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네가 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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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네가 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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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네가 원하면
2022.04.15.
미쉐린 별 세 개가 훈장처럼 빛나는 한식 레스토랑, 연화랑.
처음 나린을 불러 대면했을 때와 똑같은 프라이빗 룸에서 금 여사가 새로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이쪽입니다.”
인기척이 나고, 문이 양 옆으로 밀리는 걸 본 금 여사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사이를 지나온 채 여사가 금 여사의 맞은편에 선다.
“일찍 오셨네요.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생각보다 길이 잘 빠져서요. 연 회장님 소식은 들었습니다. 경황이 없어 이제야 안부를 여쭙네요.”
“네. 다행히 수술도 성공적이고 회복 경과도 좋으세요. 댁은 평안하시죠? 아프셨다고 들었는데, 좀 어떠신가요?”
“이제 괜찮습니다.”
대본을 외듯 막힘없이 주고받고는 있지만 무엇 하나 영혼이 담긴 구절이 없었다.
메마른 인사를 끝마친 두 재벌 사모님은 거울을 보듯 똑같은 자세로 착석했다.
“오늘 뵙자고 하신 용건은요?”
채 여사는 기세등등한 마음을 감추고 금 여사를 바라보았다.
나린의 말을 듣고 기다리길 잘했다. 물론 나린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기다리라고 한 건 아니었겠지만.
“애들 결혼 문제를 좀…… 의논할까 해서요.”
금 여사의 표정은 끝을 모르는 낭떠러지처럼 어둡고 침울했다. 한 자 한 자 발음할 때마다 모래를 씹듯 괴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가진 힘만 믿고 날뛰다 자멸한 상대를 앞에 두고 채 여사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안 그래도 우리 나린이한테 물어봤는데, 아직 둘이 확실하게 결혼 약속을 한 건 아닌 거 같더라고요.”
채 여사는 아쉬울 게 하나 없다는 어조였다. 협상테이블에 앉았으니 유리한 위치를 점한 만큼 객기를 부려볼 참이었다.
여전히 모래 씹은 것처럼 텁텁한 표정을 한 금 여사가 대화를 이었다.
“확실하게 말은 안 했어도 서로 마음은 정한 모양이던데……. 저희라도 나서서 일을 진전시키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남편에게 등 떠밀려 나온 자리. 안팎이 다른 말을 하려니 곤욕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 당돌한 아이가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도 회장의 저택에 다녀온 후 일현의 태도가 돌변했다.
직접 만나보니 순수하고 맑다나 뭐라나.
“어쨌든 테라 호텔 손녀고, 윤완이한테 나쁠 게 없지. 삼십 년 가까이 된 일로 남들 입에 좀 오르내리는 게 뭐 그리 무섭다고.”
“…….”
“무엇보다 윤완이 녀석이 회사를 나올 생각을 안 한다니까? 정말 그 녀석이 후계자 자리를 내려놓는 걸 봐야겠소?”
상황이 이러할진대 금 여사도 타격 없는 반대를 지속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모양새 좋게 윤완과 나린이 먼저 숙이고 들어오길 바랐다.
효과 없는 꾀병 시위를 접은 그녀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그래도 부모인데. 낳아서 길러준 엄만데.
얼굴을 보면 마음이 물러지겠지. 내 뜻을 알아차리고 맞춰주는 척이라도 하겠지.
하지만 윤완이 일절 연락을 피하고 있는 탓에 만날 길은 묘연했다. 달리 방법이 없는 금 여사는 그의 펜트하우스까지 찾아갔다.
그러나 공연한 걸음으로 그쳤다. 보안 데스크 직원들은 절대 금 여사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서실에서 백방으로 노력해봤으나 전부 무위로 돌아갔다. 윤완이 얼마나 단단히 단속을 해놨는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빙하보다 냉랭하고 철벽보다 단호한 아들의 대처에 금 여사는 끝내 백기투항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이 자리였다.
일련의 과정을 떠올린 금 여사가 꾸역꾸역 한숨을 삼키는데,
“근데, 우리 나린이한테 사과는 하셨나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전제조건이 있다는 걸 떠올린 채 여사가 질문을 던진다.
“네?”
금 여사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설마 날더러 그 아이에게 굽히고 들어가라는 뜻은 아니겠지.’
채 여사는 동요 없이 금 여사의 눈을 응시했다.
“당연히 사과부터 하시고 절 이 자리에 부르신 게 아닌가요?”
“…….”
말문이 턱 막힌 금 여사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금 여사의 반응을 살피던 채 여사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당사자에 대한 사과도 없이 어물쩍 넘어가려는 모양이다.
“제가 알아들으시도록 말씀드렸는데 기어이 불러내서 상처 주는 발언을 하시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도 부사장을 미국 별장에 가두기까지 하시고……. 전해 듣는 제가 다 황당했습니다.”
적나라하면서도 공격적인 표현에 금 여사는 반사적으로 손사래를 쳤다.
“가두다뇨. 그런 게 아니라…….”
