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궁수 모임 (2)
1년에 고작 100명.
한국대 헌터학과에 들어가는 건 헌터로서의 잠재력을 인정받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심지어 단순한 프라이드를 넘어 선민의식까지 품고 사는 녀석들도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재능 있는 동기나 선후배에 대한 시기와 견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했다.
민주엽이 우연을 가장해 궁수 모임을 찾아온 것처럼.
- “어? 이쪽으로 오는데?”
- “야, 우리 일어나야 되는 거 아니야?”
주엽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아이들이 어정쩡한 자세로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 아니야. 그냥 앉아 있어.”
그 모습을 본 주엽이 너그러운 선배의 얼굴을 한 채 앉으라고 손짓했다.
- “안녕하십니까.”
- “안녕하십니까.”
주엽에 대해 알 리 없는 아이들이 경직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주엽을 등지고 있던 태주 역시 상체를 틀며 선배에 대한 예의를 갖췄다.
“어? 넌…….”
태주와 눈이 마주친 주엽이 우연한 만남인 양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신태주 맞지? 28기 수석.”
주엽이 태주의 등에 손바닥을 갖다 대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 “역시 태주 얼굴은 바로 알아보는데?”
- “근데 우리를 대할 때랑 온도차가 너무 큰 거 아니야?”
- “야, 내 인사는 아예 받지도 않았어.”
먼 쪽에 앉은 아이들이 주엽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대화를 주고받았다.
“내 동생도 28기로 들어왔는데. 혹시 민대엽이라고 아나?”
주엽의 한마디에 아이들이 술렁였다.
- “어! 새터 때 나랑 같은 조였는데.”
- “걔 이름표에 A급 어쌔신이라고 쓰여 있던 애 아니야?”
- “장기자랑 때 민첩성 대표로 나가서 태주도 알고 있을걸?”
- “어? 근데 왜 형 얘기를 한 번도 안 했지? 나 같으면 바로 얘기했을 텐데.”
두 형제의 미묘한 관계를 모르는 아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그럼 선배님은 기수가 어떻게 되세요?”
동기의 형이라는 사실에 친근함을 느낀 아이가 꽤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난 25기야. 이름은 민주엽이고.”
헌터학과 내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었지만, 오늘 겨우 수강 신청을 마친 신입생들에겐 낯선 이름일 수밖에 없었다.
- “어? 25기면 벌써 4학년이시네요?”
- “와…… 우린 언제 졸업하지?”
- “그러게. 졸업을 해서 프로 자격을 따야 던전도 들어가고, 몬스터도 때려잡을 텐데.”
사회의 치열함을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들이 반짝이는 눈동자로 레이드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던전은 졸업하기 전에도 들어가 볼 수 있어.”
던전 실습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내고 싶었던 주엽이 자연스럽게 운을 뗐다.
- “에이, 그래봤자 체험 학습 수준이지 레이드를 하러 들어가는 건 아니잖아요.”
- “알아보니까 인턴이나 알바를 해도 거의 짐꾼 수준이던데요? 들어갈 수 있는 던전도 제한적이고.”
의욕만 앞선 아이들이 귀동냥 수준의 지식을 주엽에게 늘어놨다.
“그야 그렇지만, 던전 실습이란 과목을 수강하면 진짜 레이드를 경험해 볼 수 있어.”
“…….”
태주가 던전 실습이라는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 “어! 진짜요?”
- “그건 몇 학년 때 들을 수 있는 건데요?”
- “1학년 때는 못 듣죠?”
- “선배님은 이미 수강을 하신 거예요?”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들이 주엽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아니. 4학년 과목이라 나도 이번 학기에 처음 들어.”
- “아…… 4학년…….”
- “2년도 길다고 생각했는데, 3년을 기다려야 되네.
-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이 듣는 건 무리겠지?”
- “하긴, 걸음마도 못 뗐는데 뛰라고 할 순 없으니까.”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아이들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글쎄.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던데?”
- “네?”
- “그게 무슨…….”
