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사랑스러운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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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사랑스러운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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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사랑스러운 남자
2022.05.03.
토요일. 결혼기사가 났다. 터져도 진작 터졌을 기사였다.
그동안은 거대 기업집단 두 군데서 사력을 다해 간신히 막고 있었을 뿐이다. 결혼이 가시화된 지금,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신데렐라가 성에 들어가더니 왕자님까지 만나게 됐다고 언론이 온통 시끄러웠다. 온라인상에서는 어떻게 만났느냐를 두고 갖은 상상과 추측이 난무했다.
[나린 씨! 이게 정말이야?]
기사가 포털 사이트를 장악한 아침, 민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네.”
직접 소식을 전하지 못한 미안함 때문에 대답하는 나린의 목소리가 한껏 잦아들었다.
[아니, 얼마 전에 증권가 찌라시를 보긴 했는데 안 믿었거든.]
“…….”
[그러니까…… 진짜란 거지? 내가 아는 그 도윤완 부사장님이랑 나린 씨가 결혼을 한다는 거지?]
“……네.”
[세상에.]
민하가 받은 충격이 적지 않은 듯했다. 한참 침묵이 흐른 끝에 풀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린 씨, 미안해. 내가 그간 도 부사장님을 두고 한 얘기는 진심이 아니었어. 내 마음 알지?]
도일 전자 시절, 보고 때마다 당하고 와서 늘어놓았던 넋두리가 마음에 걸렸나 보다.
다소 거칠었던 민하의 언사를 떠올린 나린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걱정 마세요. 윤완 오빠한텐 한마디도 안 했어요.”
[오, 오빠?]
예상치 못한 데서 민하의 충격만 증폭시키고 말았다.
얘기를 더 이어가도 나아질 게 없을 것 같아서, 나린은 서둘러 대화를 수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후로도 무수한 연락이 쏟아졌다. 연락이 끊겼던 학창시절 친구들도 어떻게 번호를 알아냈는지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린은 쉴 새 없이 알림을 띄우는 폰을 서랍 안에 가둬두고 1층으로 내려왔다.
어지러운 하루의 시작에 휘둘리고 있을 새가 없다.
오늘은 승태와 지숙, 수정이 채 여사의 초대를 받아 저녁 식사를 하러 오기로 되어 있었다.
“이따 제가 뭐 도와드릴 건 없어요?”
미옥은 한결같은 질문을 던지는 나린을 못 말린단 얼굴로 쳐다봤다.
“또 그러네. 없어요. 솜씨 좋은 요리사분들 출장 오니까 괜히 주방에 와서 걸리적거리지나 마세요.”
“혹시나 해서요.”
정겨운 타박에 멋쩍은 웃음으로 답한 나린은 그릇장으로 가서 찻잎이 담긴 통을 꺼냈다. 채 여사가 아침마다 즐겨 마시는 차였다.
“사모님께 가려고요?”
“네.”
다기를 준비하는 사이 물이 끓었다. 다반을 받쳐 든 나린이 채 여사의 방문을 두드린다.
주환과 세훈이 일현, 윤완 부자와 필드에 나갔기에 집엔 채 여사와 나린 둘뿐이었다. 골프를 칠 줄 모르는 나린이 가지 않겠다고 하자 채 여사가 같이 남아주었다.
“심심하니?”
창가에 앉아 한가로이 독서를 하던 채 여사는 방 안으로 들어서는 나린을 보고서 책을 내려놓았다.
“조금요.”
“너도 배워야 하는데, 골프.”
“천천히 할게요.”
“그래. 지금은 회사 적응이 먼저지.”
티 테이블로 옮겨온 채 여사가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나린이 우린 차를 한 모금 머금은 그녀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신혼집은 그 펜트하우스로 정한 거야?”
“아뇨. 새로 구하기로 했어요.”
“왜?”
“저희 회사랑 너무 멀어서 안 되겠대요. 전 괜찮은데.”
“보기보다 참 세심해, 도 부사장.”
찻물로 연신 입 속을 적시던 채 여사가 반뜩 고개를 든다.
“잘 됐다. 그럼 인테리어도 싹 새로 할 거 아냐.”
거기까진 미처 생각이 닿아본 적 없던 나린은 어리둥절했다.
도일 그룹 비서실에서 구해올 집이 상태가 안 좋을 리도 없는데. 그냥 들어가 살면 되는 거 아닌가.
“나랑 같이 고르러 다니자.”
채 여사의 눈동자에 반짝반짝, 윤기가 더해졌다.
언젠가 세훈이 했던 말처럼, 나린의 결혼을 기회 삼아 딸 없이 살아온 한을 몽땅 풀 기세였다.
“네.”
이런 걸로 채 여사를 즐겁게 해줄 수 있다면 나린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결정하기 어려울 때마다 채 여사가 교통정리를 해줄 테니 의지도 되었다.
윤완과 나린이 반지를 나눠 낀 그의 생일 이후, 급물살을 탄 결혼 준비는 이제 궤도에 접어들어 순항하는 중이었다.
양가 합의 하에 약혼식은 생략하기로 했다. 바로 결혼으로 넘어가고자 하는 윤완의 의사가 강력히 작용했다.
