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새터 (8)
술롱도르 수상자인 추균성은 태주의 흑역사를 제조했던 28기 최고의 주당이었다.
물론 회귀와 동시에 태주의 흑역사를 기억하는 이들도 사라졌지만, 당시엔 필름이 끊긴 태주의 굴욕적인 사진이나 영상들이 단톡방에 공유되곤 했었다.
차는 없지만, 혈중 알코올 농도가 늘 면허 취소 수준이었던 술의 화신 추균성에 의해…….
‘오늘은 네 차례다.’
50% 할인 혜택과 최고급 회복 포션도 좋지만, 무엇보다 필름이 끊긴 균성의 흐트러진 모습을 찍어 동기들에게 공유하는 것이 태주의 진짜 목적이었다.
- “어? 신태주다.”
학생회 방에 있던 선배들이 태주의 등장에 술렁였다.
[28기 신태주 (S급 매직 아처)]
태주의 존재감은 목에 걸린 이름표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했다.
“혹시 술롱도르 때문에 온 거야?”
식탁에 앉아 참가 신청을 받고 있던 선배가 의외라는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우리상조 대표로 왔습니다.”
‘다 뒤졌어.’
비장함이 얼굴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마력이 경쟁자들로 하여금 마른침을 삼키게 했다.
- “에이 씨, 괜히 한다고 그랬나?”
- “선배님, 진짜 죄송한데, 참가 신청을 취소할 수도 있나요?”
심지어 가벼운 마음으로 도전하려던 아이들이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 “어차피 1등도 못할 거 속만 버릴 순 없지.”
- “근데 참가는 안 해도 구경은 할 수 있지 않나?”
맞붙을 자신은 없지만, 다들 태주의 주량을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우리상조면 9조?”
“네.”
“어…… 접수는 됐으니까 일단 이거부터 받아.”
태주의 이름을 참가자 명단에 기입한 선배가 식탁 위에 놓인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무심히 건넸다.
“웬만하면 시작하기 전에 마셔둬. 필름 끊겨서 여기저기 토하고 다니면 우리가 더 피곤해지니까.”
비닐봉지 안엔 속을 보호하기 위한 위장약과 숙취 해소제 등이 종류별로 들어 있었다.
“아, 그리고 그 봉지는 토할 때 쓰라고 준 거니까 빈병이랑 같이 버리지 말고, 따로 가지고 있어.”
선배가 태주의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
말없이 내용물을 들여다보던 태주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요. 전 됐습니다.”
태주가 손에 든 봉지를 식탁 위에 도로 내려놨다.
오직 주량으로만 상대를 굴복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
순도 높은 승리를 바라는 태주의 입장에선 약의 힘이 컸다는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뭐야, 너 혼자 핸디캡을 안고 가겠다는 거야?”
내막을 알 리 없는 선배의 눈엔 태주의 결정이 허세처럼 비춰졌다.
“본게임에 들어가면 바로 후회할 텐데?”
선배가 시작부터 초강수를 둔 태주의 선택을 다시 한번 회유했다.
“아니요. 그냥 하겠습니다.”
- “오!”
주변에 있던 선배들이 태주의 패기에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다.
- “뭐야, 끝까지 버틸 자신이 있다는 거야?”
- “와…… 초장부터 세게 나오는데?”
- “야, 근데 우리 때도 저런 애 있지 않았었냐?”
- “있었지. 위장에 구멍 난 거 같다고 하도 난리 쳐서 선배들이 힐까지 해줬잖아. 복도에 피자만 몇 판씩 만들고 다니고.”
- “그래도 신태주는 좀 다르지 않을까? 그때 걘 S급이 아니라 A급이었잖아.”
- “뭐, 그럴 수도 있긴 한데, 스피리터스가 워낙 근본 없는 술이라.”
스피리터스는 알코올 함량 96%의 보드카이자 세계에서 가장 독한 증류주였다.