“어쨌든 도 부사장의 의사에 반해서 강제로 별장에 머물게 한 게 아닌가요?”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 정말이지 꿀 먹은 벙어리 신세가 따로 없어졌다.
상대가 벼랑 끝에 선 걸 확인한 채 여사는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더욱 거세게 쏘아붙였다.
“저도 도 부사장이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닙니다. 시어머니 자리가 이렇게 나오는데, 도 부사장이 아니라 누가 와도 눈에 찰 리가 없죠. 하지만 우리 나린이를 생각해서 나온 겁니다.”
“…….”
“사과를 해도 받아줄까 말까 한 상황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양 결혼 얘기부터 꺼내시는 건 좀, 말이 안 되지 않나요?”
“…….”
더욱 위압적으로 보이도록 채 여사가 도도하게 팔짱을 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린을 대변해 한바탕 퍼부어주다 보니 대리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진다.
본의 아니게 이 상황을 즐기게 된 채 여사는 한발 더 나아가 마음에 없는 소리까지 해보기로 했다.
“며칠 전에 태성 그룹 장남이 귀국했다지요?”
“…….”
“전에 어느 미디어 행사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아주 듬직하고 성실해 뵈더라고요. 인상도 좋고.”
“…….”
“그 댁도 마침 혼처를 찾고 있다던데…….”
채 여사의 의도대로 금 여사의 낯빛이 변했다.
나린에게 다른 상대가 생긴다고 하면 기뻐해야 할 입장임에도 이런 식으로 비교를 당하니 왠지 기분이 상했다.
‘태성 그룹을 얻다 갖다 대. 대한민국에서 우리 윤완이 만한 신랑감이 어디 있다고.’
그리고 이건 결코 기뻐할 얘기가 아니다.
테라 그룹에서 진짜 태성 그룹과 혼사를 진행시키기라도 하면……. 남편의 추궁을 떠나 아들로부터 의절을 당하게 될지도 몰랐다.
“나린 양은 곧, 따로 한번 만날 생각입니다만…….”
하는 수 없이 굴복하면서도 금 여사는 채 여사가 야속하기만 했다.
‘그래도 그렇지. 직접 사과를 하라니.’
같은 재벌가 사모님이면서 너무 체면을 안 봐주는 게 아닌가.
금 여사가 속으로 원망스러워하는 줄 다 알면서도, 채 여사는 끝까지 야속하게 나왔다.
“그럼 먼저 사과부터 하시고 결혼 얘기는 다음에 진행하는 걸로 하시죠.”
말을 마친 채 여사는 금 여사가 사전에 주문해둔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
차 뒷좌석에 앉은 윤완의 입이 꾹 다물린 채 미동도 없다. 전방을 주시하는 눈빛은 얼음보다 시리고 칼날보다 뾰족했다.
지금 이 나들이가 얼마나 달갑지 않은지를 그렇게 온 얼굴로 표현하고 있는 거였다.
“가기 싫으면 관둬요. 급한 일 생겨서 못 간다고 할게요.”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나린이 결국 마음을 접었다. 출발 전에 한 차례 실랑이를 한 터라 더 이상 달랠 기운도, 의지도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기사가 목적지를 바꿔야 하나 눈치를 살피는데,
“……괜찮아.”
윤완이 떠름히 대답했다.
‘싫은 게 아니라 아쉬운 거라고.’
거기선 널 마음껏 만질 수도, 안아줄 수도 없으니까.
“친구라고는 딱 셋뿐인데 친하게 지내야죠, 오래오래.”
“이런 자리 안 가도 충분히 친해.”
요새는 과하게 친한 게 아닌가 싶다. 무려 커플 모임에까지 끌려나가고 있는 걸 보면.
“이것 봐. 가기 싫으면서 괜찮대.”
“…….”
예리한 눈빛을 거둔 나린이 이내 말간 웃음을 웃었다.
“나 언니들하고 친해지고 싶단 말이에요. 이쪽 세계엔 친구가 하나도 없어서, 셋이라도 있는 오빠보다 더 불쌍한 처지라고요.”
“…….”
나린은 대답 않는 그의 팔에 살짝궁 매달렸다.
“그러니까 도와줄 거죠?”
상대의 약점을 알고 자신의 강점을 십분 발휘하는 것만큼 백전백승인 기술이 없었다.
“……알았어.”
그러니 이번에도 당연히 윤완의 패배.
한참을 달린 차는 날이 저물 즈음 대광 유통 소유의 단독 펜션 앞에 이르렀다.
기사에게 주차를 맡기고 안으로 들어가니 뜰에 케이터링 서비스 준비가 한창이다.
6월 초, 아직 무더위가 고개를 내밀기 전.
미처 거두어가지 못한 봄밤의 선선함을 붙들어보려 야외 저녁 식사를 마련한 모양이었다.
“어? 마침 오네. 어서 와요. 안 그래도 언제 오나 연락해보려고 했어요.”
윤완과 나린을 발견한 펜션의 주인, 현주가 반색하며 쪼르르 달려왔다.