다음을 기약하기로 마음먹은 아이들이 주엽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태주도 이번에 같이 듣게 됐거든. 그렇지?”
주엽이 태주의 한쪽 어깨에 손을 얹으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 “네?! 태주가 4학년 수업을요?!”
- “어! 뭐야! 너 진짜야?!”
- “태주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소스라치게 놀란 아이들이 동시에 태주를 쳐다봤다.
“어. 그렇게 됐어.”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적신 태주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근데 왜 우리한테 얘기 안 했어?”
“이건 학과 사무실에서 처리할 문제라 아직 수강 목록에 들어가지 않았거든.”
- “아아, 그럼, 수강 신청이 확정된 다음에 밝히려고 했던 거야?”
“어.”
- “근데 4학년 수업엔 어떻게 들어가게 된 거야?”
“이종도 교수님이 학과장님께 제안을 하셨대. 총장님께서도 흔쾌히 허락하셨고. 근데 나도 통보를 받은 입장이라 딱 너희들 같은 반응이었어.”
- “와…… 역시 클래스가 다르네.”
-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태주면 인정.”
- “야, 이러다 조기 졸업하는 거 아니야?”
논란의 여지가 있는 특혜였지만, 새터에서 증명한 태주의 압도적인 실력 차가 동기들로 하여금 학과 측의 결정을 수긍하게 만들었다.
- “그래도 선배님들이랑 들으면 좀 불편하지 않을까? 심지어 다른 학년도 아니고 4학년인데.”
- “그러게. 각성 수준이야 뭐, 태주도 꿇릴 게 없지만, 그래도 유능한 교수님들 밑에서 3년이나 더 배운 선배님들이 더 노련하긴 하겠지?”
- “하긴, 짬바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니까 게다가 태주는 아직 전공 수업도 한 번 못 들어봤잖아. 따로 훈련할 시간도 부족했고.”
대다수의 아이들이 월반에 대한 부러움보다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아이들의 우려와 달리 태주의 경우 이미 한 번 졸업장을 받은 만큼 전공 수업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고, 개인 기량을 위한 훈련 시간 역시 일일 과제를 통해 충분히 확보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얘들아, 왜 개강도 하기 전에 겁부터 주고 그래. 어차피 태주는 경쟁이 아니라 경험을 하려고 듣는 건데. 안 그래?”
아이들의 반응에 우쭐해진 주엽이 태주의 목표를 왜곡하며 멋대로 선을 그어 버렸다.
‘뭐지, 이 자신감은?’
가만히 듣고 있던 태주가 자신을 한 수 아래로 여기는 주엽의 오만한 태도에 불쾌함을 느꼈다.
“내가 잘 챙겨줄 테니까 선배들만 있다고 너무 쫄지 말고, 이번 기회에 잘 배워둬.”
“네.”
본심을 숨긴 태주와 주엽이 서로를 바라보며 훈훈한 선후배 관계를 연출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입으로만 웃고 있을 뿐, 머릿속으론 상대방을 굴복시킬 방법만 끊임없이 궁리하고 있었지만.
‘그래. 학점이 나와도 지금처럼 웃을 수 있는지 한번 보자.’
태주는 어쌔신보다 더 어쌔신스러운 움직임으로 주엽을 굴복시킬 작정이었다.
바로 그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다시 돌아온 알바생이 현란한 손놀림으로 곱창을 구워내기 시작했다.
“염통은 드셔도 됩니다.”
알바생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태주가 젓가락으로 염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선배님도 염통 드셨어요?”
태주가 처음으로 주엽에게 질문을 했다.
“염통? 어. 먹었는데 왜?”
주엽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선배님 염통은 쫄깃했어요?”
입안에 넣은 염통을 질겅질겅 씹던 태주가 주엽을 올려다보며 중의적인 물음을 던졌다.
“아아, 염통…… 당연히 쫄깃했지.”
단순히 염통의 식감을 묻는 것이 아니란 걸 눈치챈 주엽이 표정 관리를 하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 네. 근데 왜 제 염통은 쫄깃하지가 않죠?”
