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새터 (19)
- “……피었습…… 어?”
허전함을 느낀 술래가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태주가 사라진 뒤였다.
[“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사회자가 스티커를 떼지 않은 태주의 선택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 “야, 이거 어떡해.”
등짝을 내어줬던 술래가 다급한 목소리로 사회자를 불렀다.
[“어…… 그냥 계속해. 어차피 1분 후면 재경기를 해야 되니까.”]
사회자가 술래를 맡은 동기에게 휴대폰 화면을 보여줬다.
[00:00:58]
- “알았어. 무궁화 꽃이…….”
석연치 않은 표정의 술래가 벽을 마주한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 네, 지금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는데요. 신태주 선수가 술래의 뒤에 접근한 것은 맞지만, 결과적으로 스티커를 뗀 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은 경기를 속개시킨 뒤, 알람이 울리는 대로 남은 생존자들의 재경기를 진행하겠습니다.”]
반칙으로 볼 순 없다고 판단한 사회자가 주어진 시간이 다할 때까지 경기를 진행시켰다.
- “야, 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 “으음. 글쎄…… 아! 혹시 이런 건 아닐까?”
- “어? 어떤 거?”
- “아니, 왜 그런 거 있잖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다.”
- “뭐야, 그럼 순간 이동이 없어도 우승할 수 있는데, 일부러 안 했다는 거야? 왜?”
- “귀찮으니까.”
- “뭐?”
- “야, 너 같으면, 공학 계산기가 있는데, 일일이 연필로 풀어보겠냐?”
- “어? 그럼 지금은 귀찮아도 오해를 풀고 싶어서 돌아왔다는 거야? 먼저 얼어붙은 애들이 저렇게 길을 막고 있는데?”
- “뭔가 방법이 있겠지. 그래도 S급, 아니, 신태주인데. 그리고 너도 아까 봤잖아. 학과장님이 만든 두 번째 결계까지 부숴버릴 뻔한 거.”
-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닌 태주니까. 신태주 파이팅!”
- “3관왕 가즈아!”
태주의 의도를 헤아려보던 9조의 아이들이 한결같은 믿음으로 응원을 재개했다.
“출발 안 할 거야?”
출발선 앞에 멈춘 태주가 머뭇거리고 있던 대엽을 힐끗 쳐다봤다.
- “어? 아…… 아니 난 괜찮아.”
태주와 눈이 마주친 대엽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래? 그럼 나 먼저 간다.”
- “간…… 간다고? 순간 이동으로?”
“아니, 그냥 달려서.”
- “뭐?! 달린다고?! 저…… 저길?!”
대엽이 바리케이드처럼 변한 무대를 똥그랗게 뜬 눈으로 돌아봤다.
- “그러다 스치기라도 하면…….”
까치발을 든 채 조심스럽게 걸어가도 모자랄 판에 뛰어간다니.
현실주의자에 조심성까지 많은 대엽의 입장에선 점멸을 배제한 태주의 배짱 플레이가 자살행위처럼 보였다.
[“자, 정확히 5초 후에 재경기로 들어가겠습니다.”]
태주와 대엽의 대화를 듣지 못한 사회자가 남은 시간을 체크하던 바로 그때.
- “무궁화…….”
‘지금이다!’
재경기를 염두에 둔 술래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등을 보이는 순간, 폭주 스킬을 활성화시키고 있던 태주가 빨간색 스티커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어!”]
술래에게 힌트를 주지 않기 위해 참가자가 움직이는 동안만큼은 최대한 말을 아끼던 사회자지만, 지금처럼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감탄사까진 막을 방법이 없었다.
- “읍읍!”
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은 아이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태주의 돌진을 지켜봤다.
- “꽃이…….”
수상한 낌새를 느낀 술래가 미간을 찌푸리며 노래의 속도를 높였다.
샤샤샥!
민첩성 수치가 극대화된 태주가 장애물처럼 늘어선 동기들 사이로 날렵하게 빠져나갔다.
‘됐어!’
- “피었습니…….”
