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 헌터의 역사 (1)
“어떻게 알았지…….”
태주와 마주한 함 교수가 혼잣말을 하듯 나지막이 물었다.
“네?”
“약점……. 드래곤의 약점이 목구멍인 걸 어떻게 알아냈냐고…….”
학생들에게 좌절감을 심어주는 것이 목적이었던 함 교수의 입장에선 자존심을 내려놓은 질문이었다.
“알아낸 게 아니라 알게 된 겁니다.”
“순전히 우연이라는 건가…….”
몬스터의 난이도를 설정했던 함 교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네. 그냥 드래곤 브레스가 발동되기 전에 선수를 친 겁니다. 일종의 카운터펀치처럼.”
간파 스킬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숨긴 태주가 덤덤하게 답했다.
“드래곤의 아가리가 아래위로 쭉 찢어지기 전에 공격을 무력화시켰다라……. 운보단 센스가 좋은 타입이네…….”
“아니요. 이번엔 운이 좋았…….”
“아니…….”
함 교수가 태주의 눈앞에 검지를 세워 보이며 말문을 막았다.
“겸손은 꼰대들 앞에서나 떨어…….”
“네?”
“내 수업에선 더 나대도 된다고…….”
태주의 한계가 궁금했던 함 교수가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가 봐……. 용건 끝났으니까…….”
“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칭찬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함 교수로부터 후한 평가를 받은 태주가 정중한 인사와 함께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
*
다음 날.
캠퍼스에 등장한 태주의 발걸음이 헌터관 쪽으로 향했다.
이번 학기에 신청한 전공과목은 총 4개.
그 중에서도 한중연 학과장이 맡은 헌터의 역사는 트레이닝 돔에서 진행되지 않는 유일한 이론 중심 과목이었다.
“태주야!”
태주의 뒷모습을 발견한 세준이 두꺼운 전공 서적을 옆구리에 낀 채 쏜살같이 달려왔다.
“어. 왔어?”
세준의 요란한 인기척에 태주의 보폭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야, 화살통 대신 백팩을 매니까 뭔가 허전하지 않냐?”
비대칭 어깨의 주범이자 궁수의 애환 중 하나인 장비의 구속에서 벗어난 세준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자신의 등을 힐끗거렸다.
“아, 맞다. 너는 원래 안 들고 다녔지?”
인벤토리 능력의 존재를 잊고 있던 세준이 태주의 빈손을 부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야, 근데 넌 가방을 왜 메고 왔냐?”
태주가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세준의 빈 백팩을 손으로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원래 대학생들은 다 이러고 다니는 거 아니야? 솔직히 우리 과는 몸으로 때우는 수업이 90퍼센트라 이럴 때 아니면 딱히 책 들고 다닐 일도 없잖아. 자, 봐 봐. 한국 헌터의 역사와 미래. 크으. 책 이름만 봐도 뭔가 있어 보이지 않냐?”
세준이 옆구리에 낀 두꺼운 전공 서적을 의도적으로 노출하며 허세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아 참, 근데 이거 한중연 교수님이 쓴 책이래.”
세준이 거창한 제목 밑에 찍힌 학과장의 이름을 보여주며 말했다.
“원래 교수님들은 자기 책으로 많이 한대. 주교재가 아닐 땐 참고 도서라고 콕 집어서 강의 계획서에 넣기도 하고.”
“오오, 그래? 근데 그런 디테일한 얘기는 또 어디서 들었어?”
“그냥 술 먹다 아는 형한테.”
2회차 신입생인 태주가 자신의 경험담을 귀동냥인 양 둘러댔다.
“야, 그건 그렇고, 첫 시간은 당연히 오리엔테이션이겠지? 혹시 몰라서 강의 계획서에 나온 교재를 미리 사 오긴 했는데, 인간적으로 3시간짜리 연강을 첫날부터 달리는 건 좀 아니잖아. 그치?”
“글쎄. 직업 탐구1도 그렇고, 레이드의 기초1도 그렇고, 정정 기간과 상관없이 수업은 다 하지 않았나? 뭐, 레이드의 기초는 수업을 했다고 보기에도 애매하지만.”
