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5분으론 안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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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5분으론 안 되겠지
2022.04.12.
마침내 나린이 돌아오는 날. 채 여사는 나린의 방을 새로 단장했다.
금방 결혼해서 떠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단 하루일지라도 이 집에서 평안하고 행복하길 바라며.
나린은 고작 한 달 보름 만인데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신한 방을 보며 낯을 가렸다.
나린이 얼떨떨하게 이곳저곳 훑는데,
“사모님께서 좀 내려 오라세요.”
짐을 풀 새도 없이 미옥이 찾아와 말을 전했다.
급한 대로 캐리어를 드레스룸 안에 밀어 넣어놓고 1층으로 내려간다.
총총,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느낌이 좋았다. 발밑의 감각이 익숙하여 이젠 이곳도 집이 아닐까 생각했다.
전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못 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떠나보니 깨닫게 된 건 아닐까. 이곳에도 소중한 가족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다음 주면 할아버지 퇴원하시는 건 알고 있지? 퇴원하시면 여기 말고 서초동으로 가실 거야.”
채 여사는 세훈과 나린을 앉혀두고 연 회장의 결심을 알렸다.
“서초동이요?”
세훈이 되묻고, 나린도 두 눈을 토끼처럼 동그랗게 뜬다.
“응. 마침 로열하우스 매물이 나와 있길래 계약했어.”
‘로열하우스’는 예전에 도문형 회장 내외가 거주하면서 유명세를 탄 최고급 빌라였다. 온통 자연으로 둘러싸여 도심 속 녹지를 누리기에 최상인 환경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니, 왜요?”
잘못 들은 게 아닌 걸 확인받은 세훈이 따지듯 물었다.
“할아버지께서 그러길 원하셔. 몸이 안 좋으시니 조용히 지내고 싶으신가 봐.”
채 여사는 애써 둘러댔다.
“……혹시 저 때문에 불편해서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나린이 눈치 있게 물어 와서 흠칫했으나 이내 침착히 부인한다.
“그런 거 아냐, 절대.”
나린이 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연 회장은 같은 결정을 했을 것이다. 누구보다 그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채 여사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게 여생을 옭아맬 멍에를 견딜 유일한 방법일 테니.
“몸도 안 좋으신데 괜찮을까요?”
부자간에 통했는지 세훈이 일전에 주환이 했던 것과 같은 걱정을 했다.
“내가 자주 들여다볼 거야. 사람도 여럿 붙일 거고. 너희는 걱정 말고 너희 할 일에나 집중해. 어련히 알아서 할까.”
채 여사가 너무 단호하여서 세훈과 나린도 더는 토를 달지 못했다. 어른들의 결정이니 토를 단다고 하여 바꿀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아예 발길을 끊으라는 게 아냐. 엎어지면 코 닿을 덴데 뵙고 싶을 땐 언제든 찾아봬도 돼.”
태용이 쓸쓸하지 않도록 이따금 얼굴을 보여주라는 얘길 채 여사가 둘러 둘러서 말했다. 세훈과 나린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네, 큰엄마.”
“나린이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이지?”
세훈과 나린이 납득한 것 같자 채 여사가 대화 주제를 바꾼다.
“네. 경력은 도일 그룹에서 일했던 거 그대로 인정해서 대리 2년 차로요.”
나린을 향한 질문이었는데 세훈이 대신 대답했다.
“과장 달아준다고 했는데 싫대요. 내년 말까지 열심히 성과 내서 자기 힘으로 달 거라고.”
세훈의 설명을 들은 채 여사는 피식, 헛웃음을 웃었다. 참으로 나린이다운 발상이었다.
“오너 일가란 건 금방 소문이 퍼질 테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말이 나올 텐데……. 그냥 승진해서 들어가는 게 어때? 그나마 덜 억울하게.”
“아뇨.”
나린은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각오하고 있어요. 감수할 준비도 되어 있고요.”
“…….”
“전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거예요. 정말 잘해서 언젠가는 직원들에게도 꼭 인정받을게요.”
채 여사는 역시 제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뿌듯해했다.
이러니 내가 이 아일 세훈이 옆에 두려 하는 거지.
“결혼 문제는, 도일 그룹 측에서 여전히 아무 움직임도 없는 거지?”
그간 쌓아뒀던 숙제를 한 번에 처리하려는지 채 여사가 다음 주제를 질문으로 만들어 던졌다.
“네.”
