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새터 (18)
[“뼈대가 되는 규칙은 동일하지만, 그냥 하면 경연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한 가지 핸디캡을 부여하도록 하겠습니다.”]
- “뭐야, 또 핸디캡이야?
- “설마 또 깽깽이를 해야 되는 건 아니겠지?”
핸디캡이 있다는 사회자의 말에 지원자들이 술렁였다.
물론 변형된 방식을 알고 있는 태주는 덤덤한 표정으로 사회자의 말을 흘려들었지만.
[“정확한 게임의 룰은 조교들의 시범을 보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자, 참가자 여러분께선 일단 무대 끝으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가 신호를 주자 선배 2명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우선 탈락자의 조건은 2가지입니다. 첫째, 술래가 돌아봤을 때 움직인 경우. 이건 뭐, 모르시는 분이 없겠죠?”]
- “저, 근데, 움직였는지 안 움직였는지는 술래 혼자 판단하는 겁니까?”
옹기종기 모여 있던 신입생들 중 한 명이 손을 들고 물었다.
[“아니요. 그 부분은 강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판단할 겁니다.”]
답변을 마친 사회자가 설명을 이어갔다.
[“둘째, 옷이나 신체의 일부가 얼음에 닿는 순간, 어마어마한 벌칙과 함께 자동으로 탈락됩니다. 교수님?”]
이번에도 역시 학과장의 마법이 경연에 동원됐다.
“…….”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학과장이 무대 앞으로 다가가 주문을 외웠다.
휘휘휘휘휘휘!
무대 정중앙에 생성된 아이스볼이 허공에 뜬 채 바람소리를 내며 회전했다.
요가를 할 때 사용하는 짐볼 정도의 크기였는데, 한참을 돌던 아이스볼이 갑자기 야구공만 한 사이즈로 나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촤악!
- “와…….”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어른 주먹만 한 얼음들이 무대 곳곳에 떠 있는데요. 일단 이 얼음의 위력부터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자! 시범 조교들 위치로!”]
- “네!”
술래를 맡은 선배가 맞은편 벽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무궁화 꽃이…….”
그러자 출발선에 대기하고 있던 나머지 선배 한 명이 등을 진 술래를 노려보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뗐다.
- “……피었습니다!”
- “…….”
술래에게 다가가던 선배가 얼음에 닿지 않기 위해 역동적인 자세로 멈췄다.
[“자, 다양한 위치에 떠 있는 얼음들로 인해 마음대로 접근하기가 어려운데요. 만약 실수로 얼음을 건드리는 날엔…….]
사회자와 눈짓을 주고받던 선배가 일부러 얼음에 손끝을 갖다 댔다.
바로 그때.
- “어! 뭐야 저거!”
- “몸 전체가 얼음 조각처럼 변했어!”
시범을 지켜보던 아이들이 빙결 마법에 걸린 선배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아, 이건 움직임을 멈추는 효과만 있을 뿐, 신체적인 대미지를 주는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회자가 게임의 안전성을 확인시켜 주며 놀란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교수님?”]
사회자와 눈이 마주친 학과장이 얼어붙은 시범 조교를 즉시 원상회복시켰다.
[“시범 조교. 몸에 이상이 없으면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주세요.”]
- “네 이상 없습니다.”
짧은 동면에서 깨어난 선배가 해맑은 표정으로 정해진 동작을 표현했다.
[“네, 좋습니다. 그럼 탈락하는 과정을 보여드렸으니 이젠 승리 요건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법이 풀린 조교를 내려 보낸 사회자가 검지로 술래의 척추 라인 중앙에 붙은 빨간색 스티커를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저 500원짜리 크기의 스티커를 제일 먼저 떼는 사람이 이번 대결의 승자가 되는 겁니다.”]
- “와…… 이거 생각보다 빡센데?”
- “그러게. 술래의 감시만 받아도 신경 쓰이는데 얼음까지 피하면서 가려면…….”
