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 직업 탐구1 (6)
[태주형. 나야. 진우 ^^ 갑자기 할아버지 번호가 떠서 놀랐지? ㅋㅋㅋ 내 폰이 고장 나서 할아버지 걸로 대신 보낸 거야.]
발신자의 정체는 송기철 협회장의 친손자이자 태주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는 초등학생 진우였다.
‘하아…… 난 또.’
협회장의 연락에 흠칫했던 태주가 엄 교수의 눈을 피해 답장을 보낸 뒤 무음으로 전환했다.
【수업 중.】
답장을 보내기 무섭게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 미안 @[email protected] 내가 병원에 입원하느라 학교를 안 가서;; 그럼 이따 쉬는 시간에 연락해 ㅋ]
‘병원?!’
어느 날부터 생긴 원인 모를 불치병.
진우는 몸 안의 기력이 불시에 방전되어 쓰러지는 특이한 증상을 갖고 있었는데, 태주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교통사고의 원인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일단 병원이랑 병실 위치부터 보내. 수업 끝나면 바로 갈 테니까.】
진우의 입원 소식을 접한 태주가 병실의 위치를 물은 뒤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좋아. 그럼 이제 클래스 리더도 정해졌으니 다음 시간부턴 본격적인 트레이닝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 “아…….”
순간, 지옥훈련의 기운을 느낀 아이들의 탄식이 곳곳에서 흘러 나왔다.
“앓는 소리가 작은 걸 보니 더 굴려도 되겠군.”
- “아, 아닙니다!”
엄 교수의 농담에 식겁한 아이들이 손사래를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 혹시 질문 있나?”
- “…….”
얘기가 길어지길 원치 않았던 아이들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동기들에게 눈치를 줬다.
“으음. 없으면, 내가 하도록 하지.”
발사선으로 다가간 엄 교수가 바닥에 설치된 화면을 설정해 양궁 과녁 하나를 세웠다.
위이잉!
- “어? 저건 또 뭐지?”
- “뭐야, 아직도 안 끝났어?”
수업이 마무리되는가 싶었던 아이들이 엄 교수의 행동에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이건 클래스 리더를 위한 번외 평가다.”
태주를 돌아본 엄 교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뭐? 번외 평가?”
-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리더는 안 하길 잘했어.”
- “야,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 아니야?”
- “근데 갑자기 뭘 평가하겠다는 거지?”
술렁이던 아이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태주에게로 모아졌다.
“자, 이제 눈을 감은 채로 저 과녁을 등져라.”
“어! 설마!”
앞서 실패한 경험이 있는 세준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엄 교수를 바라봤다.
“물론 도전하지 않아도 좋다. 이건 어디까지나 번외 평가에 불과하니까.”
태주의 능력을 좀 더 시험해 보고 싶었던 엄 교수가 강요 아닌 강요로 승부욕을 자극했다.
“저, 교수님, 근데 표적의 위치가 좀 멀어진 거 같은데요?”
확연하게 달라진 거리감에 세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이번엔 50미터다.”
“네? 50미터요?”
30미터 떨어진 표적도 맞히지 못한 세준의 입장에선 충분히 놀랄 만한 조건이었다.
- “이번엔 어떻게 될까?”
- “글쎄. 지금까지의 모습만 놓고 보면 성공할 것 같기도 한데.”
- “그래도. 돌면서 쏘는 건 좀 어렵지 않을까? 눈도 눈이지만, 거리도 2배 가까이 늘어났잖아.”
- “하긴, 교수님처럼 평소에 하던 훈련 방식도 아니니까. 아마 표적 안엔 들어가도 좋은 점수를 받긴 힘들걸?”
당사자인 태주보다 더 심각해진 아이들의 의견은 대부분 낙관적이지 않았다.
“아니요. 한번 해보겠습니다.”
동기들의 화살 뭉치를 인벤토리에 수납한 태주가 다시금 활을 꺼내 들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태주의 승부사적 기질을 간파하고 있던 엄 교수가 기대감에 가득 찬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
발사선 안으로 조용히 들어선 태주가 활과 표적이 일직선상에 놓이도록 자세를 정렬했다.