“하여튼 금 여사님, 고집도.”
마음 같아서는 윤완을 확 데릴사위 삼아버리고 싶지만.
그게 나린이의 앞날에도 더 도움이 될 것 같지만.
“내가 한 번 찾아봬야 하나…….”
그래도 감정만으로 일을 처리할 순 없어서 채 여사가 고민에 빠졌다.
“아니에요. 당분간은 가만히 계셔도 될 거 같아요.”
“왜? 지난번 네 생일에 도 부사장이 프러포즈한 거 아니었어?”
나린이 느긋하게 나오자 채 여사는 어리둥절해 했다.
나린의 생일날, 프러포즈할 거라며 자정 넘어서 들여보내도 되냐고 허락을 구했던 걸 아직 기억하고 있는데.
다음 날 나린의 약지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보고 그의 안목에 감탄했던 게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데.
“그때 유예기간을 받았거든요.”
“유예기간……?”
프러포즈에 유예기간이라니. 들어본 적 없는 신박한 방식이다.
“네. 일 년 동안 하는 거 보고 결정하라고요. 생각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어쨌든 아직 열 달 남았어요. 그동안 금 여사님께서 마음을 돌리시길 바라고 있고요.”
“도 부사장이 정말 그랬다고? 왜?”
“잘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연애가 더 하고 싶은 게 아닐까요? 결혼이랑 연애는 또 다르니까요.”
나린의 천진난만한 답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세훈이 실소했다.
‘나린아……. 그거 아니야.’
윤완이 처한 상황이 웃기면서도 슬프다. 지금쯤 과거의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을 친구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도윤완도 계획이 실패할 때가 있구나.
완벽하던 그의 실패가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한편 불쌍했다. 도윤완을 동정하는 날이 오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샌디에이고에서 금 여사님께 저 혼자 노력하는 건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씀드렸어요. 함께 노력할 준비가 됐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요.”
말을 마친 나린은 겸연쩍게 웃었다.
“제가 너무 버릇없었을까요?”
확실히 당돌한 발언이긴 해도,
“아니.”
상대는 더한 짓도 했는데 그게 뭐 대수냐고, 채 여사는 생각했다.
먼저 어른답지 못하게 굴었는데 저 정도는 애교지.
어느덧 밤 열 시가 가까운 시각. 나린의 눈에 피로가 잔뜩 묻어 있는 걸 본 채 여사가 이쯤에서 자리를 마무리하기로 한다.
“이만 올라가 쉬렴. 짐 정리할 사람 필요하면 말하고.”
“아뇨, 괜찮아요.”
“그래. 그럼 잘 자라.”
“안녕히 주무세요, 큰엄마. ……세훈 오빠도요.”
채 여사와 세훈에게 차례로 인사한 나린이 방으로 돌아간 후,
“도 부사장을 좀 만나봐야겠네. 무슨 생각인 건지.”
채 여사는 세훈을 보며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했다.
***
오랜만에 시간이 맞은 윤완, 준우, 세훈이 2501호에 모였다. 윤완이 샌디에이고에서 돌아온 후 처음이었다.
널찍한 소파를 각각 하나씩 차지하고 앉은 세 남자가 가볍게 위스키 잔을 부딪힌다.
“너 나린이한테 프러포즈하면서 대답은 일 년 뒤에 하라고 했다며?”
빈 잔을 내려놓으며, 세훈이 윤완의 아픈 곳을 푹 찔렀다.
흥미를 느낀 준우가 윤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진짜?”
“……어.”
윤완은 세훈을 찌릿, 노려본 채로 대답했다.
“아니, 어제 우리 어머니께서 너희 어머니께 연락해볼까 하시는데 나린이가 말리더라고. 프러포즈하면서 일 년 유예기간을 받았고 아직 열 달이나 남았다고.”
“…….”
생각해주는 척 세훈은 은근히 윤완을 놀려먹고 있었다. 그래서 윤완도 노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세훈이 곧 손윗사람이 된다. 이건 결혼과 동시에 직시해야 할 현실이었다.
이걸 어쩐다. 사촌남매지간에 연을 끊어놓을 수도 없고.
“왜 그랬어?”
준우는 윤완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프러포즈는 결코 실수가 아니었다. 분명 나린을 향한 지극한 마음이자 사랑이었다.
“나린일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두고 싶었어. 결혼이 공식화되는 순간 자유가 사라질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외적인 사정보다 내면의 사정이 몹시도 급박했다.