금 여사는 이 결혼 준비에서 발을 뺐다.
채 여사는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제 입김이 더욱 크게 작용할 수 있으니까.
“드레스 숍도 두 군데 추려놨어. 디자인 나온 거 보고 최종 선택은 네가 직접 해.”
“그럴게요.”
주환과 세훈은 점심 식사 후에 집에 돌아왔다. 윤완도 함께였다.
“어머, 나린이 지금 수업 중인데.”
윤완을 보고서 채 여사가 난처해한다.
“급하게 시간을 바꾸게 됐어. 전화 안 해봤어?”
“폰이 꺼져 있어서요.”
“기사 난 걸로 지인들 연락 온다고 하더니 방에 뒀나 보네.”
윤완의 얼굴에 옅게 실망감이 스쳤다.
세훈이 그의 등을 툭 치며 위로했다.
“좀 기다려. 길어봤자 한두 시간이겠지.”
윤완은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세훈이 의리 있게 친구의 곁을 지켜주었다.
한 시간쯤 흐른 뒤 드디어 나린이 응접실에서 나왔다.
일어나려고 엉덩이를 들썩이던 윤완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뒤따르는 젊은 남자를 보고서 표정이 굳어졌다.
플레어스커트 자락을 팔락이며 거실로 나온 나린은 윤완을 보고도 본체만체였다. 지금은 남자친구보다 선생님을 챙기는 게 더 먼저였다.
“안녕히 가세요, 정 차장님.”
나린이 현관에 붙어 서서 그를 배웅하고,
“정 차장님, 수고했어요.”
소파에 앉은 세훈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정 차장이라 불린 남자는 세훈과 나린에게 순서대로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떠났다.
“경영수업을 저렇게 젊은 사람한테 받는 거야?”
뜰을 거닐러 나와 지켜보는 눈이 없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윤완이 투덜댔다.
타는 듯한 한여름 햇살과 녹음을 만끽하던 나린이 그를 올려다봤다.
“젊은 게 어때서요?”
연공서열을 탈피하려 직급 체계도 단순화하고 호칭도 바꾸는 시대에 나이로 태클을 걸다니. 젊은 경영인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경험이 별로 없을 거 아냐. 뭘 가르치겠어.”
“대리, 과장, 차장 전부 특진해서 그룹에 발탁된 인재래요. 굵직한 의사결정 과정에도 참여했고, 부서장 경험도 있고요.”
“안 돼. 강사 바꿔.”
나린의 변호에도 윤완은 단호했다.
“세훈 오빠가 생각해서 골라준 분인데, 어떻게 그래요.”
“그럼 내가 세훈이한테 말할게.”
대체 또 뭐가 불만이라서 고집을 피우실까.
나린이 곱지 않은 눈을 치뜬다.
“이젠 도일 전자 직원도 아니고, 남의 회사 일에 이래라저래라하는 거 아니에요.”
윤완도 지지 않고 나린을 똑바로 마주 봤다.
“그럼 계속 이렇게 단둘이 만나겠다고?”
아. 불만이 이거였구나. 오랜만에 질투의 화신이 강림하셨구나.
“이게 무슨 단둘이 만나는 거예요? 밖에서 보는 것도 아니고, 밥을 같이 먹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이 정 차장님 한 분도 아닌데. 격주에 한 번, 식구들 다 있는 집에서 수업받는 거잖아요.”
“어쨌든 싫어. 여자 선생님으로 바꿔. 테라 그룹이 얼마나 큰데, 찾아보면 여성 인재도 많을 거야. 아니면 내가 구해주고.”
보기보다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는 남자였다.
이처럼 완벽한 외모, 완벽한 스펙을 갖춘 사람도 사랑 앞에선 불안해하는 게 신기했다.
나린의 머릿속에 파뜩 묘안이 떠올랐다.
“그럼 다른 오빠, 언니들한테 물어봐서 다수결로 결정해요.”
그의 성격상 받아들여질 리 없는 제안이었다.
이 얘길 친구들에게 하는 것도 싫을 거고, 설사 한다 해도 본인이 불리하단 걸 잘 알 테니까.
그렇지만 그의 주의를 슬쩍 돌려놓을 순 있었다. 강사를 바꾸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서 다수결을 시행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윤완은 매사에 치밀하지만 감정적인 부분에서는 틈이 많은 사람이었다.
의외로 단순한 구석이 있어서 때로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운 남자.
나린이 의도한 대로 그의 입술이 불만스레 일자를 그렸다.
받아들이자니 질 게 뻔하고, 안 받아들이자니 승부를 피하는 꼴이었다.
나린은 때를 놓치지 않고 호기롭게 손을 내밀었다.
“폰 줘보세요. 지금 단체방에 물어볼 거니까.”
“됐어. 그냥 둬.”
항복을 외친 윤완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나린을 지나쳐 서너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오도카니 뒤에 남게 된 나린이 살며시 다가가 그의 등을 끌어안는다.
“봐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그를 놓아줄 때까지. 윤완은 얌전히 나린의 두 팔 안에 머물러 있었다.
