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변화의 모든 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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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변화의 모든 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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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변화의 모든 게, 다
2022.04.19.
밤늦게까지 이어진 야외 파티 끝에 현주와 은영은 펜션에 남겠다고 했다. 옷이며 생필품이며 넉넉히 구비되어 있어 밤을 보내기에 무리가 없었다.
나린도 내심 언니들과 함께하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삼키며 윤완을 따라나섰다.
커플 모임 참석만으로도 엄청난 희생이었을 텐데, 혼자 쓸쓸히 돌아가게 하는 벌까지 줄 순 없었다.
“왜 안 하던 짓이에요?”
차가 출발하자마자 나린이 찰싹, 윤완의 팔을 때리며 묻는다.
“뭐가?”
“스테이크 썰어준 거요. 평소엔 안 그러면서.”
“아, 그거. 커플 모임 나가면 다 그렇게 하는 거라던데.”
윤완은 표정 변화 없이 대꾸했다.
“누가요?”
“그냥, 아는 사람이.”
혹시나 하여 또 강 과장에게 조언을 구했다. 지난번 승태의 집에 방문할 때 받은 조언이 제법 도움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까지 비서에게 조언을 들었다고 하면 왠지 모양 빠지는 것 같아서 나린에겐 비밀로 하고 싶었다.
“가기 싫다더니 미리 그런 것도 알아봤어요?”
또 막상 와서 서툰 건 싫었나 보다. 나린은 윤완의 행동이 마냥 귀엽게 생각되었다.
귀여워 보이는 순간 끝이라던데. 그러면 더 이상 출구가 없는 거라던데.
날이 갈수록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게 두려우면서도 행복했다.
이런 상대를 만나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결코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커다란 축복이었다.
“무슨 조언 받았는지 궁금해요. 스테이크 대신 썰어주라고 콕 집어서 말해줬어요?”
뭘 그런 것까지 묻느냔 입장을 고수하던 윤완은 똘망똘망한 나린의 눈빛에 또 굴하고 말았다.
“그냥……. 다른 남자친구들이 해 주는 거 나만 안 해 주지 말고. 더 나아가 나만 잘 해주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고. 그 정도?”
그래서 1박 해도 상관없단 거짓말까지 했나 보다. 준우와 세훈이 여자친구 말에 동조해주는 걸 보고.
나린은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웃어?”
“귀여워서요.”
“누가? 네가?”
“아뇨. 윤완 오빠가요.”
윤완은 벌게진 얼굴로 인상을 쓰며 운전기사 쪽을 힐금했다. 뒤통수밖에 안 보이는데도 왠지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민망해진다.
“그만 웃어.”
“알았어요.”
곤란해하는 기색을 알아차린 나린이 힘껏 웃음을 참아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나린은 윤완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다시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최대한 기사에게 들리지 않도록.
“전에 세훈 오빠가 오빠더러 이중인격인 거 같다고 했었거든요?”
연세훈. 없는 데서 뒷담화를 했다 이거지.
“근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윤완이 발끈, 입을 떼려는데,
“그래서 좋다고요……. 나한테만 세상 다정하고 귀여운 남자친구라서. 다른 사람은 모르는 모습을 잔뜩 볼 수 있어서.”
나린이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고작 눈을 마주한 것뿐인데 마음이 온통 들쑤셔졌다. 저도 모르게 올라갔던 윤완의 손이 움찔하며 제자리를 찾았다.
이토록 사랑스러운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니.
다음부터 멀리 갈 땐 운전석과 뒷좌석이 차단된 차를 선택해야겠다.
“바로 들어가 봐야 하지? 채 이사님 기다리시니까.”
“네.”
보내주기 싫다는 뜻을 행간 가득 채웠으나 읽어내지 못한 나린은 순진 무결하게 대답했다.
얼른 결혼하고 싶은데 확답을 들으려면 아직 열 달이나 남았다. 열흘도 못 견딜 판에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따로 없었다.
더더욱 비극적인 건 이 함정을 제 손으로 팠다는 거다.
“나린아.”
“네?”
“혹시 맹자 읽어본 적 있어?”
“갑자기 웬 맹자요? 경영하느라 바쁘면서 그런 것도 읽어요?”
그 바쁜 경영을 위해 읽은 고전이었다. 순수학문과 실용학문의 시너지를 위해. 시야를 넓히고 통찰력을 기르기 위해.
그러나 지금은 그런 배경까지 시시콜콜 설명해줄 여유가 없었다.
바로 짚어주고자 하는 구절로 넘어간다.
“거기에 그런 구절이 있어. 차일시피일시(此一時彼一時)라.”
“그게 무슨 뜻인데요?”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
분명 현대 한국말로 번역해서 들었는데도 나린은 여전히 무슨 말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러니까…… 때가 달라지면 사정도 달라진단 뜻이야. 그땐 그때의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고, 그 사정이 변하면 지금은 그때의 결정을 바꿀 수도 있단 말이지.”
