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직업 탐구1 (2)
다른 동기들이 모두 상자를 주시할 때 태주의 시선은 엄 교수를 향해 있었다.
“하아…….”
여러 의미가 내포된 깊은 한숨이 엄 교수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 상자 안엔 훈련용 무게 추가 들어 있다.”
보다 못한 엄 교수가 상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 “뭐? 무게 추?”
- “무게 추면 저울에다 거는 그거?”
발사선에 선 아이들이 엄 교수의 설명에 수군거렸다.
“비켜.”
- “네? 아, 네…….”
상자 곁을 지키고 있던 아이들이 엄 교수의 한 마디에 머쓱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철컥!
잠금장치를 해제한 엄 교수가 철제 상자의 묵직한 뚜껑을 한 손으로 열어젖혔다.
- “어, 열렸다.”
상자 속이 궁금했던 아이들이 발사선으로부터 한 발짝 벗어나 고개를 내뺐다.
“자. 이게 바로 활에 부착할 수 있는 훈련용 무게 추다.”
엄 교수가 상자 속에 든 무게 추 하나를 집은 뒤 모두에게 들어 보였다.
- “와…….”
내용물의 실체를 확인한 아이들이 생각보다 큰 추의 크기에 탄성을 내뱉었다.
- “뭐야, 저 큰 걸 활에 단다고? 딱 봐도 2리터짜리 생수병만 한데?”
- “근데 저 정도면 몇 kg일까?”
- “글쎄. 교수님이 너무 쉽게 들고 있어서…….”
- “명색이 훈련용인데, 최소 30kg은 나가지 않을까?”
아이들의 추측을 가만히 듣고 있던 태주가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추의 무게는 50kg. 그리고 이 상자 안엔 총 20개의 추가 들어 있다.”
요지부동의 원인을 안 아이들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 “아아, 그래서 2명이 못 들었구나.”
- “50kg짜리가 20개면 1톤이네?”
- “아니지. 상자 무게까지 더하면, 조금 더 나가겠지.”
- “근데 그 정도 무게면 4명이 들어도 힘들지 않나?”
- “그러게. 그냥 못 들 걸 알고 시킨 것 같은데?”
- “야, 이쪽으로 온다. 조용.”
속삭이듯 대화를 주고받던 학생들이 엄 교수의 접근에 황급히 입을 닫았다.
“활.”
발사선을 향해 다가온 엄 교수가 이번에도 세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여기 있습니다.”
엄 교수의 실험 대상으로 연거푸 낙점된 세준이 신속하게 활을 건넸다.
철컥!
활대를 움켜쥔 엄 교수가 들고 있던 추의 고리를 세준의 활에 걸었다.
“들어.”
장착을 마친 엄 교수가 고압적인 말투로 활을 돌려줬다.
“어휴.”
활을 받아든 세준의 팔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이…… 이렇게 들면 됩니까?”
엄 교수의 눈치를 살피던 세준이 묵직해진 활을 앞으로 뻗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른손은 놀고 있냐?”
“네? 아, 아닙니다.”
당황한 세준이 빈 활시위를 재빨리 잡아당겨 발사 자세를 취했다.
“자, 나머지 인원들도 추를 가져와서 같은 자세를 취한다. 실시!”
세준의 버티기 동작을 지켜보던 아이들이 엄 교수의 지시에 상자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 “이거 뭔가 예감이 안 좋은데?”
- “야, 예감은 첫인상 때부터 안 좋았어.”
- “전필 과목은 수강 취소를 못 하겠지?”
- “취소를 하면 뭐해. 어차피 안 들으면 졸업을 못 하는데.”
- “와…… 진짜 생긴 대로 무식한 훈련만 시키네. 역시 관상은 과학이야. 과학.”
- “근데 아까 보니까 활은 기가 막히게 쏘던데?”
- “하긴, 한국대 교수 자리를 뺑뺑이로 얻는 건 아니니까.”
엄 교수의 훈련 방식에 대해선 호불호가 갈렸지만, 그의 정교한 활솜씨만큼은 의심하는 이가 없었다.
- “야, 이거 생각보다 무거운데?”
- “그러게. 50kg 정도는 쉽게 들 줄 알았는데. 흡!”
추를 챙기던 아이들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일일 과제를 통해 근력 수치를 키워온 태주는 폭주 스킬의 도움 없이도 가볍게 추를 들어 올렸지만.