***
약속한 시간에 맞춰 외삼촌 가족이 도착했다.
식사 전에 잠깐 나린의 방을 구경하러 온 수정의 눈이 바삐 움직이고, 옆에 선 승태와 지숙도 얼떨떨한 얼굴로 호화로운 방 안을 훑었다.
“진짜 넓다. 우리 집 거실만 한 거 같은데? 아니지, 좀 더 큰가?”
수정은 눈을 굴리며 방의 규모를 요리조리 어림셈해보았다.
“앉으세요, 삼촌, 숙모.”
나린이 방 한편에 마련된 테이블로 승태와 지숙을 안내한다. 승태와 지숙은 군말 없이 나린이 지정한 자리에 앉았다.
종종 달려온 수정이 나린의 팔에 매달렸다.
“우리 아빠 넋 나간 것 좀 봐.”
수정은 명랑 만화 여주인공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콕 집어 지목되자 무안했는지 승태가 두어 번 마른기침을 했다.
나린은 가만히 승태를 바라보았다.
채 여사의 초대 의사를 전했을 때 가장 걱정스러웠던 건 승태의 반응이었다.
의외로 승태는 선선히 응했다. 그 모두가 나린을 위하는 마음이었다고, 후에 지숙이 일러주었다.
[그래도 네가 그 집에 들어가 있으니 무 자르듯 딱 자르고 사는 건 어렵지 않겠냐고. 너 속상하지 않게 신경 쓰는 눈치야.]
지숙과의 통화를 떠올린 나린은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졌다.
뚱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승태의 표정을 보니 더욱 그랬다.
“진짜 또 다른 세계다. 부럽다, 연나린. 그래도 난 우리 엄마 아빠랑 사는 게 더 좋긴 하지만.”
어느새 지숙의 어깨에 매달린 수정이 재잘거렸다.
“입에 침이나 발라. 결혼할 사람 나타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거면서.”
곰살맞은 딸의 아부가 싫은 듯 싫지 않은 듯, 지숙은 세상모르고 발랄한 수정을 흘겨보았다.
수정이 뭐라 반박하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식사 준비 다 됐어요.”
미옥의 전언에 나린은 승태와 지숙, 수정을 이끌고 1층으로 내려왔다.
다이닝룸으로 들어서자 기다란 테이블 가득, 유럽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음식들이 다양한 색감을 뽐내며 차려져 있다.
주환과 채 여사가 있는 자리이다 보니 수정도 크게 호들갑은 떨지 않았다. 살짝살짝, 조용히 감탄할 따름이었다.
식사 자리의 대화는 채 여사가 주도했다. 승태와 지숙은 채 여사의 질문에 대답만 할 뿐 먼저 화두를 꺼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디저트를 먹을 때쯤 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금세 적응한 수정의 수다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식사 자리가 끝날 무렵, 세훈은 기가 쏙 빨린 상태가 되었다.
“네 외사촌은 어쩜 너랑 하나도 안 닮았냐.”
식사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면서 세훈이 나린의 귓가에 대고 빠르게 속삭였다.
나린은 어디서든 존재감을 내뿜는 수정을 존경스럽게 쳐다보았다.
거실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가 좀 더 오갔다.
어느새 밤이 깊어 손님들을 보내야 할 시각.
“저희 기사 대기시켜두었으니 타고 가세요.”
“아닙니다. 지하철 타면 금방인데요.”
채 여사가 건넨 호의를 승태가 한사코 괜찮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채 여사가 너무도 강하게 주장하여 결국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론 종종 이렇게 자리 마련하겠습니다.”
뜰까지 배웅을 나온 채 여사가 끝인사를 전했다.
처음 나린이 이 집에 왔을 때 되도록 왕래가 적었으면 한다고 부탁했던 게 무색하리만큼 180도 달라진 태도였다.
“다음엔 저희 집에서도 한번 모실게요. ……괜찮으시면요.”
“그러시죠.”
지숙의 조심스러운 청에 채 여사가 미소로 화답했다.
“삼촌.”
홀로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온 나린이 승태를 부르자, 승태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오늘 와줘서 고마웠어요.”
좀 더 가까이 다가선 나린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승태는 대답 대신 나린의 손을 감싸 쥐었다.
손에서 오가는 온기가 마음이 전하고자 하는 무수한 말을 대신했다.
“우리 아빠 벌써부터 연습 시작했어, 신부 입장 연습. 긴장되시나 봐.”
뒤에서 수정이 쾌활한 목소리로 일러주었다.
당황한 승태가 눈썹을 치켜 올려 보였지만 아랑곳할 리 없는 수정이었다.
“구시대적이다 어쩐다 해도 꼭 우리 아빠 손잡고 들어가야 해. 신랑 신부 동시 입장, 이런 거 안 된다.”
수정의 당부에 나린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렇잖아도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괜찮을 거란 걸 다 알면서도, 수정이 서야 할 자리에 먼저 서게 된 게 조금은 미안해서.
“그럴게.”
짧은 인사가 오간 후 승태와 지숙, 수정은 차를 타고 떠났다.
멀어져가는 그들을, 나린은 한참이나 미소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