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새터 (16)
- “어! 허창민이면 그 S급 전사?!”
- “신태주만 아니었으면 수석을 차지했을 괴물 중의 괴물이지.”
- “근데 걘 원래 고등학교 때부터 전국구였잖아. 태주는 입시 당일에 갑자기 떡상을 한 거고.”
- “그러니까 더 재밌을 거라는 거지. 왕좌를 되찾으려는 자와 더 공고히 하려는 자의 대결. 아무튼 팝콘각이니까 우린 밑에서 불구경만 하면 돼.”
- “뭐야, 그럼 허창민도 치유력만 빼고 다 나가는 거야?”
- “아니. 창민이는 전사라 근력과 방어력 부문만 나가기로 했어.”
- “딱 2개만? 태주는 궁수인데 다 나가잖아.”
- “뭐, 그렇기는 한데, 어쩌면 여러 종목에 도전하는 게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어. 특히 태주처럼 넘사벽스러운 이미지를 구축한 경우엔 더더욱.”
- “쉽게 말해, 한 종목이라도 우승을 놓치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거야? 무결점처럼 보이던 실력에 금이 가는 꼴이니까?”
- “어. 아마 태주를 바라보는 시선부터 달라질걸? ‘어? 태주가 다 잘하는 건 아니었네?’ 뭐, 이런 식의 뒷말도 나올 거고.”
- “근데 지금까지의 성적만 놓고 보면 허창민이고 뭐고 딱히 밀릴 것 같지 않던데.”
- “그야 모르지. 전사의 근력과 방어력이 궁수를 압도한다는 건 기정사실이니까.”
태주의 활약 여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학과장이 이 교수와 함께 강당으로 들어섰다.
“이 교수.”
“네, 교수님.”
한 발짝 뒤에 있던 이종도 교수가 학과장의 옆으로 다가가 걸음을 맞췄다.
“신태주에게 4학년 과목을 듣게 하고 싶다고?”
“네. 이번 학기에 맡은 던전 실습1에 태주의 자리를 추가시켜주셨으면 합니다.”
이 교수가 학과장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던전 실습이라…… 글쎄. 선행학습치곤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어차피 졸업만 하면 지겹도록 드나들 곳인데. 사회에 나간 제자들이 괜히 학부시절을 그리워하는 게 아니야.”
학과장이 이 교수의 의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던전에 들어가 본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의 수업 태도는 하늘과 땅 차이 아니겠습니까? 뭐, 지적하신 대로 시기가 좀 이르긴 하지만, 태주처럼 뛰어난 학생이 일반적인 커리큘럼을 따라가는 것도 좀 재능 낭비인 것 같아서요.”
큰 이견이 없는 한 학과장의 지시에 순응하던 이 교수지만, 이번만큼은 쉽게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내가 자네에게 태주의 지도를 맡긴 건 성장을 시키라는 게 아니라 다듬으라는 뜻이었네.”
걸음을 멈춘 학과장이 이 교수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네?”
태주의 성장 속도에만 집중하고 있던 이 교수가 학과장의 진의에 두 눈을 끔뻑였다.
“자네 혹시 화초를 길러본 적 있나?”
“아니요.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은 화초를 죽이는 건 무관심이 아닌 과도한 애정이네.”
“…….”
눈치 빠른 이 교수가 학과장의 날카로운 비유에 말문이 막혔다.
“화초에 물을 주는 건 당연하지만, 과습은 오히려 뿌리를 썩게 하는 법이지.”
“교수님…….”
“암매와 대나무의 높이가 정해져 있듯, 크게 자랄 아이라면 자네가 기를 쓰지 않아도 성장을 멈추지 않을 걸세.”
학과장이 진중한 목소리로 이 교수를 회유했다.
“우리의 역할은 그저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거라네. 어린 수목이 삐뚤어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지주목처럼 말이야.”
이 교수의 한쪽 어깨를 가볍게 움켜쥔 학과장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줄이 좀 안 맞는 거 같군.”
귀빈석으로 향하던 학과장이 손을 몇 번 휘젓자 대충 펼쳐 놨던 의자들이 정교하게 정렬됐다.
“저, 한중연 교수님.”
발길이 떨어지지 않던 이 교수가 비장한 눈빛으로 학과장을 불렀다.
“오랜만이군. 자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게.”
또 한번 발걸음 멈춘 학과장이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이 교수를 돌아봤다.
“나와 대립각을 세울 때만 나오는 전조 현상이던데…… 그래. 아직도 생각이 바뀌지 않은 건가?”
“이번 경연을 보시고 판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번 경연?”
“네. 태주가 치유력을 제외한 모든 종목에 참가할 거란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장기자랑의 평가요소들은 모두 헌터에게 필요한 기본 덕목들입니다. 물론 앞서 말씀하신 대로 성장에만 집중하는 건 교육자로서의 도리가 아니지만, 그 대상이 군계일학을 넘어 만인지상의 잠재력을 지닌 인물이라면, 한 번쯤 예외를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결례를 무릅쓴 이 교수가 학과장이자 업계의 대선배인 한중연에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더구나 수업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게이트는 고작 E등급입니다. 현직 헌터들도 등한시하는 입문자용 던전에 들어가 새로운 검증을 받다보면, 오히려 교수님께서 원하시는 성장의 방향성을 정하는데 더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겁니다.”
“…….”
이 교수의 설득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으음. 이번에도 반대를 하면 돌아가는 버스에서까지 날 괴롭히겠군.”
이 교수의 고집을 아는 학과장이 합의점을 찾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꿨다.
“좋아. 자네가 제안한 대로 경연의 결과를 지켜본 후에 판단하도록 하지. 어차피 4학년들 틈에서 버티려면 기본기가 중요하니까.”
