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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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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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미안해요
2022.04.22.
도일 그룹 비서실에서 테라 그룹 비서실을 통하자, 소식은 자연히 채 여사의 귀에도 들어갔다.
나린이 금 여사와 만나기로 한 날 아침.
채 여사는 꼭두새벽부터 부산을 떨며 나린의 차림을 챙겼다. 그 이른 시간에 헤어 디자이너까지 불러 머리도 예쁘게 세팅해주었다.
“저, 큰엄마…….”
“응?”
“이렇게 하고 출근하면 사람들이 다 쳐다볼 것 같은데요.”
거울 앞에 선 나린은 과하게 화려한 귀걸이와 목걸이를 매만지며 어색해했다.
하지만 채 여사는 꿈쩍하지 않았다. 꼭 이 날만을 별러온 사람처럼.
“그래도 어쩔 수 없어. 금 여사가 얼마나 까다로운데. 겉모습부터 딱 기선제압을 해야지.”
싸우러 나가는 것도 아닌데 기선제압이라니.
저보다 더 비장한 채 여사를 보며 나린이 지그시 미소를 누른다. 그사이 채 여사가 진지하게 덧붙여 말했다.
“퇴근하고 집에 들러서 옷 갈아입을 시간이 없잖니. 그러니까 약속을 아예 주말로 잡지 그랬어.”
나린도 그러고 싶었지만 윤완이 주말은 반드시 그와 보내야 한다며 양보해주지 않았다.
경영수업도 예정되어 있기에 다른 일정을 끼워 넣기 어렵기도 했고.
“그럼 가볼게요.”
다 끝났다고 판단한 나린이 출근길을 서두르려는데,
“잠깐만.”
채 여사가 마지막으로, 나린이 손에 든 가방을 직접 골라온 다른 가방으로 바꿔주었다.
가방 안의 소지품까지 모두 옮겨 담긴 후에야 채 여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아.”
작심하고 꾸며놓으니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없다.
하얀 피부는 곱게 빚은 도자기 같고 또랑또랑한 눈동자는 계곡물보다 더욱 맑은 빛을 발한 채.
이만하면 금 여사도 짧았던 제 안목을 반성하겠지.
“잘 다녀와.”
채 여사는 뿌듯한 마음으로 나린을 현관까지 배웅했다. 신발을 제대로 갖춰 신는지 마저 확인할 요량에서였다.
한 비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회사에 도착한 나린은 로비에 이르자마자 냅다 화장실로 뛰어갔다.
일단은 액세서리라도 빼고 들어가는 게 좋겠다.
이게 없어도 원피스 디자인이 독특하여 눈에 띄겠지만.
그래도 있는 것보단 없는 게 나을 것 같으니.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예상대로 호기심 어린 동료들의 시선이 힐금힐금 날아들었다.
“대리님, 오늘 무슨 약속 있어요?”
번죽거리기로 소문난 옆 팀 한강호 과장이 굳이 파티션을 넘어와 말을 걸었다.
다들 나린을 어려워하는 가운데 그나마 말을 붙여주는 몇 안 되는 동료였지만, 그다지 반갑진 않았다.
나린은 어색하게 웃는 걸로 답을 때웠다. 개인 일정까지 시시콜콜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말을 아껴야 하는 곳이다. 도일 전자에서 이름 없는 직원 중 하나였을 때와는 처지가 달랐다.
나린의 무반응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계속 말을 붙였다.
“어디 기획사 오디션 보러 가는 사람 같네요. 오늘 스타일링 진짜 잘 어울려요.”
대꾸하고 싶지 않아서 누가 구해줬으면 하던 찰나에 책상에 놓인 전화벨이 커다랗게 울렸다.
나린이 냉큼 전화기를 들자 강호는 무안한 얼굴이 되어 자리로 돌아갔다.
[운영총괄님께서 찾으십니다.]
운영총괄은 세훈을 가리켰다. 대표이사 바로 아래서 실권을 쥐고 있는 직책이었다.
수화기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나린은 곧장 같은 층 반대편 끝에 위치한 세훈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머니 작품이야?”
한껏 차려입은 나린을 보고 세훈이 웃음을 터뜨린다.
“네.”
“아주 딸 없이 살아온 한을 푸시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딸이라는 표현에 머쓱해서, 나린이 슬그머니 말머리를 돌렸다.
“아, 이거.”
두툼한 결재 판 하나가 대뜸 내밀어졌다.
나린은 검은 결재 판에 감싸인 보고서를 두 손으로 꼭 받아 쥐었다.
대리 직책이라 대면보고 할 일이 많지 않고 웬만한 품의는 전부 온라인 결재로 진행해온 터라 결재 판은 다소 생소했다. 옛날 드라마에서나 보던 유물 같았다.
