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에필로그(1): 신혼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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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에필로그(1): 신혼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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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에필로그(1): 신혼 시간
2022.05.13.
오늘도 나린은 열 시를 훌쩍 넘겨서야 사무실을 나설 수 있었다. 야근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엘리베이터가 지하에 닿기 전에 가방을 뒤적여 차 키 고리를 손가락에 걸어 쥔다.
장롱면허 종료 3개월 차.
덩달아 야근의 늪에 빠질 뻔한 운전기사 아저씨를 구해주고자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이제 겨우 회사와 집을 오가는 데에 익숙해지는 중이었다.
물론 아직도 출발 전 시뮬레이션이 필수였지만.
주차장 입구에서 우측 깜빡이를 넣고, 차가 오는지 잘 살핀 다음에 핸들을 틀고, 좌측 깜빡이로 바꾼 후에 차선을 변경하고…….
“어?”
눈길을 붙드는 익숙한 차종과 번호판에 나린이 발길을 멈춰 세웠다. 머릿속을 내달리던 모의 퇴근길도 함께 멈추었다.
그녀의 차 옆에 주차된 차의 운전석 문이 달칵, 열리고.
잘난 얼굴을 쑥 내민 그가 이어서 시원스레 뻗은 두 다리를 바닥에 딛고 섰다.
업무를 놓고 잠시 휴식을 취할 때면 어김없이 떠올렸던 얼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힘이 되는 온전한 내 편.
온종일 그리워했던 남편에게로 총총, 뛰어간다.
“언제 왔어요? 어떻게 왔어요?”
“아까 늦는다고 메시지 보냈을 때, 차 타고.”
반가워서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것처럼 질문을 던지니, 질문에 충실한 것 같으면서도 배배 꼬인 답이 돌아왔다.
또 삐쳤구나, 우리 남편.
“오래 기다렸겠다. 미안해요. 퇴근하려는데 필리핀 법인에서 품의 수정본을 보내와서…….”
나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배시시 웃었다.
그녀에겐 진심을 담은 사과였으나 윤완에게는 사르르 녹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귀여운 애교였다.
“아무리 봐도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소해야 할 거 같은데.”
“처가를 고소하겠다고요?”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린의 입에서 실소가 비어져 나왔다.
“근데, 이건 어떡하죠?”
그러다 이내 당면한 문제를 두고 고민에 잠긴다.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며 손가락에 걸린 자동차 키를 찰랑, 흔들어 보였다.
“최 기사님한테 전화해서 가져오라고 할게.”
이 남자 좀 보게. 누가 누굴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소하겠단 건지 모르겠네.
“퇴근한 사람한테 다짜고짜 연락하는 게 야근시키는 것보다 더 나빠요.”
“수당 챙겨주면 되지. 퇴근시간 이후부터 쭉 계산해서.”
그렇게 치면 나도 야근 수당 받거든요.
“그냥 여기 두고 내일 하루 택시 타고 출근하면 돼요.”
윤완이 죄 없는 기사 아저씨를 괴롭히기 전에, 나린은 제가 수고로운 방향으로 결정을 내렸다.
선선히 동의할 리 없는 그가 대안을 제시했다.
“그럼 내가 출근길에 내려줄게.”
“반대 방향이잖아요.”
“괜찮아. 대신 좀 일찍 나와야 하는데 괜찮겠어?”
“네. 안 그래도 할 일 많아요.”
나린을 따라 조수석에 이른 윤완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 나린은 감사의 표시로 빙긋 웃어 보인 뒤 차에 올랐다.
상체를 쑥 밀어 넣은 그가 안전벨트까지 야무지게 매준다.
“벨트 정도는 내가 매도 돼요.”
“이 정도는 내가 해줘도 돼.”
윤완이 차를 출발시키며 나지막이 받아쳤다.
“평생 해 줄 거예요? 하다가 안 해 주면 그게 더 서운할 거 같은데.”
“평생 해 줄게. 걱정 마.”
“무리하진 말고요. 갑자기 안 해 줘도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 사정이 변한 거라고 생각할게요. 차일시피일시라. 이 말은 정말 명언이에요.”
그가 그녀를 데리러 온 이유.
이렇게 차에서 나누는 대화는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피로회복제였다.
말을 할 때의 표정도, 뱉은 말의 내용도, 음색도, 말투도 모든 게 사랑스럽기만 하다.
안전하게, 몸 편히 퇴근할 수 있도록 보살펴주고픈 마음도 작용했지만, 이렇게 쉴 새 없이 떠드는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좀 더 컸다.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처럼 밤새 들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나 아내는 바쁘다. 대한민국 최고 기업을 이끄는 그보다도 훨씬 바빴다.
“어제 낮에 한남동에 들렀다며.”
“네. 어머님께 들었어요?”