“출발이 좀 늦었어요. 죄송해요.”
“별로 안 늦었는데요, 뭐.”
현주는 나린의 사과에 해맑은 미소로 답했다.
“나린 씨! 오랜만이에요!”
펜션 건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은영이 마구 손을 흔들고,
“안녕하세요.”
나린도 꾸벅, 고개 인사로 답해주었다.
“안 그래도 음식 준비될 때까지 은영 씨한테 펜션 구경시켜주려던 참이었어요. 나린 씨도 같이 가요.”
현주는 그렇게 나린만 쏙 빼내서 데려가 버렸다.
예상보다 더 빠르게 나린과 생이별하게 된 윤완은 터덜터덜, 세훈과 준우가 있는 테이블로 왔다.
“어디 멀리 간 것도 아니고. 금방 올 거야. 저녁 식사도 해야 하고.”
생기 잃은 걸음걸이를 본 준우가 웃음을 참으며 그를 달랬다.
윤완이 착석하자 케이터링 서비스 직원이 다가와 와인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 후 잔을 채워준다.
짙은 포도 향이 매혹적으로 유혹하는데도, 윤완은 손도 대지 않았다.
“맛이라도 좀 봐라. 업체 고를 때 현주 씨가 얼마나 고민한 줄 알아? 다 너 때문이잖아. 하여튼 까다로워가지고.”
고생한 현주를 생각해서 세훈이 길게 타박했지만,
“빈티지가 별로잖아.”
윤완은 짧게, 심드렁히 대꾸했다.
이만하면 훌륭한데 괜한 트집이었다.
아무래도 나린이 없으니 저러는 모양이다. 얼른 나린이 자리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내 사촌 동생만 옆에 있었어도 이걸 콱.’
얼마 후 세훈의 바람대로 나린이 돌아왔다.
“담엔 아예 1박 해도 좋겠지?”
현주가 나린과 은영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새 친해졌는지 반말이 되어 있었다.
“응.”
동갑내기 은영이 스스럼없는 맞장구를 쳐준 뒤,
“어때요, 준우 씨는?”
준우를 돌아보자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은영 씨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나도 현주 씨 하고 싶은 대로요.”
묻지도 않았는데 세훈이 보란 듯이 합세한다. 아까 와인 얘기로 윤완에게 당한 걸 이렇게라도 되갚아줄 마음에서였다.
‘도윤완은 낯간지러워서 못 내뱉을 말이지.’
아니, 고귀하신 몸으로 이런 데서 잔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하겠지.
그렇다고 혼자서만 대답을 안 할 수도 없을 테고.
그렇게 아주 잠깐이라도 그를 궁지에 몰아넣고 싶었는데.
“나도.”
찰나의 지체 없이 나지막한 저음이 흘렀다.
테이블 위의 시선이 소리의 발원지를 주목한다.
윤완을 향해 부릅떠진 열 개의 눈동자 속에서 가장 크기를 키우고 있는 건 나린의 눈동자였다.
“……네?”
오늘 이 자리에 데려오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러니 애초에 기대도 안 했는데 지금 무슨 소리를.
“……나린이 네가 원하면 나도 좋다고.”
기어이 달달한 문장을 완성해낸 그가 앞에 놓인 잔을 집어 들었다.
‘얼씨구. 언제는 빈티지가 마음에 안 든다며?’
와인을 꿀떡 목 안으로 넘기는 윤완을 보며 세훈이 뱁새눈을 떴다.
이 짧은 상간에 절친에게 두 번이나 배신을 당했다. 달달한 문장으로 한 번, 빈티지가 별로라던 와인으로 또 한 번.
“도윤완 부사장님, 소문만큼 무서운 사람은 아닌가 봐요.”
윤완이 잠시 전화를 받느라 자리를 뜬 사이, 윤완과의 식사는 처음인 현주가 세훈에게 속닥였다.
전체적으로 차가운 분위기여도, 나린을 대하는 눈빛, 말씨 무엇 하나 다정하지 않은 게 없어 보였으니까.
“아뇨. 딱 나린이 있을 때만 저래요. 나린이 없는 데서 보면 소문보다 더할걸요.”
둘만의 속닥임이었지만 테이블이 작다 보니 확성기를 댄 것처럼 나린의 귀에까지 선명히 들려왔다.
나린은 곤란한 입장을 겉웃음으로 때웠다.
메인디시로 스테이크가 차려진 직후 타이밍 좋게 윤완이 자리로 돌아왔다.
먹기 좋은 크기로 고기를 조각낸 윤완은 아직 반밖에 자르지 못한 나린과 접시를 바꿔주었다.
막 한 조각씩 입안으로 가져가던 세훈과 준우가 동시에 멈칫했다.
현주와 은영이 슬그머니 눈길을 주고받고,
“적당히 좀 해라.”
세훈이 복화술을 하듯 이를 앙다문 채 경고한다.
관심 없단 표정으로 어깨만 한 번 으쓱여 보인 윤완은 원래 나린의 것이었던 스테이크를 마저 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