주엽과의 대결이 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싶었던 태주가 염통을 핑계로 선전포고를 날렸다.
“…….”
경고의 메시지를 전해주러 온 주엽이 오히려 태주의 도발적인 제스처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 난 괜찮은 거 같은데?”
태주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세준이 염통을 집어 먹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고, 나도 모르게 얘기가 길어졌네.”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주엽이 시간을 핑계로 자리를 피하려 했다.
“여기 술값은 내가 계산할 테니까 다들 재미있게 놀아.”
- “어! 감사합니다!”
- “와, 대박. 대엽이네 형 완전 쿨한데?”
- “선배님, 잘 먹겠습니다!”
선배 찬스가 처음인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물론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태주는 타이밍을 놓친 척 감사의 인사를 생략했지만.
“개강하면 보자.”
신입생들을 상대로 이미지 관리를 하던 주엽이 이번에도 태주에게만 인사를 남겼다.
“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제일 마지막에 일어난 태주가 계체량 이벤트에서 벌어지는 파이터들의 눈싸움처럼 주엽을 가깝게 마주했다.
- “선배님, 안녕히 가십쇼.”
- “들어가십쇼.”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서 있던 아이들이 과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 그래…….”
가식적인 미소를 유지하던 주엽의 표정이 후배들을 등지는 순간 싸늘하게 식어갔다.
물론 주엽의 마력이 살짝 강해졌다는 것을 느낀 태주는 그의 뒤통수만 보고도 어떠한 심정인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
*
*
며칠 후.
개강 첫날이 되자 한산했던 캠퍼스가 다시 생동감 있게 변했다.
“태주야.”
어느새 나타난 세준이 트레이닝 돔으로 향하던 태주를 반갑게 불렀다.
“어, 왔어.”
태주의 유일한 월요일 수업인 직업 탐구1.
클래스에 따라 분반이 된 터라 첫 수업부터 궁수 모임 멤버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대부분의 수업이 헌터학과의 건물인 헌터관이나 트레이닝 돔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다른 학과의 교양 수업을 듣지 않는 이상 마주치는 일이 잦았지만.
“야, 넌 빈손으로 다녀서 진짜 좋겠다.”
활과 화살을 무겁게 짊어진 세준이 인벤토리 능력을 지닌 태주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하…… 이럴 줄 알았으면, 무투가를 하는 건데.”
한숨을 내쉰 세준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 맞다. 넌 동아리 뭐 들을지 정했어?”
살짝 뒤쳐져 있던 세준이 태주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며 물었다.
“동아리?”
“새터 때 선배들이 나와서 그랬잖아. 신입생들은 하나 이상의 학과 동아리를 무조건 가입해야 된다고.”
“아, 그거…….”
이미 염두에 둔 동아리가 하나 있었지만, 가입도 하기 전에 떠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태주였다.
“난 축알못에 들어가려고.”
“축알못?”
순간, 축제 때 사회를 봤던 학생회 선배의 권유가 떠올랐다.
“어. 헌터학과 축구 동아리인데, 솔직히 축구 때문에 가는 건 아니야.”
“뭐?”
“인맥 영업.”
“인맥 영업? 너 설마.”
“아빠가 최대한 인맥을 넓혀두라고 그랬거든. 좋은 인재들을 선점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고.”
“뭐야, 그래서 가장 인원수가 많은 축구 동아리를 택한 거야?”
“요샌 용돈을 주는 길드가 많아져서 돈만 믿고 영업했다간 먹튀를 당하기 일쑤래.”
“아…….”
스무 군데 이상에서 용돈을 받고 있던 태주가 자신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근데 첫 시간엔 뭘 배울까?”
들뜬 표정의 세준이 빈 활시위를 당기며 물었다.
“글쎄. 대충 수업 방향만 설명하고 끝나지 않을까?”
세준에게 미리 밝히진 않았지만, 사실 궁수반을 맡은 엄승준 교수는 헌터학과에서도 알아주는 괴짜에 헬스 중독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