.”
“뭐, 그러시든지.”
태주의 유일한 베프이길 바라는 세준이 자신 못지않게 적극적인 재룡의 붙임성을 견제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태주야, 네 것도 그냥 내가 찍을게.”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고 있던 세준이 남다른 친분을 과시하듯 평소에 외우고 있던 태주의 번호를 뒤이어 저장하기 시작했다.
“자, 여기.”
바쁘게 엄지를 놀리던 세준이 재룡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난 아무 때나 상관없으니까 시간이랑 장소만 정해서 알려줘.”
재룡의 정체가 궁금했던 태주가 참석 의사를 밝히며 세준이 내민 휴대폰을 직접 건네주었다.
“오오, 진짜? 그럼 어차피 레이드의 기초 시간에 다 모이니까 그날 저녁에 보는 게 시간 맞추기도 편하겠네.”
“그래. 그럼 나도 그날로 알고 있을게. 너도 괜찮지?”
재룡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태주가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세준에게 예의상 물었다.
“나야 뭐, 주인공이 좋다는데 당연히 오케이지. 근데 그날 뭐 먹을 거야? 개인적으로 1차는 고기가 땡기던데.”
“고기? 고기면……. 아, 족발은 어때? 학교 앞에 유명한 맛집이 있는데, 선배들 말로는 거기 족보 세트가 가성비 끝판왕이래. 아님, 뭐, 무난하게 삼겹살로 시작하는 것도 괜찮고.”
재룡이 세준의 의견을 반영한 메뉴로 약속 장소를 정하려던 바로 그때.
“삼겹살……. 무조건 삼겹살로…….”
부끄러운 기억이 떠오른 세준이 단호한 목소리로 특정 메뉴를 배제시켰다.
“뭐? 무조건? 왜? 족보 세트는 별로야? 선배들 말로는 족발이랑 보쌈의 양이 거의…….”
“그냥 어감이 별로야. 멀쩡한 단어를 억지로 줄인 것도 영 마음에 안 들고.”
“그……. 그래, 뭐, 싫은 걸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지. 그럼 내가 적당한 삼겹살집으로 예약해서 단톡방에 올릴게.”
영문을 알 리 없는 재룡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의 사항을 메모했다.
바로 그때.
‘왔다.’
범상치 않은 마력을 감지한 태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 쪽으로 옮겨졌다.
덜컥!
- “야, 왔다. 왔다.”
- “와아, 어떻게 강의 시간을 이렇게 딱 맞춰서 오지?”
- “그러게. 첫 시간부터 지각한 함 교수님 하고는 완전 딴판인데?”
- “아예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 아니야?”
- “야, 근데 교수님이 책을 들고 왔는데?”
- “어? 뭐야, 오늘 오리엔테이션 아니었어?”
학과장의 등장에 동요하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눈치껏 잦아들기 시작했다.
텅!
한중연 학과장이 두꺼운 전공 서적을 강의대 위에 내려놓으며 주의를 집중시켰다.
“피차 구면이라도 출석은 부르는 게 맞겠지? 민대엽.”
원칙주의자이자 완벽주의자인 한 교수가 출석부도 없이, 심지어 계단형 강의실 곳곳에 무작위로 앉아 있는 학생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네?”
좌측 맨 뒷줄에 외로이 앉아 있던 대엽이 화들짝 놀라며 되묻듯이 답했다.
“어쌔신인 네가 은신을 좋아하는 건 이해하지만, 다음 시간에도 그 자리에 숨어 있으면 내 수업을 듣기 싫다는 것으로 간주해서 재수강의 기회를 주겠다.”
학생 개개인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한 교수가 친형인 주엽과 달리 정서적으로 위축되어 있는 대엽의 소극적인 태도를 개선하기 위해 위트 있는 협박을 가했다.
“네?! 아, 네…….”
한 교수의 눈치를 살피며 꾸벅 고개를 숙인 주엽이 부랴부랴 짐을 챙겨 앞줄로 자리를 옮겼다.
“뭐야, 설마 28기 전원의 얼굴과 이름은 물론 개개인의 클래스까지 싹 다 외우고 있는 거야?”
정성마저 느껴지는 한 교수의 세심한 출석 체크에 세준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아, 이러면 대출도 못하고, 튀어 봤자 금방 티가 나는데…….”
특훈을 다짐하며 의욕을 불태우던 세준이 언제 그랬냐는 듯 난감한 표정으로 한 교수의 관심에 부담을 표했다.
잠시 후.
“임세준.”
한 교수가 태주의 오른편에 앉은 세준의 이름을 불렀다.