▶ 체이싱 애로우[C]를 선택하셨습니다.
“후…….”
짧은 심호흡을 마친 태주가 뒤로 돌아 눈을 감았다.
- “…….”
태주의 도전에 덩달아 긴장한 아이들이 숨소리마저 죽인 채 주먹을 말아 쥐었다.
바로 그때.
휙!
민첩성 수치도 수준급인 태주가 잔상을 남기며 빠르게 돌아섰다.
쉬이익!
목표물을 향해 활시위를 놓자 영리한 화살의 궤적이 저절로 보정되었다.
딱!
- “우와!”
- “오오!”
명중하는 동시에 터져 나온 아이들의 탄성에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X]
- “어? 정중앙에 맞은 것 같은데 왜 안 맞았다고 뜨지?”
- “야, 이건 안 맞은 게 아니라 엑스텐이라는 소리잖아. 엑스텐.”
X10의 경우 점수 자체는 10점과 동일하지만, 10점 안에 들어 있는 더 작은 동심원을 맞혀야 인정되기 때문에 정교함이나 난이도적인 측면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 “뭐야! 그럼 10점을 맞춘 교수님보다 더 잘했다는 거야?! 심지어 표적과의 거리도 더 멀었…… 읍!”
- “야, 이 눈치 없는 놈아 좀 조용조용히 얘기해.”
태주의 승리에 기뻐하던 아이들이 엄 교수의 분위기를 살피며 생각 없는 동기의 입을 막았다.
짝! 짝! 짝! 짝!
물론 아이들의 우려와 달리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엄 교수는 누구보다 먼저 태주의 점수에 박수를 보내고 있었지만.
“훌륭해. 내 의견이 틀렸다는 걸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증명하다니.”
진심에서 우러난 엄 교수의 칭찬이 태주에겐 편견을 극복한 것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게이트 안에 들어갔을 땐 자신의 실력을 과대평가하면 안 된다. 의심, 또 의심. 등급은 같아도 똑같은 던전 따윈 없으니 늘 초행길에 오른 것처럼 긴장의 끈을 놓지 마라.”
엄 교수가 태주의 던전 실습 수강을 공개적으로 허락했다.
“네. 이 또한 명심하겠습니다.”
엄 교수의 지지를 얻은 태주가 가벼운 목례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대신 너희들은 좋은 리더를 만나게 된 걸 행운으로 여겨라. 알았나?”
엄 교수가 태주의 주변으로 모여든 제자들의 얼굴을 쭉 훑어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 “네!”
“자, 그럼 개강 첫날인만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다. 전원, 해산!”
- “어! 가…… 감사합니다!”
단축 수업 결정에 흥분한 아이들의 목청이 처음으로 엄 교수의 성량을 뛰어넘었다.
“태주야, 빨리 가자.”
들뜬 표정의 세준이 장비를 챙기며 태주를 재촉했다.
“어, 나 화살 좀 챙기고.”
활을 거둔 태주가 점멸을 사용하려던 바로 그때.
“리더로서의 첫 임무다. 이거 들고 내 방으로 따라와.”
세준의 앞으로 끼어든 엄 교수가 자신의 활을 태주의 품에 안겨주었다.
‘벌써?’
엄 교수의 방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일찍 방문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나저나 뭐지? 교수님이 이런 꼰대 같은 심부름을 시키실 분이 아닌데…….’
“너 먼저 가. 난 잠깐 심부름 좀 하고 갈게.”
활을 받아든 태주가 곁에 있던 세준의 한쪽 팔뚝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터치했다.
“어? 어, 그래. 그럼 끝나고 연락해. 아, 그리고 저 화살은 내가 따로 보관하고 있을게.”
세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표적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자, 우리도 그만 가볼까?”
“네.”
▶ 접촉한 장비를 인벤토리에 넣으시겠습니까? (Y/N)
엄 교수의 활을 인벤토리에 보관한 태주가 점멸이 아닌 도보로 엄 교수의 뒤를 따랐다.