- “이게 왜 민첩성 테스트인지 이제야 알겠네.”
- “솔직히 시간만 있으면 충분히 갈 수 있는데, 2등이 의미 없는 게임이라.”
식은 죽 먹기라 여겼던 참가자들이 예상치 못한 변수들에 난색을 표했다.
[“대신 일반적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처럼 출발 지점으로 돌아올 필요도 없고, 술래에게 잡힌 동료를 구하는 방식도 아니니까 참가자 개개인은 오롯이 본인의 플레이에 집중하시면 됩니다.”]
- “저, 혹시 얼어붙은 참가자는 끝날 때까지 굳어 있는 건가요?”
대결을 목전에 둔 참가자들의 마지막 질문이 이어졌다.
[“네. 얼어붙은 참가자들 자체가 하나의 장애물로 작용하며, 그들의 몸에 닿는 순간, 얼음을 만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빙결 효과가 발생합니다. 한마디로 함께 굳어버리는 거죠.]
- “뭐야, 그럼 늦게 출발하려다가 길이 막히면 나만 손해 보는 거네?”
- “어허, 명색이 민첩성 테스트인데, 뒤에서 간을 보면 쓰나.”
- “야, 근데 태주가 순간 이동을 하면 게임이 너무 쉽게 끝나지 않냐?”
- “그러게. 이 정도 거리면 그냥 술래 뒤로 한 번에 이동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사실 보물찾기를 할 때부터 좀 그렇긴 했지. 막말로 남들처럼 뛰어다녔으면 그렇게 빨리 끝나진 않았을 거 아니야.”
태주를 견제하려는 일부 참가자들이 점멸 스킬의 이동 범위를 지적하며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다.
- “저, 선배님, 공정한 승부를 위해선 순간 이동 능력을 제한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어어, 그러니까 그게…….]
이러한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어떠한 선택을 내려도 피해를 보는 쪽이 발생했기 때문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 문제라면 내가 대답해 주지.”
무대 앞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학과장이 도움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사회자를 대신해 적절한 판단을 내려줬다.
“이건 가장 민첩한 신입생을 뽑는 경기다. 다시 말해, 걷든, 뛰든, 공중을 날아다니든, 각자의 방식으로 최고의 결과물만 내면 된다는 뜻이다.”
- “그래도 순간 이동은 너무 불공정한 거 아닙니까?”
태주의 손을 들어준 학과장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참가자 한 명이 볼멘소리를 했다.
“불공정? 자넨 불공정의 의미를 모르는 건가?”
- “네?”
“S급이 A급보다 뛰어난 건 불공정한 게 아니라 당연한 이치다. 능력의 차이를 형평성의 문제로 끌고 가는 건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자 하향평준화를 바라는 삐뚤어진 심보지.”
- “…….”
반박할 수 없는 학과장의 예리한 지적에 신입생의 말문이 막혔다.
“뭐, 더 할 말 있나?”
- “아, 아닙니다.”
꼼짝없이 꼬리를 내린 질문자가 민망함에 고개를 떨궜다.
“미리 말해두겠지만, 태주가 가진 능력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얻은 것이 아니니 특혜라고 할 수 없다.”
비슷한 오해가 반복될 것이라고 여긴 학과장이 태주를 둘러싼 여러 가지 편견들을 공개적으로 짚고 넘어갔다.
“그러니 앞으로 자신보다 뛰어난 동기의 실력을 질투하거나 폄훼하는 행동은 지양해 주길 바란다.”
따끔한 충고를 마친 학과장이 태주에게 순간 이동을 허락했다.
“신태주 학생.”
“네, 교수님.”
“얼마든지 순간 이동을 해도 좋다. 경기가 싱겁게 끝나든 말든 자신의 특기를 당당하게 보여주는 것이 장기자랑의 진정한 의미니까.”
“감사합니다, 교수님.”
