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 살아갈 세상이 되어주기 위해 (99/101)


#99. 살아갈 세상이 되어주기 위해
202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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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1일이 되었다. 한 해가 또 훌쩍 지났다.

어김없이 팀에서 제일 늦게 퇴근한 나린은 곧장 테라 호텔 강남 2501호로 향했다.

올해의 마지막 밤, 네 남자의 아지트에서 열릴 간단한 파티를 기획했다. 싱가포르에서 윤완이 한 말을 기억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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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엔 그런 거 할 사람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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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네가 와서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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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연말엔 같이 불자고. 촛불.”

 
일부러 떠올리려 한 건 아닌데 기억이 제 발로 찾아왔다.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연말이라고 예외 없이 야근에 지쳤지만 마음만큼은 기운이 넘쳤다. 설레서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물론 시원섭섭함도 한술 섞여 있었다.

오늘은 2501호에 안녕을 고하는 날이기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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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부터는 유지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먼저 이 민감한 안건을 꺼낸 사람은 준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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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들 결혼하고 나면 모이기도 힘들 텐데.”

 
미국에 있는 태준을 포함한 이 룸의 주인들 모두 준우의 말에 동의했다. 만장일치였다.

아쉽지만 변화를 받아들이고 떠나보낼 건 떠나보내야 한다.

그렇게 2501호는 내일부터 다시 테라 호텔 손님들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린이 룸 안으로 들어가니 테이블 세팅이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테이블 장식을 챙기던 VIP 담당 매니저가 나린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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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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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차 매니저님. 벌써 다 하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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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살펴보시고 부족한 거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테이블을 슬쩍 훑으니 중앙에 테라 호텔 베이커리 로고가 찍힌 케이크 상자가 보였다. 갖가지 음식과 화사한 장식들 속에서, 정작 나린이 필요로 하는 건 딱 그 상자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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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해요. 감사합니다.”

케이크 위에 초를 꽂고 다 함께 불어 끌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거창한 파티를 하려는 게 아니야.

그저 함께 지나온 시간과 공간에 이별을 고하는, 작은 의식을 치르려는 것뿐.

새해로, 새로운 사람들에게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먼저 룸에 도착한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이곳에 둔 윤완이었다. 세훈과 준우는 따로 데이트가 있으니 늦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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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호텔은 너무 붐벼.”

윤완이 코트를 옷장에 걸며 기어이 한마디 했다.

둘이서 보내고 싶었던 밤을 친구들과 나누게 된 데에 대한 소심한 반항이었다.

그는 싱가포르에서 ‘촛불 끄기’를 하자고 할 때 핵심 조항을 삽입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올 연말엔 ‘단둘이’ 같이 불자고. 그렇게 말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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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는 그런 거죠. 난 오히려 떠들썩하고 좋던데.”

그를 달래는 나린의 손길이 훅 감겨왔다. 그의 허리는 자연히 나린의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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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은 안 오겠지?”

본능이 인도하는 대로 그가 얼굴을 쑥 내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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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요.”

나린이 잽싸게 입술을 틀어쥐며 물러섰다.

다급히 뒷걸음질 치던 나린의 발꿈치가 무언가에 턱, 걸렸다. 뒤쪽에 있는 소파를 계산하지 못한 나린은 그대로 벌렁 넘어가 버렸다.

놀란 윤완이 나린을 잡아주려 손을 뻗다가 그 위로 풀썩 쓰러졌다.

나린이 무거울까 봐서 재빨리 두 팔을 딛고 상체를 세우는데.

삐비빅. 도어록 잠금 해제 알림이 났다.

소리에 반응한 두 사람은 얼음 상태로 고개만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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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녀……엉.”

문을 열고 들어온 태준이 말끝을 늘이며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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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이따가…… 올까?”

윤완을 힘껏 밀어낸 나린은 후다닥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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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아뇨.”

잠깐 드러누웠다고 머리가 엉망이 되었다. 손가락 틈을 벌려 대충 빗질을 한 나린은 그제야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태준이라는 걸 인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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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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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에요, 나린 씨. 잘 지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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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왔어요?”

엊그제 뉴욕 출장을 떠났단 소식을 들었기에, 환영이 아닐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석 달간 달콤한 휴식을 취한 태준은 곧 주재원 신분으로 전환했다. 비자 문제도 있었고, 아버지로부터 회사 일을 너무 오래 놓으면 좋지 않다는 압박을 받은 탓이었다.

코트를 벗어든 태준이 빙긋 웃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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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들어왔어요. 어머니께 안 들키려고 비밀리에.”

남들은 연말을 보내려 뉴욕엘 간다던데.

타임스퀘어 볼 드롭을 보겠다고 뷰가 확보된 객실을 뻥튀기한 가격에 사기도 한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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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라 외로워서요. 2501호가 그립기도 했고.”

