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새터 (2)
[“아, 아.”]
마지막으로 올라탄 9조 조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9조, 10조 아직 안 온 사람 없지?”]
- “네.”
[“하…… 목소리 크게 안 하냐?”]
9조 조장이 신입생들의 패기를 지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자, 9조, 10조 아직 안 온 사람 없지?”]
- “네!”
선배의 기선 제압에 바짝 긴장한 신입생들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난 9조의 조장을 맡은 27기 전우진이다.”]
저음이 인상적인 우진이 신입생들의 얼굴을 훑어보며 자신을 소개했다.
- “…….”
[“박수 안 치냐?”]
우진이 아이들의 소극적인 반응에 또 한번 인상을 구겼다.
- “와!”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신입생들이 우진의 한 마디에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자, 지금부터 너희들한테 목걸이 명찰을 나눠줄 거야.”]
우진이 자신의 목걸이 명찰을 들어 아이들에게 보여줬다.
[27기 전우진 (A급 전사)]
[“여기 보면, 이름부터 직업까지 다 적혀 있으니까 앞으로 2박 3일 동안 씻을 때 빼곤 무조건 걸고 다녀. 알았어?”]
- “네!”
[“만약에 거추장스럽다고 빼놓거나 병신처럼 잊어버리면, 그 조 전체가 집합이다.”]
- “네!”
[“자, 그럼 나눠줘.”]
우진이 신호를 주자 봉투를 들고 있던 각 조의 부조장이 통로로 나왔다.
“야, 태주야, 저 조장 새끼, 선배라고 졸라 가오 잡지 않냐?”
태주를 향해 몸을 기울인 김환이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나지막이 물었다.
‘슬슬 시작하는구나.’
“얼굴도 뭣같이 생겨가지고…… 야, 솔직히 저 새끼 정도는 네가 그냥 바르지 않냐? 막말로 넌 프로도 이겼잖아.”
태주를 떠보던 김환이 점점 비난의 수위를 높였다.
“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름표나 받아.”
태주가 선배의 험담을 유도하는 김환의 질문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이름이…….”
어느새 다가온 지희가 통로 쪽에 앉은 김환의 이름부터 물었다.
“김환이요.”
지희를 올려다보던 김환이 들키지 않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물론 지희의 시선은 태주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여기요.”
봉투 속을 뒤적거리던 지희가 무표정한 얼굴로 던지듯이 목걸이를 건넸다.
[28기 김환 (A급 무투가)]
다른 정보엔 거짓이 없었지만, 위장 신입생이 되기 위해 한 기수 낮은 이름표를 받았다.
‘와…… 이건 뭐, 헌터학과가 아니라 연극영화과네.’
두 사람이 동기라는 걸 아는 태주가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저는…….”
“알아.”
태주의 목걸이를 따로 빼놨던 지희가 수줍은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아, 감사합니다.”
태주가 지희의 손바닥 위에 놓인 목걸이를 살짝 집어 들었다.
[28기 신태주 (S급 매직 아처)]
‘내가 S급이라니…….’
이름표를 받아든 태주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E급 궁수라 적힌 목걸이를 맨 채 2박 3일을 버텼던 악몽 같은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픈 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지희가 자신의 이름표를 태주에게 보여줬다.
[27기 윤지희 (A급 힐러)]
“네.”
태주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목걸이를 걸었다.
“…….”
두 사람을 힐끗거리던 김환이 지희의 상반된 태도에 묘한 서운함을 느꼈다.
*
*
*
잠시 후.
초반 분위기 때문인지 버스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와…… 어떻게 장지 가는 버스보다 더 조용하지?”
혼잣말을 내뱉던 김환이 태주에게 말을 걸었다.
“태주야, 우리 심심한데 끝말잇기나 할까?”
“끝말잇기? 갑자기?”
창밖을 내다보던 태주가 김환을 돌아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진 사람이 딱밤 맞기. 어때?”
