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입학시험 (1)
뭐야, 이거 맛이 왜 이래?
뒷맛이 너무 불쾌해 화장실로 달려갔다.
수돗물로 연거푸 입을 헹궜지만,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기분 탓인지 목도 따갑고, 배도 사르르 아프다.
내가 지금 뭘 처먹은 거지?
더 늦기 전에 속부터 게워내야겠다.
우웩!
변기에 얼굴을 대고 모든 걸 쏟아냈다.
썩을.
변기 안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피를 토하는 노력을 이런 식으로 경험하는 건가?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편-안이라고 찍힌 문구가 편-안하게 가라는 뜻인가?
눈꺼풀이 왜 이렇게 무겁지?
대부분의 헌터들은 화장실이 아닌 던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변기를 붙잡고 죽긴 싫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바지라도 입을 걸 그랬다.
하…… 죽는 마당에 별게 다 신경 쓰이네.
철퍼덕!
*
*
*
“으아악!”
굳었던 입술이 풀리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학생, 괜찮아?”
뭐지? 화장실이 아니라 택시 뒷좌석에 타고 있다.
“간밤에 잠을 설쳤나 보네.”
기사님이 룸미러로 내 얼굴을 힐끗거린다.
“하긴, 다른 데도 아니고 한국대 헌터학과면 떨릴 만도 하지.”
뭐? 한국대 헌터학과?
주머니를 뒤지니 고3 때 쓰던 휴대폰이 나왔다.
와…….
화면에 찍힌 날짜가 입학시험 당일이다.
말도 안 돼.
죽음과 동시에 과거로 돌아왔다.
“학생, 여기가 바로 정문이야. 한번 내다봐.”
기사님이 뒷좌석 창문을 친절하게 내려줬다.
4년간 지겹도록 드나든 곳인데.
“아, 고등학교 때처럼 정문에서 내리면 안 돼.”
기사님이 대단한 비밀인 양 신나게 설명했다.
“한국대학교 캠퍼스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거든. 안으로 한참 들어가야 되니까 왜 안 세워 주냐고 물어보지 마.”
“아, 네.”
“근데 학생은 한국대 말고 또 어디 어디 지원했어?”
“네? 아, 전 여기만 지원했는데요.”
“뭐? 여기만? 왜?”
이상하게 여기는 게 당연했다.
헌터학과는 최대 3곳까지 지원할 수 있는데, 한국대의 경우 경쟁률이 높아 합격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 재수하기 전에 경험삼아 보려고?”
설명이 길어질 것 같아 적당히 수긍했다.
“네, 뭐.”
추천서는 이미 원서접수 기간에 전달됐다.
입학시험 전에 합격이 결정됐다는 뜻이다.
물론 처음 있는 케이스라 학교 측에서도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합격은 시키되 입학시험만 보는 쪽으로 합의를 봤다.
결과적으론 괜히 봤다는 생각이 들지만.
모집 정원 100명에 지원자 약 500명.
그곳에서 난 476등을 기록했다.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교수들의 잔머리에 당한 거다.
내 실력이 뽀록나야 특례 입학의 책임을 회장님께 떠넘기니까.
“학생, 가기 전에 이거 하나 마셔.”
기사님이 박하스 한 병을 노 룩 패스했다.
“어휴, 감사합니다.”
기사님의 성의를 무시할 순 없지만, 선뜻 손이 가진 않았다.
이걸 마시는 순간 역겨운 미래로 돌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 획득한 물품을 인벤토리에 넣으시겠습니까? (Y/N)
어? 이게 뭐지?
홀로그램을 연상케 하는 투명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으음. 레이저 포인터처럼 생긴 붉은 점이 시선을 따라 움직인다.
커서 같은 건가?
▶ 인벤토리에 저장되었습니다.
어? Y가 있는 곳을 바라보자 손에 있던 박하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와…….
물건을 소환하거나 저장하는 능력이 새로운 건 아니었지만, E급 각성자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인벤토리】
1.
[일반]
박하스 (×1)
이번엔 박하스라 적힌 곳을 조용히 응시했다.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Y를 선택하는 순간, 손에 박하스가 들려있었다.
큰 것도 되나?
옆자리에 놓인 장비에도 손을 대봤다.