“내가 내주는 숙제. ROI 검토해봐. 아직 오픈하면 안 되는 투자니까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커버를 여니 딱 봐도 수천억은 우스울 것 같은 제목이 위용을 드러냈다.
‘보라카이 로사 호텔 인수의 건’
아직은 버거운 업무지시였지만 말 그대로 숙제 삼아 해보기로 했다.
제대로 된 결론까진 못 내도 검토해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볼게요.”
“왜 이렇게 서둘러? 커피 한잔하고 좀 더 있다가 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나린을 세훈이 다급하게 붙들었다.
“남들이 보면 뭐라고 해요.”
“뭐 어때. 나랑 사촌인 거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젠 이런 것도 좀 누리고 그래.”
그러다 변하게 될까 두렵다.
조금이라도 경계를 느슨히 하면 손에 쥐여진 힘에 압도당할지 몰랐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했지만 결코 신혜원이나 윤재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진 않으니까.
“숙제하려면 시간이 없거든요. 부지런히 일해야 정시 퇴근을 하죠. 정시 퇴근을 해야 인건비 절감을 하고요.”
결재 판을 꼭 안아 든 나린은 기어이 세훈의 손길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반박할 수 없는 사유를 제시한 나린이 집무실을 빠져나간 뒤,
“역시 쉽지 않은 아이야.”
세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
두통이 이는지 일현이 손바닥으로 머리를 세게, 꾹 눌렀다.
윤완이 출근하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는 만큼 문형의 압박도 거세어지고 있었다.
“적시 경영이 얼마나 중요한데. 윤완이가 손 놓고 있는 사이에 제때 의사결정 못해서 놓치는 기회들은 다 어쩔 거야?!”
아들인 제 능력보다는 손자에 대한 기대로 물려받은 자리임을 잘 안다.
맏이라는 명분을 갖추긴 했어도, 윤완이 아니었더라면 좀 더 추진력 좋은 동생이 자리를 대체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았다.
문형은 그런 아버지였다. 공과 사가 명확했고 회사 일에 있어서는 절대 인정에 이끌리는 법이 없었다.
윤완은 문형을 많이 닮았다. 문형이 친자식보다 손자인 그를 더 아끼는 이유였다.
가족으로서도, 경영인으로서도.
‘오늘 만나서 사과한다고 했으니 윤완이도 좀 누그러지겠지.’
일현은 저녁에 있을 화연과 나린의 만남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
연화랑. 종업원의 안내를 받은 금 여사가 룸 안으로 들어선다.
한 달 만에 다시 같은 장소에서 마주한 나린은 전혀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난번에 봤을 땐 옷도 헤어도 메이크업도 액세서리도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던 것 같은데.
‘테라 그룹으로 들어갔다고 하더니. 채 여사의 손을 거치니까 다르긴 다르네.’
놀란 마음을 능숙하게 감춘 채 여사는 나린의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나린이 허리 숙여 인사하자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히 가식이었다.
“내가 좀 늦었죠?”
시간 맞춰 도착해놓고 근처에 차를 세우고 있다가 일부러 늦게 들어왔다. 자존심을 내버려야 할 상황이 오자 엄한 데서 객기를 부리게 된 거였다.
“아닙니다.”
나린은 차분하고 단아하게 대답했다.
금 여사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표정에 감정이 다 드러났는데 지금은 도통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샌디에이고에서 당돌하게 제 생각을 전하던 모습을 잊어선 안 된다. 만만히 봐선 안 될 아이였다.
차를 내온 종업원이 나간 뒤 금 여사가 무겁게 입을 뗐다.
“우선은.”
말해야 해.
딱 한 번만 참으면 돼.
“이렇게 돼서 유감이에요.”
차마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아 유감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했다.
말로 뱉고 나니 패배가 더욱 쓰라리게 다가오며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아들의 결혼 상대를 내 마음에 들게 찾으려다 보니 일이 좀 시끄럽게 됐어요.”
“…….”
“이제는 한발 물러서서 윤완이의 생각을 존중해주기로 했고요. 내 며느리이기 이전에 우리 윤완이랑 같이 살 사람이니까요.”
무심한 아들을 키우면서 며느리에 대한 욕심을 함께 키웠다.
취향도 집안 환경도 비슷한 며느리를 골라서 고부가 다정히 파티에 가고 모임에 가고 전시회에 가고.
그럴 때마다 시샘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둘러싸이는 광경.
그런 자그만 꿈을 꿨을 뿐이다.
출생의 비밀로 입방아에 오르내릴 며느리가 아니라.