그럼에도 태준은 친구들이 있는 서울을 택했다.

화려함보다는 익숙함을. 떠들썩한 열기보다는 주위를 감싸는 아담한 온기를.

나린은 이 남자들의 이런 순수한 우정이 좋았다.

부와 권력을 넘치게 쥐고도 누구 하나 교만하지 않았다. 따뜻하고 반듯한 시선으로 삶을 대하며 살아간다.

서로를 배려하며 지켜온 순수한 마음 없이는 불가능했을 기적이었다.

그래서 그들 틈에 제 자리가 있는 게 특권처럼도 여겨졌다.

열한 시가 되어 데이트를 마친 준우와 세훈이 차례로 도착했다.

해가 바뀌기까지 한 시간도 남지 않은 아슬아슬한 시각.

마침내 모든 멤버가 모였다.

상자에서 케이크를 꺼낸 나린이 ‘GOOD BYE’ 모양의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말 그대로, 지난 한 해와 또 2501호와 좋은 작별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고른 글귀였다.

촛불 외에 다른 조명이 모두 꺼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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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수고 많았다.”

어스름 속에서 상기된 얼굴을 한 준우가 잔을 치들며 포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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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나린이.”

나린에게는 특별히 팔을 길게 뻗는 수고를 더해 챙, 잔을 부딪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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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야말로 한 해 동안 감사했어요. 오빠들 모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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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우리가 진짜, 진짜 고마워. 이중인격 도윤완을 거둬줘서.”

세훈이 살살 긁어보지만 윤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완벽한 무시에, 도리어 공격을 시도한 세훈만 머쓱해졌다.

나린은 아른거리는 촛불에 기대어, 그녀를 둘러싼 네 남자의 얼굴을 차근차근 들여다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 누구 하나 감사하지 않은 이가 없다.

처음 낯선 세계에 들어왔을 때 살갑게 다가와 주고 챙겨주었던 유쾌한 사촌 오빠.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늘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던, 냉철하고 따뜻한 쌍둥이 언니의 옛 연인.

우여곡절은 좀 있었지만, 물러날 때를 알고 현명한 결정을 해 주었던 가짜 예비 약혼자.

그리고 이젠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내 연인. 나의 예비 신랑.

윤완에게 눈길이 닿았을 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줄곧 나린만 보고 있었기에 예정된 운명이었다.

윤완의 얼굴색이 좀 더 따스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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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그는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만으로 마음을 전했다.

눈으로는 더욱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한 해 동안 고마웠어.

내가 내민 손을 잡아주어 고마웠어.

그 손을 놓지 않아 고마웠어.

내 세상에서 살아갈 결심을 해 주어 고마웠어.

한 해 동안 네가 해 준 모든 게.

나는 참 고마웠어.

그래서 세훈과 준우가 뭐라 뭐라 대화를 주고받는 것 같은데, 나린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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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다 녹겠다. 얼른 불자.”

태준이 아슬아슬하게 맺힌 촛농을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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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진짜, 진짜 수고 많았어.”

세훈이 친구들을 돌아보며 웃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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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불어요. 하나, 둘, 셋.”

나린의 신호에 맞춰 ‘후’하는 입김이 촛불 위로 모였다.

나린에게는 조금 특별했던 한 해가 지고.

네 남자에게 특별했던 아지트는 그렇게 어둠 속에 잠겼다.

***

윤완과 나린의 신혼여행지는 이탈리아로 결정됐다.

우연한 기회에 르네상스 시대를 다룬 다큐를 본 나린이 충동적으로 제안했는데, 윤완이 두말 않고 받아들이면서 싱겁게 결론이 났다.

여행이며, 출장이며 안 다녀본 나라가 없는 윤완은 처음부터 나린이 원하는 대로 따를 작정이었다.

2501호 고별 모임이 있고서 일주일 만에 겨우 데이트할 시간을 확보했다. 나린을 만난 윤완은 비서실에서 정리한 신혼여행 일정표를 보여주었다.

나린은 뭔가 이상한 느낌에 두 눈을 깜빡였다.

한눈에도 타임테이블이 너무 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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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열한 시부터 네 시까지밖에 일정이 없어요?”

의아함을 품고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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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여행 시간이니까.”

‘여행 시간’이라는 개념은 생소했다. 그래서 재차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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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열한 시 이전이랑 네 시 이후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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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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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가 또 무슨 말을 하려나 불안, 불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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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여행이잖아. 그러니 주구장창 여행만 할 순 없지. 신혼도 즐겨야 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이 남자의 궤변은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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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먼 이탈리아까지 가서 이렇게 허술하게 시간을 보내겠다고요?”

직장인에게 모처럼 길게 쉴 수 있는 신혼여행 찬스가 얼마나 중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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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반려야. 다시 짜 와요.”

