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새터 (15)
운동화, 휴대폰, 노트북, 카메라, 휴대용 게임기, 이어폰, 향수, 지갑, 백화점 상품권.
신입생들의 취향을 저격한 상품들이 하나씩 소개될 때마다 아이들의 가슴은 부러움에 미어지고 있었다.
- “아 저 노트북 저거 내가 알바해서 사려고 그랬는데.”
- “야, 나도 휴대폰 바꿀 때 다 돼서 약정 기간 확인하고 있었어.”
[“자, 이제 마지막 상품을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참고로 이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아주 특별한 물건인데요.”]
-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게 뭐가 있지?”
- “야, 근데 저런 설명이 들어가면 꼭 의미만 부여한 싸구려 물건이 나오지 않냐?”
- “네 말대로 사회자가 밑밥을 좀 심하게 까네.”
- “그래도 9개가 멀쩡했는데, 굳이 마지막 선물로 실망을 시킬까?”
- “하긴, 솔직히 태주가 싹쓸이를 해서 그렇지 원래는 여러 사람이 나눠 가질 줄 알았을 거 아니야. 그럼 상식적으로 특정 번호에만 이상한 상품을 배정했을 리가 없지. 안 그래?”
- “음…… 그 말도 일리가 있네.”
남의 선물에 왈가왈부하는 것도 우습지만, 협찬의 퀄리티가 워낙 높다 보니 들러리가 된 상황에서도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한국대 의류학과 출신이자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수진 선배님께서 특별히 디자인하신 리미티드 에디션 과잠입니다.”]
‘나왔다.’
태주가 기다리던 진짜배기가 종이 속에서나마 그 모습을 드러냈다.
- “뭐? 과잠? 학과 잠바 그거 그냥 5만 원이면 사는 거 아니었어?”
- “야, 디자이너가 만든 리미티드 에디션이라잖아 리미티드 에디션.”
- “종이가 너무 작아서 잘은 안 보이는데, 뭔가 선배들이 입고 있던 거랑 다른 거 같긴 하네.”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이들이 가늘게 뜬 눈으로 유심히 종이를 들여다봤다.
‘5만 원 같은 소리하고 있네.’
태주가 잠재적인 가치를 모르는 아이들의 일차원적인 대화에 코웃음을 쳤다.
사실 세계적인 디자이너 반열에 오를 하수진이 제작한 처음이자 마지막 과잠이라는 희소성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한정판 과잠의 진짜 위력은 버프에 있었다.
자신의 소속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약간의 보온성 정도만 가지는 일반적인 과잠과 달리 한정판 과잠엔 학과장님을 비롯한 여러 법사 교수님들의 버프가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로라하는 방어구 장인들까지 참여하여 완성도를 높였는데, 생각보다 공이 많이 드는 바람에 이번 작품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한정판은 제작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유일무이.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버프형 과잠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태주가 차지한 것이다.
[“특히 이 과잠엔 아주 특별한 비밀이 숨어 있는데요. 그건 바로 방어구에서나 볼 법한 각종 버프들이 무려 11개나 붙어 있다는 겁니다.”]
- “뭐?! 과잠에 버프가 걸려 있다고?! 그것도 11개씩이냐?! 그게 말이 돼?!”
- “이런 미친! 앞에 나온 선물들은 그냥 애피타이저였어!”
- “저거 입고 돌아다니면 진짜 개간지겠다!”
과잠의 진가를 뒤늦게 알게 된 아이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이제야 알았냐?’
애초에 10번이 목표였다면, 언제든지 살 수 있는 나머지 9개의 선물을 동기들에게 양보할 수도 있었지만, 태주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최단거리까지 체크해가며 악착같이 보물을 찾아냈는데, 태주가 상생이 아닌 독식을 선택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익숙함의 무서움.
아직은 믿을 수 없는 결과물을 낼 때마다 의심을 받고 해명을 해야 했지만,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자연스럽게 수긍을 하게 되고, 나아가 왠지 모를 기대감마저 갖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체 정화 기능으로 인해 세탁이 필요 없으며, 타인이 입으면 버프가 발생하지 않는 도난 방지 기능까지 들어가 있습니다.”]