윤완은 매우 친절하게 뜻풀이를 해주었다.
일방적으로 일 년의 기한을 철회하겠다고 할 수 없어서 옛 성현의 구절까지 끄집어낸 거였다.
그러니 이제 그만 애타는 내 속을 눈치채주겠니.
“음……. 그러니까 우리 관계가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나 윤완의 바람과 달리 나린이 받아들인 방향은 엉뚱했다.
하아……. 이 말을 그렇게 해석하다니.
“아니. 우린 안 변하지. 넌 몰라도 나는. 나는 절대 안 변해.”
윤완은 자못 어두워진 나린의 얼굴에 대고 재빨리 변명했다.
“……근데요?”
말하면 할수록 수렁이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 처박히기 전에 그만 발을 빼는 게 좋겠다.
“……모레부터 새 회사에 출근하잖아. 이젠 네 위치가 다르니까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유연한 대처가 중요하다고.”
“아.”
나린은 마침내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이렇게 일단락되나 싶었더니.
“내일은 서점 가서 맹자 살래요. 다른 거 또 추천해줄 책 없어요? 회사 경영에 도움이 될 만한 걸로요.”
이젠 독서에 나린과 함께할 시간을 빼앗길 불운이 닥치고 말았다.
윤완은 요청받은 책 추천 대신 한숨만 길게 뽑아냈다.
***
나린이 테라 호텔로 첫 출근을 한 날, 점심.
채 여사가 나린의 일로 의논하고 싶은 게 있다며 윤완을 불러냈다. 윤완은 채 여사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다.
“엊그제 어머니 만났어.”
메인 요리까지 마치고 다과를 들 차례에, 내내 곁가지를 두드리던 채 여사가 대뜸 본론으로 옮겨왔다.
윤완을 대하는 말투는 전에 비해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이젠 그를 도일 전자 부사장이 아닌, 나린의 남자친구로 보는 듯했다.
채 여사는 윤완에게 금 여사와 만나서 나눴던 대화의 자초지종을 상세하게 일러줬다.
긴 얘기 끝에 윤완이 신중하게 반응했다.
“일단 좀 더 두고 보시죠. 어머니께서 정말 사과를 하실지……. 말씀만 하시고 모른 척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단단히 붙잡힌 중심을 확인한 채 여사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언제 봐도 참 괜찮은 사윗감이란 말이지.
“사과는 도 부사장도 받아야지.”
그래서 그의 입장도 헤아리게 되었다. 나린만큼이나 어여쁜 자식 같아서.
“저는 그래도 아들이니까요.”
윤완이 쓰게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부모이니 나린을 떼어놓고 보면 또 너그러워지는 면도 있나 보다.
채 여사는 분위기를 바꿀 요량으로 은근한 미소를 그려냈다.
“프러포즈할 때 나린이한테 일 년 뒤에 대답하라고 했다며? 왜 그랬어?”
“저도 후회 중입니다.”
채 여사의 의도와 달리 윤완의 미소는 더욱 쓰디써졌다.
“후회되면 다시 잘 얘기해봐. 결혼 서두르는 거 어떻겠느냐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 채 여사가 권유했으나 윤완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
“어찌 됐든 일 년간 지켜보고 결정하라고 했는데, 나린이가 먼저 생각을 돌리기 전에 제가 번복할 순 없습니다.”
그냥 무작정 제 방식대로 사랑을 밀어붙이는 남자가 아니다. 연인을 존중할 줄 알고, 소중히 대해줄 줄 아는 좋은 사람이다.
좋은 남자이기 이전에 좋은 사람. 결혼은 그런 상대와 해야 한다.
‘우리 나린이가 정말 괜찮은 짝을 만났구나.’
이쯤 되니 세훈이 왜 이들을 부러워하는지 알 것 같아졌다.
동시에 이 예쁜 커플을 내가 데리고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욕심도 고개를 들이밀었다.
“실은 너무 화나서 확 데릴사위 삼아버릴까도 했었어.”
채 여사가 반쯤 장난스럽게 말하자, 윤완이 픽 미소를 토해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찻잔을 내려놓던 채 여사의 손이 삐끗했다.
달그락. 찻잔이 받침에 부딪히는 소리가 무심한 적막을 밀어낸다.
“그렇게 웃는 거…… 거의 못 본 거 같은데.”
“저도 제가 그렇게 안 웃고 살았는지 몰랐습니다.”
윤완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따뜻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란 것 자체를 몰랐을지도.
“……나린이 덕분이야?”
“네.”
그가 보이는 변화의 모든 게, 다 그녀 덕분이다.