나린은 짐짓 도도한 얼굴을 해 보이며 일정표를 도로 그의 앞으로 밀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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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

그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일정표를 갈무리했다.

무모한 반항은 하지 않기로 한다. 앞으로도 영원히 이길 수 없을 상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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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피드백대로 아주 빽빽하게 짜서 보고하도록 하지.”

시답잖은 농담도 성심껏 받아쳐 주는 그를 보며 나린은 픽 웃고 말았다.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죽이 척척 맞아가고 있다. 남들이 보기엔 사소하고 유치한 일로 웃게 되는 일이 점차 늘어가고 있었다.

우리의 앞날 또한 그러하겠지.

그러한 확신 덕분에 매일매일 행복하게 잠들 수 있다.

***

새봄이 찾아왔다. 3월의 첫 토요일.

테라 호텔 별관 연회장에서 윤완과 나린의 결혼식이 열렸다. 언론은 세기의 결혼식이라 일컬으며 스포트라이트를 집중했다.

미리서부터 대혼돈을 예감한 도일 그룹과 테라 그룹에서는 일찌감치 비공개 소규모 결혼식을 결정했다.

하객들의 입장이 철저히 통제되었고, 차량 번호판을 포함해 출입하는 모든 게 검사 대상이 됐다.

신부대기실 앞에 다다른 민하가 모바일 초대장을 보여준다. 문을 지키는 비서가 확인을 마친 뒤에야 입장이 허락되었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민하는 잠시 판타지 세계로 차원 이동한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했다.

온통 새하얀 공간에 흐드러지게 핀 유일한 꽃밭.

그 한가운데 숲의 요정처럼 앉아 있는 더 하얀 아이.

안 그래도 피부가 흰데 흰 배경 속에서 흰 웨딩드레스에 감싸여 있으니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조명이 조금만 더 세면 아예 보이지 않게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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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과장님.”

어머나. 요정이 인간의 말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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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예쁘다, 나린 씨.”

민하는 요정에게 어울리는 찬탄으로 첫인사를 갈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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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해줘서 고마워. 생각 못 했는데.”

제한된 범위의 가족, 그리고 신랑, 신부가 엄선한 지인만 초대되는 작고 특별한 결혼식.

초대장을 받은 민하는 눈을 의심했더랬다.

나 혼자서만 좋은 후배라고 생각한 게 아니었구나. 나린 씨도 나를 좋은 선배로 여기고 따라주었구나.

깨달음을 얻은 그녀는 감동의 눈물마저 찔끔 흘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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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사진 찍어요.”

나린이 손짓한다. 꽃밭으로 걸어 들어간 민하는 나린의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찰칵, 찰칵. 순간을 담아내는 기계음이 청량하게 울려 퍼진 후.

신부대기실 문이 굳게 닫혔다. 민하가 마지막 손님이었다.

이제는 신부가 하객들 앞에 나설 시간.

매무새를 재차 정돈한 나린이 예식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사뿐사뿐 홀 앞에 이르렀다.

먼저 도착한 승태는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서 외려 나린의 긴장이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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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연습했다면서 떨리세요?”

울상이 된 승태가 나린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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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가 다리에 힘 풀리면 어떡하지? 넘어져서 결혼식을 망치기라도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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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그냥, 잠시 손잡고 산책한다고 생각하세요.”

나린의 미소에 승태도 용기를 얻었다.

예식 도우미가 다가와 부케를 들지 않은 나린의 손과 승태의 왼손을 이어주었다.

이윽고 사회자가 신부 입장 차례를 알렸다.

짧게 눈짓을 주고받은 승태와 나린은 웨딩 로드 위로 한발 한발, 걸음을 옮겼다.

수줍게 떨어졌던 나린의 고개가 찬찬히 정면을 향했다.

그녀가 바라보는 길 끝에, 그가 서 있다.

모델처럼, 언제 보아도 완벽한 슈트 핏을 자랑하며.

웨딩 로드가 그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처럼 느껴져서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그대가 있어, 그대의 세상에서 살아갈 결심을 했다.

당신이기에, 내 걸음은 신뢰와 환희로 가득하다.

한 걸음 한 걸음 힘차게, 또 차근차근 다가오는 그녀를 그 또한 올곧게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녀는 다른 세상에서 날아온 운석이었다.

예고도 없이 슝, 날아와서는 쾅, 그의 세상을 폭발시켰다.

충돌이 일어났고 세상이 변했다. 그녀는 그의 우주가 되었다.

그 우주가 조금씩 가까워 오고 있다. 이보다 더 가슴 벅찬 일은 없었다.

미래는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단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쩌면 상상도 못 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우리가 만날 줄 몰랐듯이. 사랑하게 될 줄 몰랐듯이.

그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도,

단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

그럼에도 나는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네가 살아갈 세상이 되어주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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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의 세상으로> 본편 완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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