- “와…… 왜 돈이 있어도 못 산다고 했는지 이제야 알겠네.”
- “과잠치고는 쓸데없이 고퀄인데?”
- “저런 거 입고 소개팅 나가면 여자들이 좋아할까?”
- “글쎄. 얼굴 버프가 없으면 뭐.”
혁신에 가까운 과잠의 진화에 다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 “저, 선배님!”
과잠에 눈독을 들이던 신입생 한 명이 사회자를 부르며 번쩍 손을 들었다.
[“네, 말씀하세요.”]
- “그 과잠은 단체로 맞출 수 없나요?”
- “맞아요. 저희들도 입게 해주세요.”
- “솔직히 저희는 찾을 기회도 없었잖아요.”
비슷한 마음을 품고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목소리를 높였다.
[“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안 됩니다.”]
아이들의 열화와 같은 청원을 듣고 있던 사회자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 “왜요?”
[“제작에 참여하신 분들께서 다시는 안 하겠다고 하셨거든요. 너무 손이 많이 간다고…… 아마 이번에 제작된 과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겁니다.”]
- “…….”
거창한 명분을 예상했던 아이들이 인간미가 묻어나는 거절 사유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 “그냥 힘들어서 안 된다는데?”
- “난 또다시는 재연하지 못할 엄청난 사연이라도 숨어 있는 줄 알았네.”
[“어…… 1시간이나 일찍 끝나서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다들 새벽까지 달려서 피곤할 테니까 일단 방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모이는 걸로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신태주 학생은 사이즈 체크를 해야 되니까 따로 좀 남아주세요.”]
강당에 걸린 커다란 벽시계를 확인한 사회자가 아이들을 통제하며 오후 일정을 마쳤다.
“네.”
동기들이 나가기만을 기다리던 태주가 점멸이 아닌 두 발로 사회자에게 다가갔다.
“어? 지금은 그냥 오네?”
마이크를 끈 사회자가 테이블 위를 정리하며 물었다.
“바쁠 게 없어서요.”
미소를 머금은 태주가 조용히 일을 거들어 주며 말했다.
일종의 이미지 관리.
실력과 인성을 겸비한 후배는 선배들로부터 인정을 받지만, 두 가지 요소가 반비례하는 순간, 학교생활의 난이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어? 나 혼자 해도 되는데.”
더구나 몇 시간 후에 있을 최고의 신입생 선발에서도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가 큰 입김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어제 동아리 소개하는 거 봤어?”
선배가 어제 오후에 있었던 공식 행사를 언급하며 자연스럽게 운을 뗐다.
“네.”
선배의 의도는 이미 눈치챘지만, 대화를 앞서 나갈 생각은 없었다.
‘벌써부터 영업인가?’
대학생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동아리의 종류엔 타 대학과 연계가 되어 있는 전국구 단위의 연합 동아리와 같은 학교 학생이라면 학과와 상관없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중앙 동아리, 그리고 유사 계열의 학과들이 모인 단과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단대 동아리와 특정 학과의 학생들만 들어갈 수 있는 학과 동아리가 있었다.
물론 단대 동아리와 학과 동아리의 구분이 없는 경우도 있었고, 동아리의 규모보다 더 작은 소모임들도 존재했지만, 무엇을 선택하든 그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존재했다.
“그럼 어제 내가 홍보 공연한 것도 봤겠네?”
태주에게 말을 건 선배는 학생회의 구성원이자 헌터학과 축구 동아리, ‘축알못’의 주축 멤버였다.
“아, 그 볼 트래핑이랑 미니 게임하신 거요.”
맞장구를 쳐주곤 있었지만, 태주는 축구 동아리에 들 마음이 전혀 없었다.
헌터학과의 경우 다른 학과와 달리 하나 이상의 학과 동아리를 필수적으로 가입해야 되는데, 친목 이외의 메리트가 없는 곳은 최대한 거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 기억하네?!”
태주를 신입 부원으로 맞으려는 선배가 별 거 아닌 대답에도 반색을 하며 반응했다.
“난 또 다들 꾸벅꾸벅 졸고 있길래 당연히 못 본 줄 알았지.”