*
*
*
잠시 후.
태주와 함께 헌터관으로 이동한 엄 교수가 복도에서 이종도 교수를 맞닥뜨렸다.
“…….”
태주의 던전 실습 여부를 놓고 한차례 충돌한 바가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물론 엄 교수의 편견이 태주로 인해 깨졌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는 이 교수였지만.
“안녕하세요.”
“어, 그래, 태주야, 근데 너 지금 어디 가는 거니?”
태주의 인사를 받은 이 교수가 엄 교수에게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다.
“어…… 잠깐 교수님 방에요.”
엄 교수가 활 셔틀 때문에 부른 건 아니라고 판단한 태주가 상황에 맞게 눈치껏 대답했다.
“방? 엄 교수 방엔 왜?”
“어이, 이 교수, 그런 건 나한테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니야?”
이 교수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받던 엄 교수가 태주의 대답을 가로채며 말했다.
“태주야, 엄 교수가 던전 실습에 대해 한마디 하지 않았어?”
이 교수의 추측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수업 초반에 있었던 사소한 오해에 불과했다.
“아니요. 오히려 조심하라고 격려까지 해주셨는데요.”
두 사람의 화해를 원했던 태주가 이번에도 교통정리에 나섰다.
“뭐? 엄 교수가 격려를 했다고? 갑자기 왜?”
자신의 두 귀를 의심한 이 교수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엄 교수의 얼굴을 쳐다봤다.
“왜. 난 뭐 격려하면 안 되냐? 내가 태주 격려할 수도 있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전후사정을 모르는 이 교수가 엄 교수의 농담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교수회의에서 하자. 그럼 수고.”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엄 교수가 이 교수의 곁을 유유히 스쳐갔다.
*
*
*
잠시 후.
“미리 말해두지만, 이 교수의 방처럼 깨끗하진 않을 거다.”
교수실 문을 연 엄 교수가 태주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교수실로 들어선 태주가 엄 교수의 활을 꺼내들었다.
“교수님. 여기.”
“어, 그래. 수고했다. 내가 원래 이런 걸 시키는 사람이 아닌데.”
엄 교수가 태주에게 맡긴 활을 넘겨받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네.’
믹스 커피의 향이 감돌았던 이종도 교수의 방과 달리 엄승준 교수의 공간에선 탈취제 냄새가 났다.
칙! 칙!
엄 교수가 책장에 놓인 탈취제를 집어든 뒤 습관처럼 분사했다.
“코가 예민한 교수들이 땀 냄새를 지적해서.”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한 엄 교수가 자신의 몸에도 두어 번의 향을 입혔다.
칙! 칙!
물론 사적인 업무 공간에 벤치 프레스 기구를 설치한 것만 봐도 지적의 원인을 알 수 있었지만.
“일단 앉아.”
활을 정리하던 엄 교수가 소파 쪽으로 눈짓했다.
“내가 커피랑 탄산을 안 마셔서 생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프로틴 쉐이크라도 한 잔 타줄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단백질 섭취를 바탕으로 한 지속적인 운동도 중요하지만, 태주는 과제 달성에 대한 보상을 통해 근력 수치를 향상시키는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물론 맛이 없어 거절한다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원래 귀중한 물건일수록 허술하게 보관해야 잃어버리지 않는 법이지.”
서랍 속을 뒤적이던 엄 교수가 검은색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와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이게 뭡니까?”
흡사 마트에서 사온 과자가 들어 있을 법한 친근한 비주얼이었다.
“궁금하면, 직접 풀어봐.”
소파 맞은편에 내려앉은 엄 교수가 턱을 까딱이며 자신 있게 권했다.
‘뭐지? 평범한 비닐봉지 안에서 강력한 마력이 느껴진다. 설마…….’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태주가 성의 없게 묶인 매듭을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바로 그때.
봉지 속 내용물을 확인한 태주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뭐지? 이건 내가 알던 물건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