“넵.”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음을 확인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세준이 반쯤 손을 들어 올리며 간결하게 대답했다.
“넌 참 볼 때마다 태주 곁에 있구나.”
“넵. 베프라 그렇습니다. 하하.”
세준이 해맑게 웃으며 태주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배울 점이 많은 친구와 가깝게 지내는 건 지혜로운 처신이지만, 상대방이 네게 배울 점이 없는 일방적인 관계일 땐 우정도 민폐가 될 수 있다는 걸 늘 명심해라. 겉으론 내색을 하지 않아도 널 귀찮게 여길 수 있으니까.”
단순히 두 사람의 입학 성적과 각성 수준의 격차를 두고 한 소리였지만, 족보를 구걸했던 세준의 입장에선 한 교수의 일침에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네…….”
태주를 힐끗 쳐다본 세준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팔을 슬그머니 내렸다.
“신태주.”
한 교수가 세준과 나란히 앉아 있던 태주의 이름을 불렀다.
“네.”
“교수 회의에서 들은 바로는 강의 때마다 아주 독보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던데……. 혹시 내 수업 시간에도 그럴 의향이 있나? 참고로 헌터의 역사는 다른 전공과목들과 달리 몸으로 증명할 기회가 없는데 말이야.”
앞선 두 차례의 전공 수업에서 보여준 태주의 압도적인 과제 수행 능력에 대해 보고 받고 온 한 교수가 태주에게 만큼은 일방적인 지적이 아닌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이번엔 질문이라도 해주네.’
회귀 전엔 불공정한 방식으로 입학한 낙하산으로 분류되어 이름만 불린 채 질문조차 받지 못했던 태주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겸손하게 대답은 했지만, 사실 E급 궁수였던 태주는 헌터사(史)처럼 몸을 쓰지 않는 과목들을 더 선호했었다.
트레이닝 돔에서 이루어지는 실습형 과목들의 경우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등급의 격차로 인해 수업을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웠지만, 헌터의 역사처럼 강의실에 앉아 교재로만 진행되는 과목의 경우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잘 모르겠다는 식의 모호한 답변을 남긴 건 교수나 동기들이 불필요한 기대감을 갖지 않도록 만든 뒤 자신의 배경 지식을 뽐내려는 태주의 의도가 깔려 있었지만.
“잘 모르겠다……. 그래. 애초에 확답을 바란 건 아니니 차차 지켜보도록 하지. 하재룡.”
태주의 의도대로 더 이상의 추궁 없이 다음 학생이 호명이 되었다.
“네.”
재룡이 특유의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한 교수의 부름에 응했다.
“합격 문자를 받았던 순간이 기억나나?”
“어……. 사실 소신 지원을 했다가 운 좋게 붙은 케이스라 저도 모르게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심지어 담임 선생님께서도 제가 붙을 줄 몰랐다고 하셨거든요.”
“그래. 이번 입학 시험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은 수석을 차지한 신태주가 아니라 100등으로 합격한 너다. 반면, 가장 아쉬운 사람은 차석으로 밀린 허창민이 아니라 101등으로 떨어진 이름 모를 응시자겠지.”
“네…….”
한 교수의 날카로운 비유에 위축된 재룡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지금이야 합격의 기쁨에 도취되어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있겠지만, 가장 운이 좋았다는 건 가장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으니 위기감을 가지고 대학 생활에 임하길 바란다.”
“네, 교수님……. 명심하겠습니다.”
동기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주려는 의도보단 경각심을 주어 성장에 대한 동기부여를 시키려는 취지가 더 강했지만, 정작 훈계의 당사자인 재룡은 꼴찌로 입학했다는 민망함에 선뜻 고개를 들지 못했다.
“뭐야, 쟤가 꼴등이었어?”
재룡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세준이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태주의 귀에 속삭였다.
“뭐, 97등이나 100등이나.”
태주가 세준의 황당한 우월감에 찬물을 끼얹었다.
“야, 그래도 내 뒤엔 3명이나 더 있잖아. 쟨 문 닫고 들어온 애라 앞에만 99명이고.”
“아아, 그렇구나. 난 또 내 기준에서만 생각을 했지. 역시 특훈을 각오한 자는 뭐가 달라도 달라. 대단해.”
태주가 세준의 반론에 맞장구를 치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뭐지……. 너한테 인정을 받은 것 같긴 한데, 뭔가 찝찝해. 기분 탓인가?”
이상함을 느낀 세준이 태주의 장난을 곱씹어보던 바로 그때.
“교수님.”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한 학생이 출석 체크의 흐름을 끊으며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