학부시절 태주는 헌터학과 여행 동아리, ‘무박2일’의 존재감 없는 회원이었다.
아싸였던 태주는 다른 동아리에 비해 친목의 기회가 많은 무박 2일을 기회의 땅으로 삼았었는데, 불행하게도 같은 부원이었던 추균성에 의해 흑역사만 남긴 뒤 발길을 끊게 되었다.
물론 그런 태주의 안부를 묻거나 참석을 강요하는 연락이 한 통도 없었다는 게 더 충격적인 결말이었지만.
“아까 보니까 운동 신경은 말할 것도 없고 매사에 적극적인 태도로 임하는 것 같은데, 이왕이면 우리 축구 동아리에 안 들어올래?”
“네? 축구 동아리요?”
갈수록 연기가 늘고 있는 태주가 모른 척 눈썹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우리 동아리가 인원수도 많고 목적이 순수해서 친목을 다지기엔 더할 나위 없거든. 모름지기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함께 땀도 흘리고 살도 부대껴야 더 친해지는 맛도 있고.”
“아…… 네.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선배의 면전에서 단칼에 거절하는 건 자칫 어색함을 유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대답을 미루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어, 그래. 근데 내가 너한테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고, 가입을 강요하는 건 더더욱 아니니까 그냥 ‘아 이런 동아리도 있구나’라는 정도만 기억해줘.”
다행히 선배의 태도는 고압적이지 않았다.
물론 후배라고 해서 다 같은 후배는 아니었지만.
사실 선배들이 태주보다 앞설 수 있는 건 생년월일밖에 없었다.
세계 최초의 매직 아처, 게이트를 경험한 적이 없는 최초의 2차 각성자, 대형 길드에 속한 S급 헌터를 실력으로 찍어 누르는 압도적인 피지컬의 소유자 등등.
개인적인 이유만 열거해도 입이 아플 정도였지만, 협회장과 총장님은 물론 네임드 길드의 대표들로부터 총애를 받고 있는 태주의 막강한 황금 인맥 역시 선배 노릇을 주저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아 참, 사이즈 체크하려고 부른 거였지?”
태주의 확답을 얻어내는 데 실패한 선배가 민망함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
*
*
- “하암. 야, 좀 자니까 개운하지 않냐?”
- “와…… 내가 이 시간에 낮잠을 다 자다니. 확실히 대학에 오니까 좋긴 좋네. 지긋지긋한 야자도 없고.”
저녁 식사도 거르고 잔 신입생들이 하품을 하며 하나둘 강당으로 모여들었다.
- “뭐, 한 것도 없는데, 벌써 내일이 끝이네.”
- “그러게. 2박 3일이라고 해서 엄청 지루할 줄 알았는데.”
- “그나저나 태주 얘기 들었어?”
- “태주가 또 왜?”
- “이번에 할 장기자랑 있잖아. 그 종목 별로 나가서 대결하는 거.”
- “어, 알지.”
- “9조에 있는 애가 그러는데, 힐러만 참가할 수 있는 치유력 부문만 빼고 다 나가기로 했대.”
- “뭐?! 나머지 4종목을 다?!”
- “근력, 방어력, 민첩성에 행운까지…… 심지어 참가 신청도 제일 먼저 했다는데, 문제는 이번 프로그램에 걸린 상품이 제일 크다는 거야.”
- “뭐야! 그럼 한정판 과잠보다 더 좋은 선물이 있다는 거야?!”
- “술롱도르나 보물찾기는 학생회에서 주최한 행사라 학과장님이나 교수님들은 참석을 안 했던 건데, 이건 신입생들의 능력을 간접적으로 평가해보는 자리라 100% 참석에 협찬 수준도 차원이 다르대.”
- “와…… 대체 뭘 주려고 그러는 거지?”
- “글쎄. 근데 잘은 모르겠지만, 이번만큼은 태주도 쉽지 않을걸?”
- “어? 왜?”
- “천재에게 가려진 수재가 반전을 꾀하고 있거든.”
- “뭐? 천재에 가려진 수재?”
- “우리 조에 한 명 있어. 허창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