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위로하며 살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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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위로하며 살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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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위로하며 살겠노라고
2022.05.06.
결혼을 앞두고 눈코 뜰 새 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윤완의 비서실에서 신혼살림을 꾸리기에 딱 알맞은 보금자리를 구해왔다.
테라 호텔 본사에서 멀지 않은 최고급 신축 빌라는 위치도 위치지만 보안과 사생활 보호가 철저해서 윤완의 마음에 쏙 들었다.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깔끔한 집이었는데도 채 여사의 의견을 수용해 새로 인테리어를 하기로 했다. 계약을 마무리 짓고 잔금을 치르는 대로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업체 섭외에 나선 채 여사는 벌써 세 군데나 퇴짜를 놓았다. 경험, 감각, 기술, 그 무엇 하나라도 비어선 깐깐한 채 여사의 합격 통지를 받을 수 없었다.
결혼 준비의 대부분을 채 여사에게 일임한 나린은 회사 일에만 매달렸다.
야근과 휴일 출근이 잦아진 탓에 윤완과 만날 수 있는 날도 줄어들었다.
윤완은 어서 결혼식 날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결혼해서 한집에 살게 되면, 적어도 하루의 끝엔 얼굴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시간이 너무 안 가.]
윤완의 읊조림에 나린의 눈꺼풀이 다시 위로 들렸다.
“무슨 시간이요……?”
졸려서 말이 늘어지고 느려졌다.
[결혼식까지의 시간.]
“아…….”
그가 요새 입에 달고 사는 얘기.
빨리 결혼하고 싶다. 얼른 한집에 살고 싶다.
그걸 또 다른 문장으로 만들어 뱉은 거였다.
[신혼여행지는 생각해봤어?]
그는 일정상 더 미룰 수 없는 주제를 꺼냈다.
“……모르겠어요.”
나린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윤완에게 들리지 않도록 휴대폰 아랫부분을 손으로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빠서 만날 수 없는 날이 늘어난 만큼 전화통화로 하루를 공유하는 시간이 무척이나 귀했다.
머릿속을 침투해오는 졸음 공격에도 나린이 폰을 붙들고 버티는 이유였다.
[평소에 꿈꿔온 허니문 같은 거 없었어?]
“……없었어요, 그런 거.”
윤완을 만나기 전까진 결혼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려본 적 없었다.
꿈 많은 수정이 이것저것 하고 싶다고 할 때도 영혼 없이 맞장구를 쳐준 게 전부였다.
멀다고만 생각했던 미래가 성큼 다가와 있다.
하지만 여전히 바라는 건 없었다.
결혼식장에서, 또 신혼여행지에서 내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그럼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을까.
“아, 맞다……. 그런 얘기는 들은 적 있어요.”
모처럼 나린이 적극적으로 서두를 꺼내자 윤완의 목소리도 활기를 띠었다.
[무슨 얘기?]
나린은 폰을 다른 손으로 바꿔 쥐며 반대편을 향해 돌아누웠다.
“오래된 커플은…… 관광지를 가야 지루하지 않고, 사귄 지 얼마 안 된 커플은 휴양지를 가야…… 안 싸운대요.”
[우린 어느 쪽이지?]
혼잣말인 듯 그가 되묻고,
“음.”
나린도 해답을 찾기 위해 고민에 빠졌다.
단순히 사귄 시간으로만 따지면 얼마 안 된 커플 쪽이긴 한데.
그간 겪은 일들을 떠올려보면 오래된 커플도 이보다 더 곡절이 있을 수가 없고.
“모르겠어요.”
문제 풀기를 포기한 나린이 자그맣게 웃었다. 제가 낸 웃음소리에 잠이 달아나는 것만 같았다.
윤완도 포기를 선언했다.
[신혼여행지는 나중에 만나서 정하자.]
“그래요.”
잠시 대화가 끊겼다.
이제 전화를 끊어야 할 타이밍인 걸 인지한 윤완의 음성에 아쉬움이 담겼다.
[내일도 못 보나, 우리?]
“네. 야근이요…….”
[그러니까 왜 그런 회사로 이직은 해가지고.]
그는 입버릇처럼 테라 호텔이 악덕 기업이라 말했다. 실은 나린이 자처한 거라 회사를 원망할 일은 아니었다.
하루빨리 커나가야 한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변명은 올해로 이만 끝내고 싶었다.
윤완도 그걸 알기에 나린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보채지는 않았다.
보고 싶어. 그냥 딱 그 정도의 투정만 부릴 뿐.
“……자요.”
[응.]
“잘 자요…….”
[너도.]
“…….”
[사랑해.]
“저도요…….”
바쁘지만 틈틈이 행복한 하루하루가 선물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
가을. 추석을 앞두고 만물이 탐스럽게 영그는 시기.
모처럼 현주가 음식 솜씨를 발휘하겠다고 나섰다.