▶ 접촉한 장비를 인벤토리에 넣으시겠습니까? (Y/N)
오, 대박!
【인벤토리】
1.
[일반]
보급형 레이드 보우 (×1)
2.
[일반]
연습용 애로우 (×40)
궁수의 애환 중 하나가 장비의 휴대인데.
비대칭 어깨의 주범들이 홀가분하게 사라졌다.
*
*
*
택시에서 내려 트레이닝 돔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원자들 틈에 섞인 익숙한 얼굴들.
4년을 마주쳤던 28기 동기들이다.
본인들이 합격할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유리의 상냥한 얼굴과 방우혁의 역겨운 새우 눈도 보인다.
저 새끼를 떨어뜨렸어야 되는데.
내가 기억하는 방우혁의 최종 순위는 18등이었다.
18.
과거로 돌아왔지만, 지금의 실력으론 비빌 수 없다는 뜻이다.
▶ 대상에 대한 적의가 감지되었습니다.
▶ 전투를 위한 최적화가 진행됩니다.
▶ 상태창과 스킬이 활성화됩니다.
어? 이게 다 뭐지?
방우혁을 노려보자 수많은 창들이 떠올랐다.
【스탯】
[이름: 신태주]
[직업: 매직 아처]
[등급: S(2차 각성)]
[체력: 50,000]
[마나: 100,000]
[근력: 8,000]
[방어력: 25,000]
[민첩성: 5,000]
[지력: 10,000]
이름 신태주, 직업…… 뭐?! 매직 아처?!
심지어 S등급에 N차 각성까지 성공한 상태다.
말도 안 돼.
매직 아처라 그런지 마나와 지력의 수치도 엄청 높다.
진짜 회귀의 영향인가?
사실 매직 아처는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직업이다.
한마디로 초희귀 클래스.
그동안 수많은 법사들이 전직을 시도했는데,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마나로 화살을 생성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마나의 소모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뭐, 궁술 훈련까지 해야 된다는 것도 적지 않은 부담이었지만.
【스킬】
1. 도발
이번엔 스킬창이 나타났다.
도발? 어그로를 얘기하는 건가?
[도발]
- 효과: 하나 이상의 대상을 지목하여 강력한 도발 상태에 빠뜨림.
- 소모 마나: 100
- 재사용 대기시간: 5분
내 속마음을 읽었는지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주었다.
이거 완전 대박인데?
사실 탱커가 아닌 이상 어그로는 쥐약이었다.
물론 어그로의 대상을 지목할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 튜토리얼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Y)
이제 메시지 창이 뜨는 건 놀랍지 않았다.
튜토리얼이면 매직 아처의 능력을 알려주겠다는 건가?
그나저나 Y만 2개인 건 뭐지?
퀘스트를 수락, 아니, 수락당한 난 재학생들만 아는 쉼터로 자리를 옮겼다.
*
*
*
▶ [튜토리얼 퀘스트] 전설의 시작.
이름 한 번 거창하네.
인벤토리에 있던 활이 왼손에 자동으로 소환됐다.
▶ 화살의 종류를 선택하세요.
화살은 연습용밖에 없는…… 어?
[N]
[?]
[?]
[?]
[?]
[?]
[?]
[?]
[?]
[?]
[?]
[?]
[?]
[?]
[?]
[?]
[?]
[?]
[?]
[?]
[?]
[?]
[?]
[?]
[?]
빙고 게임 같은 격자무늬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거 상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선명한데?
이번엔 시선이 아닌 생각으로 커서가 움직였다.
어디 보자.
가로세로 5칸씩 총 25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 칸만 제외하곤 모두 물음표가 찍혀있다.
▶ 노멀 애로우[N]를 선택하셨습니다.
[노멀 애로우]
- 마나로 생성한 기본 화살.
- 활시위를 당긴 채 5초간 버티면 『증폭』 효과 발동.
- 소모 마나: 1
▶ 활시위를 당기면 자동으로 장착됩니다.
팽팽한 활시위가 늘어난 고무줄처럼 손쉽게 당겨졌다.
근력이 높아져서 그런가?
게임 속 궁수는 민첩을 찍지만, 현실 속 궁수는 근력이 중요한 힘캐였다.