김환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검지를 튕겼다.
“그래. 뭐.”
태주가 김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오케이. 걸려들었어.’
태주의 인기가 부러웠던 김환이 속으로 전의를 불태웠다.
‘이마에 지문을 남겨주지.’
더구나 힘이라면 빠지지 않는 무투가라 더욱 자신이 있었다.
“자, 그럼 누구부터 할래?”
허공에 딱밤을 날리던 김환이 태주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냥 너부터 해.”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않는 태주가 쿨하게 선을 양보했다.
“어, 그래? 그럼 나부터 한다. 어…… 태권도!”
시작부터 공격할 수 없다는 암묵적인 룰에 따라 무난한 단어를 선택했다.
“도…… 도미노.”
“노? 지금 분명 노라고 했지? 그럼…… 노휵!”
흥분한 김환이 기다렸다는 듯 한방단어를 외쳤다.
종을 대하듯 천하게 다루며 키운다는 뜻을 지닌 노축의 원말이었지만, 오로지 끝말잇기를 위해 사용하는 단어라 딱히 방어할 방법이 없었다.
“뭐?! 휵?!”
태주가 김환의 일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없지! 없지! 3초 안에 못 하면 딱밤이다! 하나 둘.”
딱밤을 때릴 생각에 흥분한 김환이 숫자를 세며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다.
“셋! 자, 빨리 이마 대!”
첫 판을 가볍게 따낸 김환이 두 팔을 걷어붙였다.
“게임이니까 맞아도 원망하기 없기다.”
딱밤을 준비하던 김환이 먼저 뒤끝 없는 승부를 제안했다.
“알았으니까 빨리 때려.”
앞머리를 쓸어 올린 태주가 이마를 드러낸 채 눈을 감았다.
- “와…… 신태주가 딱밤을 다 맞네.”
- “그러게. 근데 왜 나까지 긴장되지?”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신입생들이 두 사람의 대결에 관심을 보였다.
- “야, 근데 태주가 환이의 딱밤을 버틸 수 있을까? 아까 보니까 김환은 직업 자체가 무투가던데.”
- “하긴, 궁수가 무슨 탱커도 아니고…… 솔직히 신태주가 맞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잖아.”
- “어? 듣고 보니 그러네.”
- “끝말잇기 실력이야 뭐, 비슷비슷하겠지만, 힘으로 보나 맷집으로 보나 딱밤은 궁수보다 무투가지.”
대부분의 아이들이 김환의 일방적인 우세를 점쳤다.
물론 아이들의 섣부른 예측이 태주의 자존심을 건드린 꼴이 됐지만.
‘이것들이 감히 나를…….’
원거리 딜러인 궁수가 육탄전에 불리한 건 사실이었지만, 태주는 평범한 궁수가 아닌 매직 아처였다.
【스탯】
[방어력: 34,600]
태주가 상태창을 열어 방어력을 체크했다.
“자, 그럼 간다.”
들뜬 표정의 김환이 태주의 얼굴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 “뭐야, 저렇게 때려도 돼?”
- “와…… 아주 작정을 했네.”
김환이 왼손으로 오른쪽 중지를 잡아당기자 곳곳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 “어떡하지…….”
남몰래 응원하던 지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힐을 준비했다.
- “어떡하긴 뭘 어떡해. 다 게임인데.”
반면 김환의 실력을 아는 우진은 흡족한 표정으로 태주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
“소리 내면 2대인 거 알지?”
잔뜩 힘이 들어간 김환의 중지가 태주의 이마를 정조준했다.
‘매직 아처고 나발이고, 이 선배가 한 수 가르쳐줄게.’
태주에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고 확신한 김환이 딱밤을 날리려던 바로 그때.
▶ 스킬 『폭주』를 사용하시겠습니까? (Y/N)
태주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붉은 점이 Y에 멈췄다.
▶ 스킬 『폭주』가 발동되었습니다.