체계적으로 신부 수업을 받아온 것도 있지만 애초에 타고난 손재주가 좋은 그녀였다.
저녁 시간에 맞춰 오후 느지감치 장을 본 현주는 세훈과 나린을 픽업해 태용의 집으로 향했다.
태용은 요새 다시 건강이 나빠졌다. 병이 도진 건 아니었고 노쇠한 탓이었다. 수술을 견뎌내긴 했지만 몸이 많이 망가져 있었다.
오늘도 그는 기운을 잃고 앓아 누워 있었다. 반가운 손자, 손녀의 방문에도 침실을 나설 상태가 못 됐다.
태용에게 인사를 마친 현주와 나린이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이,
“어머니께서 엄청 걱정하세요.”
침대에 걸터앉은 세훈이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으니 너무 마음 쓸 것 없다고 전해라.”
태용의 두 눈이 힘없이 감기었다.
세훈은 태용이 쉴 수 있도록 커튼을 치고 방문을 닫은 후 주방으로 왔다.
“나도 거들게요.”
세훈의 등장에 밀려난 나린은 할 일이 없어졌다.
커플 사이에 껴 있는 것도 어쩐지 눈치 없는 것 같아 거실로 슬그머니 도망쳐 나온다.
맛있는 냄새가 집 안 구석구석 퍼져갈 즈음, 마지막 손님인 윤완이 도착했다.
“할아버지는 방에 계세요. 아까 주무시는 것 같았는데, 깨어나셨는진 모르겠어요.”
폰으로 업무를 처리 중이던 나린이 메일함을 닫으며 그를 반겼다.
윤완은 손을 씻은 다음 태용의 방에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태용은 깨어 있었다.
“저 왔습니다.”
윤완의 인사에 태용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쉬십시오.”
그가 방을 나서려는 찰나,
“윤완아.”
태용의 부름이 들려온다.
“예.”
태용의 고개가 협탁이 있는 쪽을 향해 움직였다.
“맨 밑에 서랍을 열어 보거라.”
문을 닫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 윤완은 태용의 지시대로 협탁 가장 아래에 놓인 서랍을 열었다.
그곳엔 낡고 오래된 노트 두 권이 들어 있었다.
“나린이 아비가 남기고 간 일기장이다.”
뜻밖의 유품에 윤완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차마 내 손으로 줄 수 없어서 쭉 갖고 있었다. 네가 나 대신…… 좀 전해 다오.”
“……알겠습니다.”
조심조심 일기장을 꺼내 든다. 두 권을 포개어 쥐니 윤완의 손 안에 꽉 찰 만큼 두꺼웠다.
태용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전에 나와 한 약속을 기억하느냐.”
힘없는 목소리가 가뭄에 마른 땅처럼 쩍쩍 갈라져서 들려왔다.
저렇게 말하다가 기력을 잃고 쓰러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지만 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
무언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것 같았기에.
“……네가 그랬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린일 놓지 않겠다고. 절대로 먼저 그 앨 저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오래전, 태용과 독대를 했을 때 그가 윤완으로부터 받아 간 다짐이었다.
“예.”
의식하며 살진 못했어도 결코 버린 적은 없었다. 어길 수 없는 다짐이었다.
“그 약속을 꼭 지켜다오. 그 앨 볼 염치도 없는 이 할아비의 마지막 소원이다.”
“걱정 마십시오.”
간곡히 들려오는 부탁에 윤완은 담담히 대답했다. 이보다 더 들어주기 쉬울 수 없는 소원이었다.
처음 다짐을 받아간 날처럼 안심이 된다는 듯 태용의 입꼬리가 들썩였다.
희미한 미소를 띤 태용은 이만 나가보라는 듯 눈을 감았다.
윤완은 낡은 일기장들을 보물인 양 안아 든 채 밖으로 나왔다.
***
태용은 저녁 식사 자리에도 나오지 못했다. 방에서 현주가 따로 끓인 타락죽을 조금 들었을 뿐이었다.
무거운 공기 속에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우리끼리라도 즐겁게 먹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야 할아버지도 마음이 편하실 거야.”
세훈이 분위기를 띄워보려 밝게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나린이 현주를 보며 인사했다. 현주가 함박 미소를 띤다.
“맛없어도 맛있게 먹어줘.”
겸손히 건넨 말과 다르게 음식은 빠짐없이 훌륭했다. 그 까다로운 윤완도 주저 않고 싹 비울 만큼.
집에 돌아가는 길.
기사를 들여보낸 윤완이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차는 엉뚱하게도 한강으로 향했다.
세훈의 생일 파티 때, 전시회장 사건이 있었을 때, 그가 나린을 데려왔던 곳.
그 자리에 윤완이 차를 멈추었다.
“여긴 왜 왔어요?”
뜬금없이 추억의 장소로 소환된 나린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윤완이 안전벨트를 풀어서 나린도 딸칵, 버클 위의 버튼을 누른다.
“있어.”
