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새터 (23)
최고의 신입생과 최악의 신입생 모두 위장 신입생 3명의 만장일치로 결정됐다.
특히 다른 사람을 뽑을 것이라 예상됐던 김환이 딱밤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태주를 최고의 신입생으로 추천했다.
물론 이견을 내는 순간 속이 좁고 공정하지 못한 선배라는 비난을 받을까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지만.
결과가 발표된 후 태주는 두 사람을 찾아갔다.
우선 1년간 부려먹게 된 공식 심부름꾼, 균성.
“우리 오늘부터 1일이네?”
태주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균성의 한쪽 어깨를 지그시 움켜쥐었다.
“하…… 설마 진짜로 시킬 건 아니지? 나 지금 人수다에 퍼진 영상 때문에 너무 힘들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균성이 태주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리고 나 어제부로 술도 딱 끊었어. 이따 저녁 뒤풀이 때도 녹색, 아니, 아니, 빨간색 팔찌만 차고 있을 거야.”
시키지도 않은 금주까지 선언하며 반성하는 모습이 마치 판사님 앞에 선 음주운전자의 최후 진술 같았다.
“그리고 어제 일은 나도 진짜 기억이 안 나서 그래. 너도 알잖아. 원래 술 마시다 보면 필름도 막 끊기고. 아, 넌 아닌가? 뭐, 아무튼 고의는 아니니까 선배들이 하는 장난에 괜히 끌려다니지 말자 우리. 어?”
감정에 호소하던 균성이 최고의 신입생으로 뽑힌 태주를 자신과 같은 부류로 묶으며 본질을 흐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선배들의 복종 장치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장난? 글쎄. 네가 최고의 신입생으로 뽑혔어도 그렇게 얘기했을까?”
균성의 궤변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던 태주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고작 한 걸음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상황 파악이 안 된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심어줄 목적으로 앞점멸을 사용했다.
“어이 씨! 뭐야!”
태주의 위협적인 움직임에 놀란 균성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넌 이제 학점이 2개인 거 알지?”
사실 최고의 신입생은 최악의 신입생으로 선정된 녀석의 조력 태도를 학점으로 평가한 뒤 직속 선배에게 보고해야 했다.
“교수님한테만 잘 보이는 것만으로는 학교생활이 안 풀릴 거 같은데.”
“뭐…… 뭐?”
당황한 균성의 동공이 태주의 협박 아닌 협박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주가 주는 점수에 따라 선배와의 면담은 물론 조력 기간의 연장이라는 최악 페널티까지 부여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첫날이라 그냥 넘어가겠지만, 앞으로도 그러면 나한테 좋은 점수 받기 힘들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기선 제압에 성공한 태주가 균성이 그랬던 것처럼 어깨동무를 한 뒤 얼굴을 들이밀었다.
“…….”
페널티의 압박을 느낀 균성이 결국 저항을 포기한 채 침묵으로 순응했다.
선배들에게 미운털이 박힌 상황에서 동기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태주까지 적으로 돌리는 것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자충수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단 연락처부터 찍어.”
태주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균성에게 내밀었다.
“답장은 바로바로. 읽씹 하면 알지?”
태주는 학기 중에 겪을 수 있는 온갖 귀찮은 잡무들을 균성에게 떠넘길 생각이었다.
“자. 내 이름 정도는 알지?”
전화번호만 입력한 균성이 휴대폰을 돌려주며 태주를 곁눈질했다.
“원래 저장은 내 마음대로 하는 거야.”
어깨동무를 푼 태주가 균성의 이름을 알아보기 쉽게 저장했다.
[추 비서]
“뭐? 추 비서? 야, 그래도 비서는 좀.”
자존심이 상한 균성이 눈살을 찌푸리며 볼멘소리를 했다.
“좀 뭐.”
갑을관계를 명확히 하고 싶었던 태주가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어? 아, 아니야.”
태주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는 균성이 어색한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번호도 저장해야 되니까 휴대폰 줘봐.”
태주가 균성이 찍어준 번호로 전화를 걸며 말했다.
지이잉! 지이잉!
“어, 여기…….”
“액정 이거 술 먹다 깨진 거냐?”
태주가 거미줄처럼 금이 간 균성의 휴대폰을 건네받으며 물었다.
“몰라. 기억은 안 나는데, 그랬던 거 같아.”
고개를 갸웃거린 균성이 민망한 얼굴로 뒷목을 매만졌다.
“어제부로 술을 끊었다고?”
“어?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태주를 설득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던 균성이 시선을 피하며 멋쩍게 웃었다.
“필름 끊겼다는 핑계로 연락 씹지 마라.”
자신의 이름을 직접 저장한 태주가 휴대폰을 돌려주며 경고했다.
[고용주]
“뭐? 고용주?”
한순간에 추 비서로 전락한 균성이 통화 목록에 찍힌 태주의 닉네임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태주야, 그래도 동기끼리.”
▶ 스킬 『폭주』가 발동되었습니다.
마력을 증폭시킨 태주가 균성의 반발을 단칼에 끊어버렸다.
“한 번씩 검사할 거니까 이상한 걸로 바꿨다 걸리면 바로 F다.”
“어…….”
태주의 기세에 눌린 균성이 조용히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연락처 교환을 마친 태주가 이번엔 김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선배님.”
“어? 어, 그래…….”
김환이 태주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신이 선배라는 사실을 이미 공개한 상태였지만, 딱밤의 여운으로 인해 아직은 태주를 마주하는 것이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이마는 좀 괜찮으세요?”
“아, 이마…… 괜찮아. 하하…….”
꽁한 선배로 보이고 싶진 않았던 김환이 이마를 매만지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근데 무슨 할 말 있어?”