어디서 어떤 교육을 받고 자랐는지 모르는 여염집 아이가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 실패했을 뿐이야.’
그게 미안할 일은 아니잖아. 꿈이 깨진 것만으로 대가는 치르고도 남았는데.
금 여사의 사과 아닌 사과를, 나린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어른이 말을 했으면 대답이 있어야지……?”
금 여사가 온화한 얼굴의 가면을 쓰고 나린을 다그친다.
나린은 하릴없이 고개를 들었다.
입가엔 평소와 다르게 조금은 딱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도 본의 아니게 심려 끼쳐 드린 점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금 여사의 오른쪽 눈썹 끝이 살짝 이지러졌다. 불만을 티 내고 싶지 않을 때의 버릇이었다.
‘유감?’
그러니까, 내가 미안하다고 하지 않으니 저도 죄송하다고 못하겠다는 거야?
그러나 더는 몰아세울 수 없었다. 나린과의 사이가 이 이상 틀어지면 곤란했다.
이젠 꼼짝없이 며느리로 맞아야 할 아이니까.
사과는 이걸로 매듭짓고, 이제 원하는 바를 얻어내야겠지.
“우리 윤완이가 출근을 거부하고 있어요. 알고 있죠?”
“네…….”
“나린 양이 설득을 좀 해줬으면 하는데요.”
남편으로부터 받은 지령 중 가장 급한 게 이거였다.
“안 그래도 저도 설득 중인데…… 모처럼 받은 휴식의 기회이니 좀 더 누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우리 윤완이가요?”
“네.”
금 여사는 작게 한숨을 토했다.
“다시 한번 얘기해줘요. 오늘 나한테 사과받았다고 하고…….”
“…….”
“이젠 내가 두 사람, 더는 반대하지 않는다고요.”
말을 마친 금 여사가 목을 축인다.
“네.”
형식적으로 답한 나린은 저에게서 슬쩍 비켜나 있는 금 여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와의 결혼은 곧 금 여사와도 가족이 된다는 의미였다.
결혼은 그런 거였다. 사랑하는 사람뿐 아니라 그 사람의 가족도 함께 받아들여야 하는 것.
결혼과 연애가 다르다는 말이 더욱 묵직하게 다가왔다.
이젠 그냥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다. 턱밑까지 차오른 현실이었다.
이렇게 틀어져 버린 사이도, 이토록 안 맞는 성격도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묶일 수 있을까.
좋든 싫든 평생 얼굴 보며 살아가야 할 텐데 그게 정말 가능한 걸까.
“……건강은 괜찮으세요?”
그럼에도 손을 내밀 수밖에 없는 이유.
“내…… 건강?”
찻잔을 내려놓던 금 여사가 잘못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네.”
사랑하는 사람을 낳고 길러주신 분이니까.
“아프셨다고 들었는데,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소중한 사람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해주신 분이니까.
“마음으론 몇 번이고 찾아뵙고 싶었는데, 저를 보는 게 별로 유쾌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 참았습니다.”
금 여사의 얼굴에 잠깐 당황한 빛이 돌았다.
“괜……찮아요. 걱정 안 해도 돼요.”
꾀병이었단 걸 윤완이가 모를 리가 없는데. 말을 안 한 건지.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체해주는 건지.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린의 눈을 피하게 되었다.
“집에 돌아가면 채 이사님께도 내가 사과하더라고 전해줘요, 꼭.”
자리를 정리하기 직전 금 여사는 잊지 않고 신신당부했다.
윤완을 설득하는 것. 채 여사에게 알리는 것. 사과한 목적이 이 두 가지였음이 명확히 드러났다.
유감이란 표현마저 진심 한 톨 없는 겉치레에 불과했으나, 나린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윤완을 생각하면 금 여사와의 사이가 이만큼 풀어지는 걸로도 다행이었다.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으니 어쨌든 먼저 손 내밀어준 셈이다.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때론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길이 되기도 하니까.
금 여사를 따라 일어선 나린이 미닫이문을 제 쪽으로 당기자 금 여사의 앞에 통로가 놓였다.
룸 밖으로 발을 딛으려던 금 여사는 멈칫, 나린을 돌아봤다.
아주 잠깐의 망설임 끝에,
“……미안해요.”
금 여사의 입에서 결코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말이 튀어나왔다.
나린은 멍하니 금 여사를 쳐다봤다.
“……네?”
“그냥…… 채 이사님한테 오해 사고 싶지 않아서 확실히 사과해두는 것뿐이에요. 그러니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요.”
붉어진 볼을 감추려 황급히 몸을 튼 금 여사는 뒤도 보지 않고 그대로 연화랑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