“교수님…….”
학과장의 승낙에 감동한 이 교수가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이려던 바로 그때.
“단.”
학과장이 타협안 말미에 조건 하나를 추가했다.
“민주엽보다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한 더 이상의 월반 교육은 받아들이지 않겠네.”
형평성을 중시하는 학과장이 이 교수에게 만만치 않은 숙제를 던져줬다.
“교수님! 민주엽은…….”
당황한 이 교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학과장에게 다가갔다.
“알고 있네. 민주엽이 얼마나 대단한 학생인지.”
25기의 수석 합격자이자 S급 어쌔신인 주엽은 태주의 동기가 된 A급 어쌔신 대엽의 친형이었다.
“하지만 자네 입으로 이미 언급하지 않았나. 군계일학을 넘어 만인지상의 잠재력을 지닌 인물이라고. 설마 민주엽도 넘지 못한 재능으로 날 설득하려는 건 아니겠지?”
학과장은 역시 호락호락한 위인이 아니었다.
물론 태주에 대한 악감정이 남아 있는 건 아니었지만, 특혜에 민감한 성격인 만큼 모두를 납득시킬 만한 결과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이 교수가 태주에 대한 확신 하나로 학과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 그럼 자네가 요구한 대로 한 자리를 열어주겠네. 물론 잠시 후에 있을 경연에서 납득할 만한 결과물을 보여준다는 조건 하에 말이야.”
“감사합니다, 교수님.”
심사의 기회를 얻은 이 교수가 학과장의 뒷모습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
*
*
[“28기 준비됐습니까!”]
공식 MC로 굳어진 학생회 선배가 신입생들을 향해 목이 터져라 외쳤다.
- “네!”
[“어? 목소리가 왜 이렇게 작지? 아직 절반밖에 안 왔나? 자!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28기! 준비됐습니까!”]
분위기를 띄우려는 사회자가 능청스러운 연기와 함께 더 큰 호응을 유도했다.
- “네!!!”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아이들의 사자후가 강당 전체를 뒤흔들었다.
[“네! 좋습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인 장기자랑 순서로 들어가 볼 텐데요. 응원상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자신의 조원이 나가서 활약을 한 땐 큰 목소리로 힘을 보태주시기 바랍니다. 아시겠죠?”]
- “네!!!”
[“어! 목소리가 제일 컸던 1조에게 먼저 응원 점수 10점을 드리겠습니다.”]
- “이야!”
참여도를 높이기 위한 사회자의 능숙한 광역 도발에 아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우리 조가 더 컸어요!”
- “7조도요!”
[“와…… 점점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는데요. 이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 첫 번째 종목인 맨몸 결계 격파로 들어가겠습니다. 자! 근력왕이 되고 싶은 지원자들은 지금 당장 무대 위로 올라와 주세요.”]
사회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참가 희망자들이 뛰어나왔다.
- “신태주 파이팅!”
다른 조에 속한 임세준이 조원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태주를 응원했다.
[“와 첫 경기부터 정말 많은 도전자들이 자리해주셨는데요. 마음 같아선 모든 참가자들의 각오를 들어보고 싶지만, 시간 관계상 눈에 띄는 후배님 딱 두 분 정도만 모셔서 인터뷰를 진행하겠습니다.”]
지원자들의 얼굴을 쭉 한 번 훑어본 사회자가 마음속으로 태주와 창민을 지목했다.
[28기 허창민 (S급 전사)]
[“우선, 허창민 선수, 첫 번째 경기의 승자는 누가 될 것 같습니까?”]
창민의 이름표를 확인한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이대며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다.
“제가 될 것 같습니다.”
창민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아니, 자신 있게 말했다.
자신의 실력을 과대평가할 때 나오는 뻔뻔함과 달리, 자신감은 확신에 근거한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 “오!”
창민의 발언을 들은 아이들이 일제히 태주가 있는 곳을 돌아봤다.
‘여전히 자신만만하네.’
태주는 동기들을 기죽이던 허창민의 우월한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자신의 능력이 허창민을 압도한다는 사실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아! 신입생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이 패기! 자, 이렇게 되면, 그분의 인터뷰를 안 들어볼 수가 없는데요.”]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 흥행을 유도하려는 사회자가 태주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마이크를 넘겼다.
[“신태주 선수. 허창민 선수가 승자를 묻는 질문에 ‘제가 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1등의 자리를 양보할 의향이 있습니까?”]
“아니요. 제가 됩니다.”
태주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아! 신태주 선수가 더 강력한 멘트로 응수합니다!”]
- “오!”
두 사람의 신경전에 소름이 돋은 아이들이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의미상 ‘제가 될 것 같습니다’와 ‘제가 됩니다’는 확신의 정도가 다른데요. 자!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로 밝혀질지. 교수님, 그럼 결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사회자가 90도 가까이 허리를 굽히자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학과장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양팔 간격보다 조금 더 넓게 떨어져라.”
도전자들을 통제한 학과장이 무대 앞으로 다가가 결계 마법을 시전했다.
[“어! 지금 막 참가자들의 발밑에 마법진이 그려졌습니다!”]
옆으로 물러나 있던 사회자가 무대 위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아! 이번엔 유리컵을 엎어놓은 듯한 결계가 마법진 위로 생성됐는데요!”]
“…….”
두께감이 느껴지는 투명한 막에 둘러싸인 태주가 말없이 학과장을 응시했다.
‘납득할 만한 결과물이라…….’
이 교수로부터 학과장이 제안한 내용을 전해 들은 태주가 정성껏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럼 보여줘야지.’
▶ 스킬 『폭주』가 발동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