- “하긴, 라벨에 적힌 96%가 토할 확률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태주가 후회할 것이란 쪽으로 선배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 뭐, 선택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지는 거니까.”
태주의 뜻을 받아들인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등록한 애들은 다 옆방에 모여 있으니까 일단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네.”
참가 신청을 마친 태주가 선배들의 우려 속에 학생회 방을 나섰다.
*
*
*
- “야, 맥주는 싱겁고 배만 부르지 않냐?”
- “소주도 그냥 음료수야 음료수.”
술롱도르를 노리는 아이들이 허세 가득한 잡담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주량을 과시하고 있었다.
“…….”
시합 장소로 들어선 태주가 경쟁자들의 얼굴을 빠르게 스캔했다.
‘강의 시간에 술 냄새 풍기던 새끼들은 다 모여 있네.’
이미 4년을 지켜본 녀석들이라 개개인의 주량은 물론 예상 순위까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 “어! 신태주다!”
태주를 본 동기들의 반응도 선배들과 다르지 않았다.
- “와…… 마력이 세서 그런가? 방 안의 공기가 훨씬 묵직해졌는데?”
- “그러게. 고작 사람 한 명 추가된 건데, 확실히 느낌이 다르네.”
학생회 방에 있던 선배들도 태주에게 비슷한 느낌을 받았지만, 자존심상 티를 내지 않은 것뿐이었다.
- “어? 근데 넌 왜 빈손이야?”
- “선배들이 까먹고 안 줬나?”
- “따로 인벤토리에 넣어둔 거 아니야?”
숙취 해소제를 들이붓던 아이들이 태주의 허전한 손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바로 그때.
“아니.”
태주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28기 추균성 (A급 전사)]
‘추균성…….’
“얜 그냥 일부러 안 받은 거래.”
뒤이어 들어온 균성이 태주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 “뭐?! 일부러?! 왜?!”
균성의 말에 아이들이 술렁였다.
“왜긴 왜야. 오직 주량으로만 승부하겠다는 거지. 안 그래?”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균성이 태주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느끼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나도 안 받았어.”
- “넌 또 왜?”
균성의 주량을 모르는 참가자들이 또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술에서만큼은 누구한테도 지고 싶지 않거든. 그게 설령 세계가 주목한 S급 매직 아처라도.”
균성이 태주의 이름표를 손바닥으로 토닥였다.
“그럼 좀 이따 봐. 난 술 먹기 전에 꼭 화장실을 가야 돼서.”
어깨동무를 푼 균성이 바지 지퍼를 내리며 화장실 문을 열었다.
‘술부심은 여전하네.’
즐기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여유로운 표정.
대결이 코앞이었지만, 승리를 확신한 균성의 얼굴에선 그 어떤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방심이 불러올 대가는 생각보다 비참하겠지만.
*
*
*
잠시 후.
진행을 맡은 2학년 선배가 블루투스 마이크를 켰다.
[“아직 안 온 사람 없지?”]
- “네!”
둥그렇게 모인 15명의 참가자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이야 대답 소리가 아주 시원시원하네.”]
흡족한 표정의 사회자가 스피리터스 한 병을 집어 들었다.
[“자, 이게 바로 너희들이 마시게 될, 아니, 너희들을 마셔버릴 아주 무서운 녀석이야. 혹시 처음 본 사람?”]
몇몇 아이들이 사회자의 질문에 조용히 손을 들었다.
[“오 생각보다 꽤 있네?”]
스피리터스의 뚜껑을 연 사회자가 손을 든 아이의 코앞에 술병 입구를 들이댔다.
- “읍!”
아무 생각 없이 코를 킁킁거린 아이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황급히 상체를 내뺐다.
- “어우 씨.”
그 향이 어찌나 독한지 선배들이 있음에도 절로 욕이 나왔다.
- “와 이거 장난 아니야!”
냄새만으로도 질겁한 녀석이 동기들을 붙잡고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자, 다들 봤지?”]
- “…….”