한없이 어렵던 학과장의 사려 깊은 배려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자, 이제야 조율이 끝난 거 같은데요.”]
덩달아 숨을 죽이고 있던 사회자가 타이밍 좋게 치고 들어가 상황을 정리했다.
[“게임의 제한 시간은 10분. 타임 오버가 될 때까지 생존자가 남아 있거나 참가자 전원이 탈락할 경우 재대결을 펼치게 됩니다.”]
경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물러난 사회자가 휴대폰을 꺼내 타이머를 맞췄다.
[“자! 그럼 지금부터 3라운드, 민첩성 대결을 시작하겠습니다!”]
- “와!”
- “태주야! 1초 컷 가즈아!”
- “1초도 길다! 그냥 0.1초 만에 끝내 버려!”
결계 격파를 계기로 부쩍 늘어난 태주의 동갑내기 팬들이 당사자들보다 더 열을 올리고 있었다.
물론 태주가 염두에 둔 승리의 방식이 경쟁자들의 불만으로 인해 살짝 달라졌지만.
‘뭔가 단단히 착각하나 본데, 너희들은 점멸이 없어도 내 상대가 안 돼.’
- “무궁화 꽃이…….”
술래를 맡은 선배가 출발 신호에 맞춰 노래를 시작하자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아이들이 출발선 너머로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 “……피었습니다!”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뒤를 돌아본 술래가 예리한 눈빛으로 미세한 움직임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 “어! 너! 좀 전에 고개 움직였어!”
- “네?! 제가요?!”
허공에 떠 있는 얼음들을 피해 요상한 자세로 멈춘 참가자 한 명이 술래의 지적에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 벌써 첫 번째 탈락자가 나왔습니다!”]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기분 좋게 스타트를 끊은 술래가 기습적으로 속도를 높여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 “어! 너랑! 너! 딱 걸렸어!”
마음이 급했던 참가자들이 초반부터 실수를 연발했다.
- “어? 근데 왜 태주는 안 하지?”
- “태주야! 빨리 출발해!”
9조의 아이들이 출발선조차 넘지 않고 있는 태주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직 때가 아니야.’
관객들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태주는 다른 경쟁자들의 플레이를 느긋하게 관망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우려대로 점멸 한 번이면 술래의 등에 바짝 다가설 수 있었지만, 점멸에 대한 의존도가 크다는 인상을 주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색다른 전략으로 경기를 지배할 작정이었다.
[“그래도 아직 얼음에 닿은 사람은…… 아! 말씀드리는 순간, 빙결 효과에 걸린 참가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술래와 얼음은 물론 장애물까지 신경 써야 되는 삼중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데요!”]
시간이 흐를수록 술래를 향해 가는 길이 험난해졌다.
잠시 후.
- “야, 이걸 어떻게 통과하지?”
- “그러게. 이건 뭐, 얼음 축제에 온 것도 아니고.”
- “이 정도 됐으면 그냥 타임 오버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은 사람들끼리 재경기를 하는 게 낫지 않아?”
얼어붙은 동료들이 명절을 맞이한 고속도로처럼 생존자들의 앞길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었다.
바로 그때.
- “무궁화 꽃이…….”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미동조차 없던 태주가 눈 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피었…… 어이 씨! 뭐야!”
발이 묶인 아이들의 모습에 마음을 놓고 있던 술래가 태주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 “와! 대박!”
- “태주가 너무 쉽게 끝내서 나머지 애들이 좀 뻘쭘하겠는데?”
태주의 무난한 승리를 예상한 아이들이 술래가 등을 보이기만을 마음 편히 기다렸다.
- “무궁화 꽃이…….”
패배를 직감한 술래가 스티커를 뗄 시간을 허락하며 천천히 노래를 부르던 바로 그때.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 “어! 뭐야!”
다음 라운드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출발 지점으로 돌아간 태주의 돌발 행동에 두 눈을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