- “야, 태주야, 네 건 무슨 플라스틱으로 만들었냐? 네가 너무 쉽게 드니까 우리가 너무 오버하는 거 같잖아.”
- “야, 태주가 우리랑 같냐? 새터 때 봐서 알잖아. 그냥 차원이 다르다는 거.”
각성자의 신체 능력이 일반인을 상회하는 건 맞지만, 모든 각성자가 힘에 특화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수업 중에 잡담하지 마라.”
엄 교수가 상자 앞에서 꿈지럭거리는 아이들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 “네!”
엄 교수의 지적에 뜨끔한 아이들이 각자의 발사선으로 앞 다투어 돌아가 추를 결합하기 시작했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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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을 꺼내든 태주가 추를 결합하기 전, 화살의 자동 장착 기능부터 해제했다.
그렇지 않으면, 발사 자세를 취하기 위해 빈 활시위를 당기는 순간 화살이 나타나 걸리적거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 추는 궁수에게 필요한 근력과 지구력을 동시에 향상시켜 주는 최적의 교보재다.”
발사 자세를 취한 아이들의 뒤를 유유히 거닐던 엄 교수가 훈련의 목적을 설명했다.
“누가 벌써부터 팔을 떨어뜨리나!”
엄 교수의 눈을 피해 요령을 피우던 아이들이 벼락같은 호통에 놀라 번쩍 팔을 들어 올렸다.
“자, 지금부터 정확히 30분 동안 버틴다. 몇 분?”
휴대폰을 꺼내든 엄 교수가 타이머를 설정하며 학생들의 대답을 유도했다.
- “30분.”
추를 매달고 있을 생각에 힘이 쭉 빠진 아이들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은 초반이라 버틸 만했지만, 활의 무게 또한 만만치 않아 팔에 가해지는 부담이 갈수록 증가했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작다. 40분. 몇 분?”
군대의 조교를 연상케 하는 엄 교수의 노련한 밀당에 학생들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 “40분!”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아이들의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대답을 안 하는 사람이 있다! 50분! 몇 분!”
12명의 소리를 잡아먹는 엄 교수의 우렁찬 목청이 학생들의 자존심을 서서히 자극했다.
- “50분!”
오기가 발동한 아이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좋아. 30분. 시작!”
아이들의 함성이 궁수 훈련장에 메아리치자 처음에 언급했던 30분으로 훈련 시간이 조정됐다.
바로 그때.
철컥!
13번째 발사선으로 들어선 엄 교수가 자신의 활에 추를 연결시킨 뒤 아이들과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 “어?”
태주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엄 교수의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뭐야, 지금 우리랑 같이 하겠다는 거야? 왜?”
- “그러게. 왜 고생을 사서 하려고 그러지?”
- “뭐지? 이러면 불평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데.”
- “야, 그래도 저러니까 좀 달라 보이지 않냐?”
불만을 품고 있던 아이들의 싸늘한 분위기가 엄 교수의 자발적인 동참에 한결 누그러졌다.
“12번.”
엄 교수가 바로 옆에 있는 학생의 번호를 불렀다.
- “네!”
“보스와 리더의 차이가 뭔지 아나?”
- “네? 보스와 리더의 차이요?”
엄 교수의 돌발 질문에 당황한 아이가 잠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자 기다릴 틈도 없이 다음 사람에게로 답변의 기회가 넘어갔다.
“11번.”
공교롭게도 열한 번째 발사선엔 태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네. 보스는 명령을 하지만, 리더는 솔선수범을 합니다.”
엄 교수에게 지목된 태주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답을 얘기했다.
“그래. 팀원들의 위험을 분담하지 않는 보스형 헌터는 던전 안에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은 엄 교수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한 자세를 유지한 채 수업을 이어 갔다.
“머지않아 너희들은 공대의 대장으로서 혹은 길드의 마스터로서 동료들을 이끌게 될 것이다. 퍼스트 인, 라스트 아웃. 제일 먼저 던전에 들어가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리더형 헌터로서 말이다.”
- “…….”
엄 교수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아이들이 진정한 리더로서의 마음가짐에 잠시 숙연해졌다.
“물론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선 팀원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우수한 실력부터 갖춰야겠지만.”