윤완이 괜찮다는데도 나린은 주기적으로 시간을 내서 그의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그렇다고 해서 채 여사를 안 챙기는 것도 아니었다. 채 여사와도 거의 한 주 걸러 만났다.
자연히 그가 뒷전이 되었다. 이렇게 퇴근길에 데리러 오는 걸로 데이트를 갈음해야 할 만큼.
“오후에 컨설팅 회사 미팅 때문에 외근이 있었거든요. 좀 일찍 나와서 점심 먹으러 갔었어요.”
“별말씀은 없으셨고?”
“그럼요.”
결혼 후에도 금 여사는 나린과 거리를 두었다. 결혼 전에 윤완이 요구했던 대로였다.
나린을 향한 금 여사의 무관심에 보답하듯, 윤완도 적극적으로 금 여사를 챙겼다.
결혼 전보다 전화하는 횟수를 늘리고, 몇십 분씩 이어지는 푸념 또한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었다.
자연히 금 여사의 아쉬운 마음도 걷혔다. 이따금 며느리를 잘 들여서 아들과 더 가까워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린을 살갑게 대하진 못했다. 비뚤어진 줄 모르고 하늘 높이 치솟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나린은 그런 금 여사의 속사정을 금세 파악했다.
그러고 나니 퉁명스레 대하려 애쓰는 모습이 정겹게까지 느껴졌다.
이렇게도 가족이 되는구나.
이제 더는 그녀가 무섭지 않았다.
차창 밖 풍경을 보며 떠오르는 대로 재잘거리던 나린이 갑자기 화제를 바꿔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는 사이, 차는 집에 도착했다.
5성 호텔을 방불케 하는 웅장한 드롭 존에 차가 멈췄다.
입구를 지키는 관리인이 달려와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발렛 주차도 해 주었다.
윤완은 나린에게 바투 붙어서며 로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붙고 싶어서 그녀의 둥근 어깨를 바짝 당겨 안았다.
“주말에 뭐 할까?”
이번만큼은 회사에, 경영수업에, 양가 어른들께 절대 빼앗기지 않으리라.
각오를 독하게 다진 그가 물었다.
“토요일 오전엔 회사에 가봐야 해요. 퇴근하고, 저녁은 나가서 먹을까요?”
이 정도는 양보해줄 수 있지.
“좋아. 일요일은? 오후엔 경영수업이 있고……. 오전엔 뭐 하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카드 키를 태그한 윤완이 제일 꼭대기에 위치한 버튼을 누른다.
“큰엄마랑 쇼핑…….”
문이 완전히 닫히기도 전에 그가 나린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낭랑하던 목소리는 뜨겁게 덮쳐오는 입 안으로 꿀꺽, 삼켜져 버렸다.
한 팔로 나린의 등을 감아서 끌어당긴 윤완은 다른 한 손으로 나린의 머리를 감쌌다. 이성이 흐무러지는 순간에도 차갑고 딱딱한 벽에 오래 닿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나린은 아직도 그의 키스를 버거워한다. 다리가 휘청였다.
윤완은 더욱 단단히 나린을 받쳐 안았다. 손에 힘이 들어간 만큼 입술을 훑는 움직임도 맹렬해졌다.
얼마 남지 않은 기운마저 전부 빼앗길 것 같은 착각에 나린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몸 안에서 열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더는 감당할 수 없어서 밀어내려 해보았지만, 심장에 판단을 내맡긴 지 오래인 그는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엘리베이터는 정상에 닿기 전까지 다른 층엔 서지 않을 것이다.
중간에 누가 타지 않을까 조심할 필요가 없기에 밀폐된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야릇한 본능을 굳이 억누를 필요가 없었다.
그가 가장 흡족해하는 이 집의 장점이 바로 이거였다.
띵! 경쾌한 알림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엘리베이터는 바로 너른 현관으로 이어졌다.
오늘도 예고 없이 그가 나린을 번쩍 안아 들고.
현관을 지나오는 길에 나린의 두 다리가 허공을 헤저으며 바동거렸다.
“미옥 아줌마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결혼하면서 그녀를 따라 옮겨온 미옥을 의식해서 소리 낮춰 타박했다. 미옥의 방은 두 사람이 머무는 본채와 현관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벌써 들키기라도 한 양, 나린이 빨개진 두 볼을 그의 어깨에 파묻었다.
“좀 들키면 어때. 우리 다정한 거 세상이 다 아는데.”
“그래도요…….”
“아까 나갈 때 오늘은 다시 건너올 필요 없다고 말해뒀어.”
여전히 바동거리는 그녀를 두 팔로 단단히 지탱한 그가 침실에 이르렀다.
그의 팔이 놓아주는 대로 침대에 안착한 나린은 곧장 몸을 쓰러뜨리려는 그를 저지하며 달랬다.
“일단, 먼저 씻고요.”
하는 수 없이 그가 물러났다. 나린은 잽싸게 드레스룸으로 도망쳤다.