별도의 오리엔테이션 없이 바로 수업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태주가 앞선 강의들을 근거로 세준의 기대감을 무색하게 했다.
“하긴, 수강 취소의 걱정이 없는 전공 필수 과목이니까 교수님 입장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뿐인 수업을 인사로만 날릴 필요가 없겠네. 이미 입학시험이랑 오티 때 안면을 트기도 했고.”
태주의 말에 수긍한 세준이 당당했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특히 태주 넌 교수님이 더 눈여겨보시겠네. 어떻게 보면 교수로서의 자존심을 두 번씩이나 무너뜨린 아주 건방진 제자니까.”
“내가?”
“맞잖아. 입학시험 땐 네가 S급이란 걸 못 믿는 교수님 앞에서 간이 측정기를 두 대나 고장 냈고, 오티 둘째 날 장기자랑 땐 교수님께서 만드신 결계를 한 방에 박살낸 것도 모자라 추가로 시전한 그레이트 배리어까지 쩌적 금이 가게 만들었잖아. 그것도 정타가 아닌 첫 타의 후폭풍으로만.”
태주가 보여준 강렬한 일화들을 회상하던 세준이 격양된 목소리와 손짓으로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야, 너 이러다 A학점 못 받는 거 아니야? 외모나 말투는 신사적이라도 뒤끝은 심할 수 있잖아.”
“글쎄. 과연 그럴까?”
교수님의 성향과 수업 방식은 물론 과제의 내용과 시험의 유형들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태주가 세준의 쓸데없는 걱정에 코웃음을 쳤다.
“입시 땐 학과장님이 먼저 공개 사과하셨잖아.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게다가 4학년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최종 승인권자인 학과장님의 허락 덕분인데, 한 교수님께서 왜 날 견제하시겠어. 안 그래?”
물론 민주엽을 이겨야 커리큘럼의 자율권을 주겠다는 학과장의 제안에 대해선 따로 언급을 하지 않았다.
특혜에 민감한 한 교수인 만큼 모두를 납득시킬만한 결과물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실력의 객관화를 통한 조율의 과정일 뿐, 개인적인 악감정이나 태주의 성장 속도를 견제하려는 의도 따윈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긴, 100명이 듣는 수업이면 상대 평가 방식일 테고, 그럼 우리 학교 기준으로 최소한 20퍼센트가 A학점을 받는다는 건데, 막말로 수석으로 들어온 네가 20등 안에 못 들 리 없지.”
어설픈 가정을 내세웠던 세준이 태주의 논리적인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태주야, 근데 너 오티 때 탄 선물들은 다 받았어?”
태주는 둘째 날 있었던 보물찾기를 통해 한정판 과잠을 비롯한 10개의 후원 상품을, 캠프파이어 땐 최고의 신입생으로 선정된 것에 대한 포상으로 1학년 때 배우는 모든 전공과목의 족보와 최악의 신입생으로 뽑힌 추균성의 조력을 1년간 받을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확보해둔 상태였다.
“아니. 아직. 근데 그건 왜?”
“아니, 뭐, 그냥 좋은 게 있으면 친구끼리 돌려도 보고 그러자는 거지 뭐. 하하하하!”
족보의 내용이 궁금했던 세준이 너스레를 떨며 태주의 눈치를 살폈다.
“왜. 족보 때문에?”
세준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읽어낸 태주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태주가 세준의 어색한 반응에 헛웃음을 지었다.
“어! 그럼 나도 보여주는 거야?”
“아니.”
“뭐?!”
멋대로 설레발을 치던 세준이 태주의 냉정한 대답에 화들짝 놀랐다.
“저기, 태주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100명 중에 97등으로 붙었잖아.”
“그래서.”
“아니, 그래서가 아니라, 그래도 내가 명색이 5대 길드 중 하나인 풍림의 후계자인데, 체면상 A학점까진 아니더라도 중간 이상은 해줘야 아버지를 볼 면목이 있지 않을까? 가뜩이나 길드 내에선 B급 각성자인 날 후계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여론까지 있는데?”