얼굴에, 또 마음에 이는 따뜻한 바람이 전부 싱그러운 미소가 예쁜 나린이 덕분이었다.
“보기 좋아, 두 사람.”
채 여사는 연신 흐뭇해했다.
“다음엔 우리 나린이랑 같이 보자. 셋이. 도 부사장 불편할 테니 세훈인 빼줄게.”
곧 위계가 생길 관계이니 불편할 거란 걸 감안하여 채 여사가 센스를 발휘했다.
세훈이 언급되자 윤완은 채 여사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나린이랑 결혼한 후에도 지금처럼 연세훈 부사장이랑 격의 없이 지내면 예의 없다 나무라실 겁니까.”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돌직구를 날렸다. 그에겐 표현을 가다듬을 여유도 없이 절박한 문제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세훈의 손아래사람이 된다니. 정말이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준우라면 또 몰라.
결혼하고 나면 연태용 회장이나 연주환 부회장보다는 채 여사와 만날 일이 더 많았다.
그러니 미리 양해를 구해놓으면 세훈의 기고만장한 태도를 눌러줄 수 있을 거였다.
집안의 어른인 채 여사가 눈감아준다는데 그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니. 원래 친구 사이이니 이해하지. 그리고 그런 거 따지면 괜히 사이만 멀어져.”
채 여사의 쿨한 답을 들은 윤완은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테라 호텔가에 채 여사가 버티고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참. 근데 두 사람, 결혼하면 어디서 살 생각이야?”
외아들이니 본가에 들어가 살 확률이 높다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그의 계획은 다르길 바라며 채 여사가 묻는다.
방금 내가 하나를 내주었으니 너도 하나를 다오. 그런 물물교환의 시도이기도 했다.
나린이 금 여사와 한집에 살아야 한다면 채 여사도 이 결혼을 마냥 쌍수 들고 환영할 수만은 없었다.
세훈을 격의 없이 대하는 것과 분가하는 것. 형평에 안 맞게 채 여사가 요구하는 게 좀 더 크긴 하지만.
그래도 나린이의 인생을 구해줘야지.
금 여사처럼 비상식적인 어른을 감당하며 살게 둘 순 없으니까.
“제 펜트하우스에서 지낼까 합니다.”
“분가하겠다는 뜻이야?”
“네.”
다행히 윤완도 같은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나 보다.
혹시라도 합가 예정이라고 하면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걱정했더니.
“어른들께서 그러라고 하실까?”
안도하는 마음을 감춘 채 여사는 침착하게 실현 가능성을 떠보았다.
“아버지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벌써 반승낙을 받았다는 말에 그제야 완전히 마음을 놓게 되었다.
금 여사에겐 하나도 미안할 게 없었다. 다 제 무덤을 제가 판 꼴이니까.
“도 부사장은 언제 만나도 말이 참 잘 통해.”
“실은…… 저도 그렇습니다.”
그 꼿꼿하다는 도윤완 부사장으로부터 듣는 감언에 채 여사는 내심 우쭐했다.
아내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더니. 말뚝이 되어 절을 받는 기분도 생각보다 괜찮은걸.
“우리 나린이 오늘 첫 출근인데, 잘하고 있으려나.”
채 여사가 차향을 음미하며 멀리 창밖을 응시하고,
“잘할 겁니다. 저희 회사에서 내보낼 때, 놓쳐서 굉장히 안타까워했던 인재니까요.”
팔불출처럼 윤완이 대답했다.
***
나린의 입장에선 잘하고 말고 할 새가 없는 첫날이었다.
팀원들을 소개받고, 팀이 하는 역할과 연간 목표에 대해 간략한 브리핑을 받았다.
면담을 할 때 팀장이 맡고 싶은 업무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린은 처음이니 뭐든 주어진 업무를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 결과 도일 전자에서의 업무 경험을 살려 신사업 투자 검토 셀에 들어가게 됐다.
셀 리더는 나린을 어려워했으나, 적극적으로 이것저것 물으니 또 친절히 답을 해주었다.
있는 친화력, 없는 붙임성을 모조리 끌어모아 새 동료들에게 차츰 다가서고 있을 즈음.
정시 퇴근을 30분 남겨두고 도일 그룹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금화연 여사님께서 뵙길 원하셔서 연락드렸습니다. 오늘 저녁 여덟 시, 연화랑이요.]
지난번 전화를 걸어왔던 목소리와 같은 목소리였다. 허스키한 특징 때문에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늘이요?”
[네.]
윤완에게 알리지 않고 덥석 수락해도 될까. 채 여사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한마디 물음만 던져놓고 고민을 거듭하다가 곧 다부지게 말했다.
“일단 끊으시고, 저희 비서실 통해서 정식으로 약속을 잡아주시겠어요?”
폰 너머의 상대가 당황하여 어버버하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나린은 단호히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