순간, 태주의 모든 능력치가 5배로 급상승했다.
【스탯】
[방어력: 173,000]
물론 공격을 위한 근력 수치도 덩달아 상승했지만.
【스탯】
[근력: 56,000]
‘잘 봐라. 날 때리면 어떻게 되는지.’
태주가 감은 눈을 번쩍 뜨며 김환을 노려봤다.
- “뭐, 뭐야 이거!”
- “마, 마력이…….”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태주가 발산하는 엄청난 마력에 화들짝 놀랐다.
- “이, 이게 바로…… 매직 아처?”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우진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물론 이 상황이 가장 혼란스러운 건 태주를 상대하고 있는 김환이었지만.
“헉.”
중지를 부여잡고 있던 김환의 왼손이 당혹감에 스르륵 풀렸다.
톡.
지문을 남기겠다던 김환의 중지가 태주의 이마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더 세게 때려도 되는데. 처음이라 봐준 거야?”
승리의 미소를 머금은 태주가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김환의 손을 옆으로 치워냈다.
“어? 아, 아니야! 이건!”
당황한 김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효를 주장했다.
“이번 건 무효야 무효!”
- “저기요. 후배님.”
보다 못한 지희가 태주의 편을 들고 나섰다.
- “중지가 이마에 닿은 거 다 봤으니까 괜히 억지 부리지 마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하아…… 네.”
항의를 포기한 김환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평소 같으면 끝까지 우기고 들었겠지만, 지금은 지희의 동기가 아니라 신입생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자, 그럼 이번엔 나부터 시작한다.”
기회를 잡은 태주가 승부를 이어갔다.
“으음. 장소.”
“장소? 소…… 소화기!”
‘그래. 이기면 된다. 이기면…….’
수세에 몰린 김환이 마인드컨트롤을 하며 불안감을 떨치려 했다.
- “와……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지?”
- “태주가 이번에 이기면 진짜 볼만하겠다.”
- “야, 환이 표정 보이냐? 거의 뭐, 울기 직전인데?”
- “풉! 그러게.”
게임이 진행될수록 태주의 반격을 기대하는 아이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기…… 기…….”
한방단어를 떠올리던 태주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 3초 안에 못하면 지는 거다! 하나 둘.”
이때다 싶었던 김환이 손가락을 접으며 초읽기에 들어갔다.
바로 그때.
“세에…….”
덥석!
태주가 김환의 굽어가던 중지를 움켜쥐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기. 쁨.”
- “야, 쁨은 진짜 없는데?”
- “솔직히 노휵은 좀 치졸했는데, 기쁨은 완전 인정.”
숨죽이며 지켜보던 아이들이 태주의 한 방 단어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자, 3초 센다.”
이번엔 태주가 손가락을 접을 차례였다.
“하나 둘.”
“쁨. 쁨. 쁨. 쁨…… 하아…….”
두뇌를 풀가동하던 김환이 결국 고개를 떨어뜨렸다.
“셋. 내가 이겼지?”
반격에 성공한 태주가 최후의 미소를 지었다.
- “와!”
태주의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 “신태주! 어이! 신태주! 어이! 신태주! 어이!”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들이 태주의 이름을 연호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자, 게임이니까 맞아도 원망하기 없기다.”
두 팔을 걷어붙인 태주가 김환이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태주야, 내가 너 살살 때렸던 거 알지?”
김환이 태주의 손목을 붙잡으며 자비를 구했다.
“알았으니까 빨리 이마나 까.”
“진…… 진짜?”
김환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앞머리를 올렸다.
“네가 아까 이렇게 때렸었나?”
자리에서 일어난 태주가 김환의 얼굴에 오른손을 밀착시켰다.
- “야, 이러다 환이 이마 작살나는 거 아니야?”
- “김환 오늘 뚝배기 깨지나요!”
- “환 뚝배기 하실래예!”
통로로 나온 아이들이 태주의 주변으로 둥그렇게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