서운함보단 다급함이 앞선 세준이 푸념을 늘어놓으며 태주를 설득하려 했다.
“그래? 그럼 더더욱 안 되겠는데?”
세준의 예상과 달리 태주의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왜?”
“풍림의 명성은 호소가 아닌 증명으로 이루어진 거니까.”
“뭐?!”
태주의 일침에 정신이 번쩍 든 세준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걸음을 멈췄다.
“지금의 풍림이 5대 길드로 인정받게 된 건 5차 각성에 성공한 너희 아버지의 노력 덕분이지 중간고사 따위를 잘 봐서가 아니야.”
“그……. 그건 그렇지만…….”
“‘그렇지만’이 아니라 그래.”
태주가 당황한 세준을 단호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지적했다.
“그리고 네가 진짜 풍림의 후계자가 되길 원하면 각성 수준이나 입학 성적을 핑계로 편법을 찾기 전에 활시위를 한 번 더 당겨. 어쩌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그러한 모습을 더 원하고 계실 테니까.”
“…….”
태주의 진심어린 조언을 묵묵히 듣고 있던 세준이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궜다.
“그렇다고 너무 위축되지는 마. 내가 옆에서 지치지 않게 도와줄 테니까.”
따끔한 충고를 마친 태주가 이번엔 세준의 한쪽 어깨를 가볍게 움켜쥐며 변함없는 응원을 약속했다.
“태주야…….”
태주의 말에 감동한 세준이 깨달음을 얻은 비장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리고 족보 때문에 추한 모습 보여서 미안해.”
“다행이네. 서운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서.”
“야, 풍림의 후계자가 고작 종이 쪼가리 때문에 삐지면 되겠어? 그리고 내가 실력은 좀 모자라도 근성 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너도 1등의 자리를 지키고 싶으면 앞으로 긴장하는 게 좋을 거야. 쉬이익! 쉬이익! 난 지금부터 S급 궁수가 되기 위한 자체 특훈에 들어갈 거니까. 쉬이익! 쉬이익!”
족보를 구할 시간에 활시위를 한 번 더 당기라는 태주의 말에 자극을 받은 세준이 활을 쏘는 시늉과 함께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를 내며 허세 가득한 도전장을 내밀었다.
“얼마든지.”
물론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은 세준의 장난스러운 도발이 태주의 눈엔 3일짜리 열정으로 비춰졌지만.
‘이제 족보 얘기는 안 하겠지?’
족보 공유에 대한 거절을 그럴 듯하게 포장한 태주가 세준의 단순함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친해도 이런 중요한 자료를 함부로 공개할 순 없지.’
뛰어난 기억력을 지닌 태주에게 있어 족보는 시험 문제를 리마인드하기 위한 보조적인 도구에 불과했지만, 세준을 비롯한 동기들에겐 큰 어드밴티지로 작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확보한 고급 정보를 최대한 독점할 계획이었다.
“어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태주야, 빨리 가자. 이러다 앞자리 다 뺏기겠다.”
오리엔테이션 타령을 하던 세준이 언제 그랬냐는 듯 의욕적인 자세로 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그러지 뭐.”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야! 같이 가!”
*
*
*
잠시 후.
헌터의 역사를 수강하기 위해 모인 100명의 학생들이 계단형 강의실 곳곳을 잡담으로 채우고 있었다.
웅성웅성.
“선생님 오시기 전에 떠드는 건 중고딩 때랑 똑같네.”
뒤늦은 예습을 하겠다며 책장을 넘기던 세준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껏해야 두세 달 차이인데 뭐 얼마나 성숙해졌겠어. 그냥 교복만 벗은 거지.”
태주는 한국대에 들어왔다는 성취감과 왠지 모를 해방감, 거기에 대학 생활에 대한 환상과 인싸가 되고 싶은 마음까지 더해진 신입생 특유의 과도한 활발함이 얼마나 한시적인 것인지를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바로 그때.
‘어?’
전공 서적을 꺼내기 위해 인벤토리를 열던 태주가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는 의외의 얼굴을 의아하게 올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