▶ 활시위를 원위치 시키면 화살이 사라집니다.
활시위를 놓지 않은 상태로 늘였다 줄이기를 반복했다.
와…….
속사도 가능할 만큼 화살의 장착 시간이 줄었다.
한번 쏴볼까?
전방에 있는 나무를 겨냥한 뒤 활시위를 당겼다.
쉬이익! 딱!
손끝을 떠난 화살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박혔다.
싸구려 활을 썼음에도 차원이 다른 손맛이 느껴졌다.
이번엔 증폭을 해봐야지.
활시위를 당긴 뒤 다섯을 셌다.
어? 화살촉에 은은한 빛이 감돈다.
증폭이 됐다는 뜻인가?
쉬이익! 퍽!
첫 번째 화살은 화살촉까지만 박혔는데, 증폭을 사용한 화살은 깃이 있는 곳까지 파고 들어갔다.
▶ [튜토리얼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 보상으로 새로운 화살이 개방됩니다.
[N]
[C]
[?]
[?]
[?]
기본 화살 옆에 새로운 알파벳이 추가됐다.
[체이싱 애로우]
- 마나로 생성한 유도 화살.
- 조준된 목표물을 끝까지 따라감.
- 소모 마나: 5
매직 아처는 화살부터 다르네.
기본 화살에 비해 마나의 소모는 크지만, 날렵한 적이나 엄폐물을 활용하는 적에게 유용할 것 같다.
[“응시자 여러분께선 트레이닝 돔 안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외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가기 전에 스킬이라도 한 번 써보고 갈까?
▶ 스킬 『도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N)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작은 점을 원하는 대답 위로 옮겼다.
▶ 3초간 바라본 대상(들)이 도발 상태에 빠집니다.
나무 밑에서 발견한 사마귀를 실험 대상으로 지목했다.
▶ 스킬 『도발』이 발동되었습니다.
푸드드드드득!
스킬이 발동되자 트레이닝 돔 지붕 위에 있던 비둘기들이 미친 듯이 날아들었다.
▶ 스킬의 효력이 종료되었습니다.
비둘기의 습격을 받은 사마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와…… 비둘기가 아니라 몬스터였으면…… 어? 잠깐.
사마귀에게 감정을 이입하다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잘하면 방우혁이 떨어질 수도 있겠는데?
*
*
*
트레이닝 돔.
헌터학과의 상징이자 학부 생활의 절반을 보낸 곳이다.
여길 다시 오게 될 줄이야.
[“아, 아, 반갑습니다. 학과장을 맡고 있는 한중연입니다.”]
마이크를 잡은 학과장님이 간결한 인사말을 전했다.
[“입학시험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한국대의 경우 공정한 평가를 위해 해마다 시험 유형을 바꾼다.
라떼는, 그러니까 올해는 개인 미션과 단체 미션의 점수를 합산하여 등수를 매길 것이다.
[“공대를 편성해 던전을 클리어하는 단체 과제와 몬스터의 웨이브를 견디는 개인 과제가 주어집니다.”]
단체 과제엔 ‘클리어’라는 표현을 썼고, 개인 과제엔 ‘견디다’라는 표현을 썼다.
이유가 뭘까?
이미 눈치를 챈 녀석들도 있겠지만, 개인 과제가 상대적으로 더 어렵다는 뜻이다.
실제로 예년에 비해 난이도가 높아 고득점자가 없었다.
수석으로 합격한 허창민 역시 고전을 면치 못했으니까.
[“공격대의 구성은 지원자들의 직업과 각성 수준에 따라 공정하게 편성했습니다.”]
공대는 보통 10명 전후로 구성되는데, 난 마지막 조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도 재수 없는 방우혁과 함께.
지이잉! 띠링! 띠링!
지원자들의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다.
[‘신태주’님은 50조(단체 과제)에 편성되었습니다.]
학과 측에서 보낸 조 편성 메시지다.
[“모의 던전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30분간 조별 회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대부분 던전 안에서만 잘하려고 하는데, 실질적인 평가는 조별 회의에서부터 시작된다.
헌터의 덕목 중 하나가 협동심인데, 조별 회의는 의견 충돌이 일어나는 첫 번째 구간이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부터 조별로 모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