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궁수 모임 (1)
약속 시간 5분 전.
교복을 입은 궁수 모임 멤버들이 하나둘 곱창집 앞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아주 지각비들 안 내려고 작정을 했네.”
총무를 맡게 된 세준이 농담조로 말했다.
- “근데 태주는 안 보이네?”
방금 도착한 동기 한 명이 세준에게 5만 원을 내밀며 물었다.
“어. 아직 안 왔…….”
회비를 건네받은 세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바로 그때.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등 뒤에서 나타난 태주가 세준의 대답을 가로채며 말했다.
“안 오긴 누가 안 와.”
“어! 태주야!”
화들짝 놀란 세준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태주를 돌아봤다.
“내가 마지막이야?”
“아니, 아직 3명 안 왔어.”
세준이 휴대폰에 적어둔 명단을 체크하며 말했다.
- “야, 근데 태주가 오니까 뭔가 든든하지 않냐?”
- “그러게. 왠지 이번 기수는 우리 궁수 모임이 잡을 거 같은데?”
- “나도 처음엔 허창민이 워낙 유명해서 전사 쪽 애들이 큰소리 칠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입시 당일에 매직 아처가 나왔네?”
- “하하하하!”
태주의 등장에 아이들의 텐션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서로 동등한 관계지만, 태주가 가진 상징성과 존재감이 동기 그 이상의 안정감을 심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태주 역시 동기들 덕분에 함께 하는 즐거움과 소속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지만.
- “근데 태주는 마셔도 안 취해서 어떡하지?”
- “그러게. 그냥 달달한 음료수나 마셔.”
술롱도르에서 보여준 태주의 믿을 수 없는 주량이 아이들의 기억 속에 강렬히 자리 잡고 있었다.
- “야, 우리 날도 쌀쌀한데 들어가서 기다릴까?”
- “안 그래도 태주 오면 그 얘기부터 하려고 그랬는데.”
- “애들 오기 전에 주문이나 해놓지 뭐.”
- “야, 가자. 가자.”
교복 위에 패딩이나 코트를 걸치고 온 아이들이 움츠러든 자세로 걸음을 재촉했다.
*
*
*
딸랑! 딸랑!
궁수 모임 멤버들이 도어벨 소리와 함께 곱창집 안으로 줄지어 들어섰다.
- “…….”
순간, 식당에 있던 수많은 손님들이 출입문 쪽을 돌아봤다.
한마디로 시선강탈.
고등학생들이 곱창집에 오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일행처럼 보이는 9명의 교복이 모두 다른 건 흔한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오늘 한국대에서 무슨 시험이라도 있었나?”
- “그러게. 딱 봐도 이 동네 교복은 아닌 거 같은데.”
- “그냥 한국대 가고 싶은 애들끼리 모여서 투어 온 거 아니야?”
술잔을 기울이던 손님들이 온갖 추측을 쏟아냈다.
물론 그러한 관심과 오해를 즐기기 위해 교복을 택한 것이었지만.
- “야, 다들 우리만 쳐다보는데?”
- “좀 있다 술 시킬 땐 더 놀랄걸?”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아이들이 조용히 키득거렸다.
“어서 오세요.”
테이블 위를 정리하던 알바생이 태주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몇 분이세요?”
“12명이요. 오전에 예약했는데.”
총무인 세준이 가게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 저녁 7시 단체 예약이요? 이쪽으로 오세요.”
행주를 내려놓은 알바생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자리를 안내했다.
- “진짜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네.”
- “와…… 냄새 장난 아닌데?”
- “나 벌써 침 나오려고 그래.”
북적거리는 손님들과 침샘을 자극하는 고소한 기름 냄새.
적지 않은 규모였지만, 태주가 추천한 맛집답게 초저녁부터 발 디딜 틈이 없었다.
- “근데 돼지가 아니라 소 곱창이었네?”
- “왜. 돼지가 더 좋아?”
- “아니. 아직 돼지 곱창밖에 못 먹어봐서…….”
- “사실 난 곱창 자체가 처음이야.”
오늘 처음 말을 섞어본 아이들도 있었지만, 다들 어색하게나마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여기에 앉으시면 됩니다.”
예약석으로 안내한 알바생이 동그란 깡통 테이블 3개를 두 손으로 가리켰다.
“일단 3명씩 앉자.”
드르륵!
세준이 옷을 보관할 수 있는 의자를 발끝으로 끌어내며 말했다.
“바로 주문 도와드릴까요?”