동기의 격한 반응에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긴장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허수 거르기를 할 거니까 포기할 사람들은 조용히 뒤로 빠져.”]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술 냄새를 맡아본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전 깔끔하게 포기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제 14명 남은 거다.”]
사회자가 다른 지원자들에게도 일일이 냄새를 맡아보게 했다.
- “야, 이거 그냥 알코올램프 아니냐?”
- “와…… 냄새만 맡았는데도 코로 술을 마신 거 같아.”
결국 3명의 포기자가 추가로 발생했다.
[“이제 11명 남았다.”]
쭉정이를 가려내기 위한 두 번째 방식은 살짝 맛을 보게 하는 것이었다.
[“자, 일단 한 잔씩들 받아.”]
작은 시음용 종이컵을 받아든 아이들이 1/2정도만 채워진 스피리터스를 조심스럽게 마셔보았다.
- “푸!”
겁도 없이 한 번에 털어 넣은 녀석이 제일 먼저 술을 뿜어냈다.
- “우웩!”
- “컥!”
간신히 삼킨 녀석들마저 혓바닥을 늘어뜨리며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 “와, 대박! 마시자마자 술이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느껴져. 지금은 딱 여기.”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아이가 술이 내려가는 경로를 검지로 가리켰다.
- “야, 술에 입술만 갖다 대도 따갑지 않냐?”
- “하…… 난 지금 입안에 성게를 물고 있는 거 같아.”
시음을 마친 대부분의 신입생들이 스피리터스의 위력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 “선배님, 전 여기서 도전을 멈추겠습니다.”
- “예. 저도 너무 경솔했던 것 같습니다.”
냄새만 맡았을 때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백기를 들었다.
[“그럼 이제 딱 6명 남은 거네?”]
도전자의 약 2/3가 시작도 하기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자, 이제 본격적인 대결을 시작할 거니까 최후의 도전자들은 저쪽 벽에 등을 대고 앉아.”]
- “네!”
태주와 균성을 포함한 6인의 술롱도르 후보가 벽을 등진 채 일렬로 앉았다.
[“준비됐어?”]
- “네!”
[“좋아. 그럼 이제 규칙을 설명해 줄게.”]
- “와, 이제 시작하나 보다.”
- “야, 안 보여 좀 비켜봐.”
방 안은 이미 구경을 하러 온 아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경기가 시작되면 너희들 앞에 놓인 소주잔에 술이 채워질 거야.”]
사회자의 설명이 진행되는 동안 선배들이 다가와 술이든 잔을 놓고 갔다.
[“자, 문제는 지금부터인데, 일단 6명 중에서 제일 먼저 잔을 비운 사람이 기준이야.”]
휴대폰을 꺼낸 사회자가 15초로 맞춰진 타이머 화면을 아이들에게 보여줬다.
[“1등이 나오는 순간 타이머가 작동하는데,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 술이 남아 있으면, 자동으로 탈락하는 거야. 어때. 크게 어렵진 않지?”]
- “네!”
[“오케이. 그럼 바로 간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사회자가 큰 목소리로 승부의 시작을 알렸다.
[“자! 28기 술롱도르의 주인공은 과연 누가 될지!”]
마음의 준비를 마친 태주가 자신의 앞에 놓인 소주잔을 집어 들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배틀을! 시작! 하겠습니다!”]
- “와!”
시작과 함께 엄청난 환호성이 쏟아졌다.
- “신태주 파이팅!”
- “추균성 이겨라!”
탁! 탁! 탁! 탁! 탁! 탁!
첫 잔을 비운 지원자들이 거의 동시에 잔을 내려놨다.
[“아! 이건 뭐,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속도입니다!”]
흥분한 사회자가 멘트를 이어가는 동안 선배들이 달려와 두 번째 잔을 채워줬다.
바로 그때.
▶ 패시브 스킬 『저항』이 발동되었습니다.
태주의 눈앞에 반가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 상태 이상(중독, 마비, 기절, 혼란, 수면) 공격의 대미지가 100% 감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