나린이 따라 내리지 않도록 이른 그는 뒷좌석으로 가서, 아까 받자마자 차에 가져다 둔 일기장을 꺼내왔다.
윤완이 말없이 내미는 두 권의 일기장을 나린이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한눈에도 세월의 흔적으로 가득한 표지.
이게 대체 뭘까.
건넨 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 뭐냐고 물어보기도 겁이 났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쓰신 일기래.”
윤완이 곧 의문을 풀어주었다.
“…….”
“아까 할아버님께서 주셨어.”
갑자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기분이었다. 하마터면 아빠가 남긴 귀한 유품을 떨어뜨릴 뻔했다.
가까스로 일기를 붙든 나린이 조용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버지,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하지?”
윤완의 얼굴이 조금은 서글픈 미소로 물들었다.
그는 나린의 아버지를 만나본 적이 있었다.
“만난 적 있어요?”
나린이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렇다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딸인 그녀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아버지를 만나봤다는 게 괜히 미안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몇 번 뵌 적 없지만…… 좋은 분이셨어. 어렸을 때 세훈이 따라서 놀러 가면, 그 댁에서 가장 다정하게 대해주셨던 분이거든.”
나린의 눈에서 물기가 반짝였다. 차 안이 어둑하여 다행히 들키진 않은 것 같았다.
……그런 줄 알았다.
“정이 많은 성격이셨나 보다.”
메이는 목을 풀려 노력하다 보니 목소리가 커졌다. 나린은 몇 번 더 목을 가다듬었다.
“응.”
“…….”
“너처럼.”
윤완은 어떻게든 슬픔에 파묻히지 않으려 하는 나린의 사투를 알고도 모른 체해주었다.
“하나만 약속해.”
일기를 붙잡고 있는 나린의 손등 위로 그의 손이 포개어진다.
“꼭 나 있는 데서 읽기.”
“…….”
“없는 데서 혼자 읽고, 혼자 울지 않기.”
알았다고, 이번엔 나린이 끄덕거렸다.
그 모습이 또 예뻐 보였다.
이쯤 되면 예뻐 보이지 않는 순간이 도대체 언제일까 싶다.
이런 순간마저 나는 너의 미모에 감탄하고 있다니.
손을 든 윤완이 나린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을 좀 더 위로 들어 올리자, 나린의 고개가 딸려 올라왔다.
일렁이는 눈빛이 일직선을 이루었다.
어른어른 젖은 눈동자를 보니 윤완의 가슴이 저며 왔다.
엄지 끝을 움직여 나린의 눈자위에 번진 눈물을 닦아준다.
그 위로 살포시 입술을 얹었다.
나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할 수만 있다면 기억을 공유해주고 싶다.
그가 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나린의 머릿속에 옮겨 심어주고 싶었다.
“괜찮아요.”
나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다시 한번 그를 안심시켰다.
이제는 안다.
나의 눈물이 누군가의 아픔임을.
내가 울면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나의 행복이 곧 제 행복이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러니 결코 뒤돌아보며 머뭇거리지 않을 것이다.
이전엔 어쩔 수 없었고, 앞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일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단단히, 성실하게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오로지, 당신을 위해.
***
나린이에게.
언젠가 네가 읽길 바라며 이 일기를 남긴다.
너도, 네 엄마도 끝내 지키지 못한 못난 아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으로 감히 펜을 든다.
나린아.
오늘도 나는 너를 보러 갔었다.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해서 주책맞게 눈물이 났단다.
나는 언제쯤 마음껏 너를 안아볼 수 있을까.
언제 네 이름을 드러내놓고 불러볼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긴 하는 걸까.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
이 일기장 안에 빼곡히 너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으며.
먼 훗날 우리가 만났을 때 이 일기를 본 네가 얼마나 소중한 아이였는지 느낄 수 있도록.
우리가 만나게 되는 그날까지 밝고 건강하게 자라다오.
사랑한다.
사랑한다, 내 딸.
***
그냥 일기가 아니었다. 딸에게 전하고자, 그리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쓴 편지였다.
나린은 첫 장을 넘기지 못하고 일기를 닫았다.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아빠의 글씨, 아빠의 마음.
책상 위에 엎드려 한참을 울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흐른 시간의 길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때쯤,
더 있다가는 탈진할 것 같은 기분에 몸을 일으켰다.
퉁퉁 부은 눈으로 서재를 나서니 문 바로 앞에서 윤완이 기다리고 서 있다.
묵묵히 그 자리에서, 줄곧 마음으로 함께 울어준 것처럼.
나린은 그에게로 와락 안겨들었다.
아무런 판단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의 품이, 따스한 체온이 필요했다.
품 안을 파고드는 나린을 마주 안으며 그가 등을 토닥거렸다.
괜찮다고.
그러니 마음껏 울라고. 하지만 너무 슬퍼하지는 말라고.
내가 평생토록 이렇게 너를 위로하며 살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