앞치마에서 주문표를 꺼낸 알바생이 허리를 굽히며 공손하게 물었다.
“아, 잠시만요. 야, 너희 뭐 먹고 싶냐?”
의자 속에 패딩을 쑤셔 넣던 세준이 다른 아이들의 의견을 물었다.
- “그냥 네가 알아서 시켜.”
- “야, 그래도 태주가 추천한 곳인데, 태주한테 먼저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니냐?”
- “그래. 태주야, 너 뭐 먹고 싶어?”
벽에 붙은 메뉴판을 쳐다보던 아이들이 최종 결정권을 태주에게 넘겼다.
“어…… 그럼 일단 테이블마다 곱창 2인분, 막창 1인분, 염통 1인분씩 주세요.”
주문을 맡게 된 태주가 능숙하게 메뉴를 선택했다.
“곱창 2인분, 막창 1인분, 염통 1인분…… 아, 참고로 간, 천엽, 선짓국은 기본 3종 세트로 계속 리필하실 수 있고요. 음료수랑 볶음밥은 단체 손님에 한해서 서비스로 드리고 있습니다.”
주문표를 작성하던 알바생이 태주와 눈을 마주치며 친절하게 설명했다.
- “와…… 여기 서비스 장난 아닌데?”
- “그러게. 딴 데 가면 다 돈 주고 사먹는 메뉴들인데.”
- “역시 태주 말 듣고 오길 잘했네.”
차원이 다른 서비스 수준에 놀란 아이들이 태주의 탁월한 선택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음료수는 콜라와 사이다가 있는데, 어떤 걸로 드릴까요?”
“어…… 음료수는 그냥 알아서 주시고요. 일단 소주 6병이랑 맥주3병만 주세요.”
“네?!”
주문을 받아 적던 알바생이 교복을 입고 술을 시키는 태주의 당당함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 “뭐야, 쟤네들 지금 술 시키는 거야?”
- “김씨, 요즘 애들 무서운 거 알지? 그냥 못 들은척해.”
심지어 주변에 있던 손님들까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며 태주가 있는 곳을 힐끗거렸다.
“저…… 죄송하지만, 미성년자에겐 주류를 판매할 수 없습니다.”
알바생이 난감한 표정으로 타이르듯이 말했다.
물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들은 고개를 돌린 채 웃음을 참고 있었지만.
“저희 미성년자 아닌데요.”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고 있던 태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주민등록증을 건넸다.
“네?!”
상황 파악이 안 된 알바생이 반신반의한 눈빛으로 민증을 들여다봤다.
“어! 진짜 스무 살이시네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던 알바생이 태주의 생년월일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럼 다른 분들도…….”
알바생이 세준을 비롯한 나머지 아이들의 외모를 쓱 한 번 훑어보았다.
- “여기요.”
- “운전면허증도 되죠?”
그러자 다른 멤버들 역시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이를 확인시켜주었다.
“아아, 이벤트로 그러신 거구나.”
영업 정지를 걱정했던 알바생이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만우절이나 커플 이벤트 개념으로 교복을 입고 오시는 분들이 종종 계세요.”
9명 전원의 나이를 확인한 알바생이 신분증을 돌려주며 말했다.
- “어휴, 그냥 잠자코 있길 잘했네.”
- “김씨, 내가 뭐라고 그랬어. 요즘엔 그냥 모른 척하는 게 최고라니까?”
덩달아 예민해져 있던 손님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려 자신들의 테이블에 집중했다.
“그럼 일단 이렇게만 준비해드릴까요?”
오해를 푼 알바생이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태주에게 물었다.
“네. 그리고 세팅은 12명으로 해주세요.”
“부추랑 콩가루 좀 많이 주세요.”
태주의 옆에 앉은 세준이 들뜬 목소리로 부탁했다.
“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확인을 마친 알바생이 친절한 미소와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
“야, 근데 교복이 다 다르니까 좀 웃기긴 하다.”
재킷 단추를 푼 세준이 지퍼로 된 교복 넥타이를 살짝 내리며 말했다.
- “야, 근데 넌 교복이 본가에 있다고 그러지 않았냐?”
- “아, 이거? 고등학교 동창한테 잠깐 빌려왔어. 걔도 나처럼 서울로 유학 왔거든.”
- “와…… 드레스 코드 맞추려고 진짜 빌려온 거야?”
- “아까 교복 안 입고 오면, 회비가 2배라고 해서.”
- “야, 근데 오랜만에 교복 입으니까 좀 기분이 묘하지 않냐?”