옷을 챙겨서 욕실로 향하는데, 당연히 공용 욕실에 가고 없을 줄 알았던 그가 앞을 가로막고 나선다.
“왜요?”
긴장이 되어서 꿀꺽, 침이 넘어갔다.
“같이 씻어.”
“……네?”
불에 덴 듯 나린의 몸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안 돼, 안 돼. 상상하지 마.
“농담 그만 해요.”
그의 요구가 더 거세어지기 전에 장난으로 치부하고 넘길 작정으로 내쏘았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게 해 줄게. 당연히, 평생 해 줄 수 있는 거니까 걱정 말고.”
안전벨트를 매주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듯, 가벼우면서도 진지한 제안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진심 어린 눈빛을 마주한 나린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온 힘을 다해 그의 등을 떠밀 뿐이었다.
“착하지. 얼른 나가서 씻고 와요.”
나린을 상대로 힘을 쓸 수 없는 윤완은 아쉬운 마음으로 차츰차츰 밀려갔다.
그를 방 밖으로 내모는 데 성공한 나린은 서둘러 문을 걸어 잠갔다.
정말이지 단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아찔한 ‘신혼 시간’의 연속이었다.
***
토요일 오후. 지숙과 수정이 바쁜 나린을 위해 집으로 찾아왔다.
윤완은 일현의 호출을 받아 회사에 가고 없었다. 하루 특별 휴가를 받은 미옥도 모처럼 자녀들을 만난다며 일찍 집을 나섰다.
“번거롭게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차와 주전부리를 준비하던 나린이 홀연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오늘 오전에도 출근했다면서. 바쁜 거 다 아는데 우리한테까지 예의 차릴 거 없어.”
지숙의 눈빛이 다정하게, 아일랜드 바 너머의 나린을 비추었다. 나린은 지숙과 시선을 맞추며 생긋 웃었다.
“삼촌은 집 문제 더 고집 안 하시죠?”
“응. 저번에 내가 생떼 부린 뒤론 암말도 안 해.”
테라 그룹에서 준 아파트 문제로 승태를 설득하는 건 예상보다 훨씬 더 험난했다.
결국 지숙이 나서야 했다. 지숙은 그가 정 싫으면 제 명의로라도 받아야겠다며 억지를 썼다. 그렇게라도 설득을 해달라는 나린의 간곡한 청이 있었다.
나린을 도맡느라 고생한 아내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승태는 끝내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받으실 자격 충분해요. 끝까지 안 받으시면 제가 제 힘으로라도 다시 사드릴 생각이었어요.”
보이차가 적절한 색으로 우러난 걸 확인한 나린이 다관을 기울여 찻잔을 채운 후 지숙에게 건넨다.
때마침 집 구석구석 유람을 마친 수정이 키친으로 돌아왔다. 지난번 집들이 때 실컷 보고도 아직 구경할 게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다시 봐도 집이 너무 비현실적이야.”
지숙은 걱정스레 딸을 쳐다봤다.
“괜히 눈만 높아지면 안 되는데.”
그러나 수정은 지숙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현실감각이 뛰어났다.
“걱정 마, 엄마. 이런 집은 그냥 줘도 유지를 못 해서 못 가져. 도우미도 써야 하고, 관리비도 어마어마할 거고. 숨만 쉬고 사는데 월급을 다 갖다 바쳐도 모자랄걸.”
나린이 보이차를 한 잔 더 담아서 수정에게 내밀고, 수정이 뜨거운 잔을 조심조심 받쳐 들었다.
“좋긴 좋아. 한강 뷰도 끝내주고. 자주 놀러 와도 되지?”
“당연하지. 오고 싶을 때 언제든 연락해.”
친구이기도 하고, 자매이기도 한 서로를 보는 얼굴에 애틋함이 깃들었다.
이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고 난 후부터, 나린은 이전 세계에서 맺은 인연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이곳에서 맞닥뜨리는 새 인맥은 인연이라고 하기가 무색하게 너무 얕고 차갑다. 언제 갈라질지 모를 살얼음판 같았다.
하나같이 처지가 달라지면 등을 돌리고 떠날 사람들뿐이었다. 그네들이 추락한 신혜원에게 그랬던 것처럼.
“저녁 먹고 가세요. 삼촌도 일 끝나셨으면 오시라고 하고요.”
“그럴까?”
지숙의 표정이 환해졌다. 모처럼 식구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 먹일 생각에 한껏 동기부여가 되었다.
“뭐 해 줄까? 먹고 싶은 거 말해. 다 해 줄게.”
“그럼 요 앞 백화점 가서 장 봐오자!”
장 보는 것도 쇼핑이라고 신나는지 수정이 명랑하게 소리쳤다.
내 보금자리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머무는 풍경.
이보다 더 아름다운 장면이 또 어디 있을까.
지숙과 수정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나린의 심장에 넘치도록 꽉꽉, 온기가 눌러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