새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후배의 눈치를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김환이었다.
“네.”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인벤토리를 연 태주가 술롱도르 기념으로 받은 파이안 한 병을 꺼낸 뒤 김환에게 건넸다.
“이거 하나 드세요. 어제 술롱도르 기념으로 받은 최고급 포션인데, 상처 회복에 도움이 될 거예요.”
“어? 이건…….”
뜻밖의 선물을 받아든 김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태주와 포션을 번갈아 쳐다봤다.
“저도 아침에 하나 마셔봤는데, 나쁘지 않던데요?”
새끼손가락을 쓰는 대신 소원 2개를 획득했던 태주가 확답을 받아내기 위해 경계심부터 허물었다.
동기인 균성과 달리 선배를 이용하기 위해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어, 그래, 고마워. 잘 마실게.”
태주의 의도를 알 리 없는 김환이 그 자리에서 포션을 들이켰다.
“와, 이거 장난 아닌데?”
포션의 즉각적인 효과에 놀란 김환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태주를 쳐다봤다.
“뭐랄까. 아직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3차 각성 이상의 S급 힐러가 힐을 넣어준 느낌? 회사 이름이 생소해서 반신반의했는데 그래도 기술력은 있나 보네.”
남은 한 방울까지 깨끗하게 털어 넣은 김환이 병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병 더 드릴까요?”
“어? 아, 아니야. 이걸로도 충분해. 고마워.”
경직되어 있던 김환의 표정이 생각지도 못했던 태주의 호의에 한결 부드러워졌다.
“다행이네요. 선배였다는 걸 알고 마음이 불편했었는데.”
김환의 정체를 출발하기 전부터 알고 있던 태주가 모른 척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불편해할 게 뭐 있어. 어차피 우리가 먼저 속인 건데…… 그리고 딱밤 때린 것도 너무 신경 쓰지 마. 나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니까.”
자신을 너그러운 선배로 포장한 김환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바로 그때.
“어? 그럼 소원 2개도 아직 유효한 거예요?”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낸 태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뭐?”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던 김환이 후배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 참, 내가 그랬었지…….”
소원을 2개로 올린 건 태주였지만, 애초에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제안한 건 김환이었다.
“그래, 뭐, 약속은 약속이니까…….”
제 무덤을 스스로 판 꼴이 된 김환이 선배의 체면상 어쩔 수 없이 승낙을 했다.
“와…… 역시 선배님께선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으시네요.”
“그, 그럼. 당연하지…….”
표정 관리에 들어간 김환이 대화의 쐐기를 박는 태주의 사심 가득한 칭찬에 말까지 더듬었다.
*
*
*
며칠 후, 태주의 방.
수강 신청을 3분여 앞둔 태주가 컴퓨터 앞에 앉아 실검을 확인하고 있었다.
당시엔 사양이 좋은 컴퓨터와 초고속 인터넷을 찾아 학교 앞 PC방을 전전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최적의 환경을 갖춘 상태였기 때문이다.
[실시간 검색어]
1. 한국대학교 수강신청
2. 서버시간
3. 유성대학교 수강신청
4. 세일대학교 종합정보시스템
5. 신영제약
수강 신청이 실검 순위를 장악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보통 같은 날 수강 신청을 하는 대학들의 이름이 오르락내리락 했었는데, 정확한 서버 시간을 체크하기 위한 인터넷 시계 역시 덩달아 검색어에 오르곤 했다.
‘신영제약이 슬슬 뜨고 있구나.’
수강 신청에 잠시 밀리긴 했지만, 김환이 그랬듯 새로 출시된 파이안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호평으로 인한 주문 물량이 폭주하면서부터 신영제약의 주가도 무서운 속도로 오르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승세를 예측하고 있던 태주의 입꼬리 역시 그래프의 모습처럼 자연스럽게 올라가고 있었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태주의 휴대폰이 1시간 전부터 정신없이 울려대고 있었다.
28기 전원이 들어와 있는 단톡방이 원인이었는데, 다들 수강 신청 자체가 처음이라 메시지만 봐도 혼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이제 1분도 안 남았드아~!!!]
[‘연애의 이해’ 같이 들을 사람 없냐?]
[나 지금 PC방인데 애새끼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 됨. ㅠㅠ]
[뭐야! 오늘 수강 신청이었어?!]
물론 수강 신청 날짜를 혼동하는 녀석도 어김없이 존재했지만.
[09:58:24]
책상 위에 설치된 여러 개의 모니터엔 수강 신청 사이트와 서버 시간 등이 띄워져 있었다.
‘빨리 끝내고 쉬어야지.’
매크로 방지 기술이 발달한 한국대의 경우 손가락이 빠른 사람을 이길 수가 없었다.
물론 클릭 속도만큼이나 신청 과목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했는데, 강의별 특징은 물론 교수들의 스타일까지 훤히 꿰뚫고 있는 태주의 경우 정정기간이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한 전략을 세워둔 상태였다.
[09:59:48]
수강 신청 약 10초 전.
장바구니에 담아둔 과목들을 확인한 태주가 F5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각이 되어야 수강 신청 버튼이 활성화되는데, 이미 수많은 학생들의 동시 접속으로 서버가 불안정한 상황이라 새로 고침 타이밍이 맞지 않을 경우 수강 신청 화면조차 뜨지 않는 최악의 사태를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이돌 콘서트나 명절 티켓팅처럼 수강 신청 역시 대부분 10초 안에 승부가 났는데, 인기 있는 교양 과목의 경우 1초 컷을 자랑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신청이 삐끗하는 순간 전체 시간표가 꼬여버리는 것이다.
[09:5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