- “아, 맞다. 내가 오늘 버스를 타고 왔는데, 기사 아저씨가 ‘학생입니다’라고 안 나와서 이상하게 쳐다봤어.”
- “야, 난 너무 일찍 와서 혼자 담배 한 대 때리려고 그랬는데, 교복을 입고 있으니까 괜히 눈치가 보여서 라이터도 못 꺼냈어.”
삼삼오오 모여 앉은 아이들이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곱창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참, 그리고 내가 아는 선배한테 물어봤는데, 우리끼리 와펜 같은 거 제작해서 과잠에 붙여도 된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세준이 와펜이 붙은 선배의 과잠 사진을 아이들에게 보여줬다.
- “와펜? 그게 뭔데?”
세준의 휴대폰 앞으로 얼굴을 들이민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몰라 이거? 너희들 교복에 붙어 있는 학교 마크 같은 거.”
사진을 확대시킨 세준이 앞에 있던 아이의 재킷을 검지로 가리켰다.
- “아아, 이런 거…….”
눈만 끔뻑거리고 있던 아이들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넣고 싶은 디자인이나 문구가 있으면, 생각나는 대로 나한테 보내. 내가 일주일 동안 취합했다가 단톡방에 올려서 투표할 수 있게 만들게.”
풍림의 후계자인 세준은 길드에 소속된 홍보팀에게 와펜의 디자인을 맡길 생각이었다.
“뜨겁습니다.”
어느새 돌아온 종업원이 곱창 불판을 테이블 중앙에 위치한 로스터 위에 올려놓았다.
- “오오, 대박.”
- “이거 언제 뒤집어야 돼요?”
- “감자는 먹어도 되는 거 아닌가?”
수저를 옆으로 넘기던 아이들이 초벌이 된 곱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곱창은 저희가 직접 구워드리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빠른 손놀림으로 세팅을 마친 종업원이 불판 위에 부추를 올려주며 상냥하게 설명했다.
바로 그때.
- “야, 근데 저거 과잠 아니냐?”
- “어? 그런 거 같은데?”
태주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고개를 쭉 뺀 채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선배? 누구지?’
젓가락을 내려놓은 태주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음?’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간 태주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자리를 파하려고 일어난 손님 2명이 의자 속에 넣어둔 헌터학과 과잠을 꺼내 한쪽 팔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멀찌감치 떨어진 테이블이었지만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두 사람 중 한 명이 대엽의 친형이자 4학년의 에이스인 민주엽이라는 사실을.
- “지금 나가려는 거 같은데?”
- “야, 과선배면 가서 인사해야 되는 거 아니야?”
- “그러게. 괜히 모른 척했다가 집합이라도 당하면.”
- “근데 이런 꼴로 인사하긴 좀 민망한데.”
- “솔직히 우리들 얼굴은 모를 수 있는데, 태주는 워낙 유명해서 선배들이 먼저 알아보지 않을까?”
- “하긴, 과잠까지 입고 있는데, 쌩까긴 좀 그러네.”
- “어쩌면 가게로 들어왔을 때 이미 봤을 수도 있어.”
선배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아이들이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 “역시 선배들이라 맛집은 기가 막히게 알고 왔네.”
- “단체로 가면 복잡하니까 일단 한 명이 대표로 갔다 올까?”
- “근데 누가 가지?”
“내가 갔다 올게.”
부추를 집어먹고 있던 세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배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28기 신입생 임세준이라고 합니다.”
주엽에게 다가간 세준이 선배들에게 배운 대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 그래…… 근데 웬 교복?”
주엽이 모른 척 세준을 아래위로 훑어봤지만, 사실은 단톡방에서 알아낸 정보를 통해 한 시간 일찍 도착해 있던 상황이었다.
태주가 대엽을 살아 있는 경고장으로 이용했듯 주엽 또한 우연을 가장해 선배로서의 위엄을 각인시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 “아, 그냥 동기들끼리 재미삼아 입은 겁니다.”
“동기? 그럼 다른 애들도 같이 있어?”
- “네. 저기 저 교복 입은 애들이 다 저희 동기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세준이 해맑은 얼굴로 아이들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아, 그래? 그럼 선배로서 술값 정도는 계산해줘야지.”
- “아, 아닙니다. 어차피 저희들끼리 회비를 걷은 상황이라…….”
“그건 2차 때 쓰면 되잖아.”
- “네?”
“가자. 신입생들 얼굴이나 좀 보고 가게.”
주엽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세준을 앞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