엄 교수는 자신의 수업에 참여한 학생 개개인을 리더에 적합한 인재로 키워낼 작정이었다.
“오늘 강의의 목표는 한 학기 동안 나를 도와 수업을 이끌어줄 클래스 리더를 뽑는 것이다.”
엄 교수의 리더 선발 제안에 훈련장 안이 술렁였다.
- “뭐야, 그럼 반장을 뽑겠다는 거야?”
- “야, 대학교에 반장이 어디 있어. 그냥 조교 개념으로 한 명 부려먹겠다는 거지.”
- “와…… 잠깐 상상만 했는데도 부담스러워.”
대부분의 아이들은 리더에 대한 거부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리더의 특혜에 대해 알고 있는 태주는 기대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엄 교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리더로 선정될 경우 중간, 기말 점수와 관계없이 최소 A0의 성적을 보장할 것이다.”
학점의 개념이 생소했던 12번 학생이 엄 교수의 제안에 다소 기초적인 질문을 던졌다.
- “저, 교수님. 혹시 A를 받는 것이 어렵습니까?”
“성적을 산출하는 방식엔 절대 평가와 상대 평가가 있다. 여기까진 들어본 적 있나?”
- “네? 아, 네.”
“절대 평가에선 A학점에 해당하는 기준을 넘어야 A를 받을 수 있다. 한마디로 이 수업을 듣고 있는 12명 전원이 A를 받을 수도 있지.”
- “어? 그럼 12명 전원이 A를 못 받을 수도 있겠네요?”
“그래. 하지만 상대 평가에선 A를 받을 수 있는 비율이 정해져 있다. 특히, 입학보다 졸업이 더 어렵다는 한국대의 경우 A가 20%, B가 30%, 그리고 C이하가 무려 50%로 책정되어 있지.”
- “쉽게 말해, 제가 차지한 등수가 곧 학점을 결정하는 거네요?”
“학교마다 그 기준이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는 10명 이상이 수강하는 과목에 대해선 상대 평가를 적용하고 있다.”
- “아…… 그럼 저희는 12명이 수업을 들으니까 상대 평가 방식이네요?”
질문을 건넨 학생이 엄 교수의 눈높이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상위 20%에 속하는 2~3명만 A를 받을 수 있지. 물론 리더를 제외하면, 고작 1~2명 수준이겠지만.”
순간, 아이들의 시선이 태주에게로 집중됐다.
기껏해야 한두 명뿐인 A학점을 놓고 싸우기엔 태주의 능력이 너무 압도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어! 그럼 제가 리더를 하겠습니다!”
- “아니요! 제가 하겠습니다!”
- “야, 넌 아까 상상만 해도 부담스럽다며.”
- “아니, 그땐 이런 혜택이 있는 줄 몰랐잖아.”
취업을 위한 스펙의 중요성을 아는 아이들이 학점 관리를 위한 필승 전략으로 리더가 되는 길을 택했다.
물론 태주가 원하는 리더의 혜택은 단순히 성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지만.
사실 태주의 입장에선 A학점을 받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시험에 어떤 문제가 출제될 건지도 이미 알고 있었고, 새터를 계기로 1학년 때 배우는 모든 전공과목의 족보마저 확보해 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핵심은 학점이 아니라 슈팅 글러브다.’
태주는 엄 교수가 희귀 등급을 지닌 슈팅 글러브를 종강 선물로, 오직 리더에게만 준다는 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조용.”
- “…….”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바로잡은 엄 교수가 리더의 선발 방식을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클래스 리더는 오직 테스트로만 선출한다.”
별도의 자격이 요구된다는 사실에 작은 속삭임들이 오갔다.
- “드디어 활을 쏘는 건가?”
- “후우…… 할 거면, 진작 좀 하지. 흡!”
- “그러게. 테스트고 뭐고, 이러다 힘 다 빠지겠네.”
추의 무게를 견디고 있던 아이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 “저, 교수님, 그럼 정확히 어떤 테스트를 거치는 겁니까?”
이번에도 역시 12번 학생이 입을 열었다.
“첫 번째 테스트는 이미 시작됐다.”
- “네?!”
엄 교수의 예상치 못한 답변에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추의 무게를 가장 오래 버티는 순서대로 1라운드의 점수를 평가하겠다.”
잠시 활을 내려놓은 엄 교수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