강력한 마력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술래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려던 바로 그때.
치직!
눈보다 빠른 태주의 손이 술래의 등에 붙어 있던 빨간색 스티커를 가차 없이 뜯어냈다.
- “우와!”
순간, 흥분을 억누르고 있던 아이들의 환호성이 사방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 “와…… 이번 건 진짜 미쳤다.”
- “아니, 저길 어떻게 통과했지?”
- “에이, 역시 귀찮아서 순간 이동을 했던 거네.”
- “이동 속도랑 방향 전환도 장난이 아닌데? 난 무슨 S급 어쌔신인 줄.”
- “어쌔신 판을 궁수가 씹어 먹다니. 진짜 클래스를 떠나서 완성형 헌터다.”
오해에서 벗어난 태주에게 동기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00:00:00]
삐비비빅! 삐비비빅!
사회자가 맞춰둔 알람이 아이들의 함성 소리에 흔적도 없이 묻혔다.
[“이야!”]
놀란 사회자 또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탄성만 내질렀다.
- “…….”
출발 지점에 서 있던 대엽의 몸이 빙결 마법에 걸린 것처럼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재능에 대한 열등감과 무력감.
친형인 주엽에게 느꼈던 감정이 또 한번 대엽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들었다.
‘완전 넋이 나갔네.’
태주가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대엽의 상기된 얼굴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살아 있는 경고장.
주엽에게 기선 제압을 하고 싶었던 태주는 친동생인 대엽의 입을 빌려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킬 작정이었다.
[“네! 이것으로 3라운드의 최종 우승자 역시 신태주 선수가 차지했습니다!”]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있던 사회자가 뒤늦게 결과를 발표했다.
“교수님, 이 정도면 납득할 만한 결과물이 나온 거 아닙니까?”
태주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 교수가 무대 앞에 있던 학과장에게 다가가 자신 있게 물었다.
“결과물은 이미 1라운드 때 나왔네.”
얼어붙은 아이들을 원상회복시키던 학과장이 결국 이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 그럼…….”
“천하의 민주엽이 고생 좀 하겠군.”
학과장이 태주에 대한 극찬을 남기며 유유히 자리로 돌아갔다.
*
*
*
잠시 후.
[“4번째 종목인 광역 힐 대결에선 A급 힐러인 한유리 선수가 압도적인 실력 차로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
짝! 짝! 짝! 짝!
유리의 선전을 지켜보던 태주가 멀리서나마 진심어린 축하를 해주었다.
- “야, 근데 쟤 엄청 예쁘지 않냐?”
- “안 그래도 학생회 선배들이 옆에서 엄청 기웃거리던데?”
- “아직 학기 초라 남자 친구는 없겠지?”
- “왜. 고백해서 혼내주게?”
- “뭐, 이 새끼야?”
태주의 주변에 있던 남학생들이 유리와의 로맨스를 꿈꾸며 설레발을 치고 있었다.
‘저것들 또 고백하려고 그러네.’
공개 고백 잔혹사.
태주는 유리에게 공개적으로 대시했다가 차인 동기들의 리스트를 훤히 알고 있었다.
‘100번을 고백해봐라 유리가 눈길이라도 주나.’
허창민과 함께 남녀 인기투표 1위를 놓치지 않았던 유리는 외부인 취급을 당하던 태주를 챙길 만큼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지만, 유독 이성적인 관계에서만큼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다.
물론 유리의 그러한 면이 여자 동기들의 시샘을 받지 않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CC를 노리는 남자 동기들의 입장에선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 “근데 CC가 되면 무슨 기분일까?”
- “CC는 무슨. 그거 우리 사촌형이 그러는데, 깨지는 순간 학교생활이 엄청 피곤해진대. 심지어 그 형은 이상한 소문까지 돌아서 휴학까지 했어.”
- “뭐야, 그 정도야?”
- “아, 왜 그런 말도 있잖아. 사귈 땐 캠퍼스 커플인데, 헤어질 땐 C발놈 C발년이라고. 그리고 너나 나나 가능성 제로니까 괜히 흑역사 만들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맥주 500CC나 때려.”
- “알았어 이 새끼야.”
태주가 아이들의 잡담에 헛웃음을 짓고 있던 바로 그때.
[“자! 이제 마지막 다섯 번째 종목인 행운 대결로 넘어가겠습니다.”]
사회자가 행운아라 자부하는 신입생들을 무대 위로 불러 모았다.
[“올라오는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서 주세요.”]
‘하나, 둘, 셋, 넷…… 지금이다.’
앞서가던 아이들의 숫자를 체크하던 태주가 7번째 참가자가 되도록 보폭을 조절했다.
[“와…… 역시 특별한 능력이 필요 없는 종목이라 가장 많은 참가자들이 지원해 주셨는데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 게임은 여러분들의 지식수준과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복불복. 그냥 허무하리만큼 개연성이 없으니까 따지실 분들께선 지금 조용히 내려가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설명대로 이 게임의 승리 조건은 우연 그 자체였다.
물론 고인물 신입생인 태주에겐 필연적인 선택지들뿐이었지만.
[“자! 그만!”]
계단 쪽에 있던 선배들이 사회자의 신호와 동시에 아이들을 막아섰다.
- “어? 왜 그러세요?”
- “뭐지?”
무대에 오르지 못한 아이들이 사회자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봤다.
[“죄송하지만, 지원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20명 안에 들지 못한 인원들은 탈락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가 영문도 모르고 떨어진 아이들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 “와…… 진짜 밑도 끝도 없이 탈락시키네.”
- “야, 심지어 난 21번이라 떨어졌어.”
허무하다 못해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자리로 돌아갔다.
[“자, 이제 이 게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아시겠죠?”]
- “네!”
운 좋게 살아남은 아이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실력으로 말하는 헌터의 덕목에 행운이 들어가는 이유가 궁금하시겠지만, 사실 던전 안에선 고작 1cm, 아니, 1mm 차이로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살아 돌아오는 것 자체가 행운인 거죠.”]
- “…….”
마지막 라운드를 장난처럼 받아들이던 아이들이 죽음을 언급하는 사회자의 말에 갑자기 숙연해졌다.
[“헌터를 택한 이들에게 죽음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숙명이지만, 부디 여러분들에게만큼은 행운이 함께 하길 기원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알 수 없는 전우애를 느낀 28기 신입생들이 뜨거워진 가슴으로 힘차게 박수를 쳤다.
- “아 왜 자꾸 눈물이 나려고 그러지?”
- “야, 솔직히 헌터의 평균 수명이 일반인들보다 짧은 걸 모르고 선택한 건 아니잖아.”
- “그래. 각성이란 축복을 받은 이상 그 정도 리스크는 감수해야지.”
- “한국대 들어왔다고 마냥 좋아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4년만 있으면 평생 몬스터만 상대해야 되네.”
- “태주야, 너는 뭐 죽음에 대해 느끼는 거 없어?”
무대 위에 나란히 서 있던 아이들이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진지하게 물었다.
“죽음? 글쎄…….”
이미 한 번의 죽음을 경험한 태주가 고민해 본 적이 없는 척 자연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자! 드디어 본격적인 선택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사회자가 우울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텐션을 끌어올렸다.
[“첫 번째 복불복은 사다리 타기 게임인데요. 정확히 50%의 탈락자가 발생하게 되며, 20개의 사다리 중 오직 1개의 사다리에만 추가 열쇠 선택권이 들어 있습니다.”]
- “추가 열쇠 선택권? 그건 또 뭐지?”
- “그래도 이건 확률이 50대50이라 해볼 만한 거 같은데?”
선택을 앞둔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사다리의 시작점을 찍어두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여러분, 행운을 상징하는 숫자가 뭐죠?”]
- “7이요!”
[“자! 그럼 첫 번째 사다리는 7번 선수가 뽑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일곱 번째 자리를 노리고 올라온 태주가 추가 열쇠의 위치를 떠올리며 화이트보드 앞으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