점점 나린을 집에 들여보내는 시간이 힘들어지고 있다.
하루빨리 한 집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은데.
“말 되네.”
윤완의 말에 나직이 공감을 표한 준우가 다시 세훈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번 토요일 저녁 얘기는 또 뭐야? 은영 씨한테 들었는데.”
“아. 현주 씨가 다 같이 저녁 한 끼 먹고 싶대. 이참에 여자들끼리 친분도 다지고.”
“그래?”
“응. 나한테 전해 달랬는데 은영 씨한텐 따로 연락했나 보네.”
“너희끼리 해.”
저 ‘다 같이’가 커플 모임을 의미한단 걸 직감한 윤완이 단칼에 거절했다.
그런데 응수하는 세훈의 얼굴에 어쩐지 여유와 미소가 흘러넘쳤다.
“그래, 뭐. 나린이는 내가 태워 가면 되지.”
불길한 예감.
“무슨 뜻이야?”
“나 이제 나린이랑 한 집에 사는 거 몰라?”
설마.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물어봤고, 좋대. 재밌겠대.”
저 녀석이 나린이의 사촌오빠라니. 나린이와 한 집에 사는 식구라니.
그러나 이미 당사자의 허락을 받았다는데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윤완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본 준우와 세훈은 입가를 움켜쥔 채 끅끅, 숨죽여 웃어댔다.
***
“내일 저녁 모임, 꼭 안 가도 돼.”
소파에 앉아 나린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윤완이 툭 내뱉었다.
그의 펜트하우스, 그의 서재에서 그의 책상을 차지하고 앉아 자료를 보던 나린이 고개를 든다.
“왜요? 재밌을 거 같은데…….”
역시 무심하다. 윤완에게만큼은 이보다 더 무심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
둘 다 한가로운, 드문 기회를 그런 데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
“다른 약속 있어요? 그럼 저만 가도 되고요.”
윤완의 속도 모른 채 나린의 시선이 다시 책상으로 떨어졌다. 눈길도 주는 둥 마는 둥, 대답도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저 단호함을 보아하니 모임에 빠지는 건 무리일 것 같고.
“근데 왜 벌써부터 일해?”
윤완은 철저히 외면당하는 중인 현재의 처지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일하는 거 아니고 사전 준비예요. 출근 전에 조직별 R&R은 미리 파악하고 가려고요.”
여전히 눈길도 주지 않는, 무심한 답이 돌아왔다.
“얼마나 남았는데?”
“멀었어요. 이거 보고 나면 내부 결산 프로세스 자료도 봐야 하거든요.”
“무상 노동하지 말고 나중에 출근해서 해.”
“노동 아니라니까요.”
“그것도 노동이야.”
윤완이 끈질기게 말대답을 이어가자 나린이 참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휴 정말. 집중을 할 수가 없네. 그러니까 오늘 바쁘다고 내일 보자고 했잖아요.”
바쁜 게 뭐가 됐든 와서 하라고, 얌전히 보고만 있겠다고 해놓고서.
신뢰로 똘똘 뭉친 그가 이렇게 약속을 깨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일 낮엔 경영수업 받는다며. 저녁엔 방금 말한 그 모임이 있고.”
“그러니까요. 저녁 모임 때 보잖아요.”
“그건 보는 거 아냐.”
“그럼요?”
“이렇게 둘만 있어야 보는 거야.”
그답지 않은 궤변에 나린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무슨 억지예요?”
나린이 바라봐주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윤완이 냉큼 다가간다.
의자 뒤에서 그가 나린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만하고 나랑 놀자.”
뜨거운 숨결이, 따뜻한 목소리가 나린의 목과 귀를 한꺼번에 자극했다.
“안……돼요.”
이성을 붙들 듯 조직도가 그려진 핸드아웃을 꼭 붙들며 가까스로 고개를 저었다.
“급한 거 아니잖아. 당장 월급 받는 것도 아니고.”
그가 한가하니 내가 바쁠 권리도 사라져버렸다.
나린은 목에 감긴 윤완의 팔을 풀며 빙글, 의자를 돌려 그를 마주했다.
“그냥 오빠도 다시 출근하면 안 돼요?”
그러니 해결책은 이것뿐.
“싫어. 어떻게 얻은 휴식의 기횐데. 삼 개월 꽉 채워서 쉴 거야.”
“그럼 방해하지 말고 얌전히 좀 있든가요.”
“10분…… 아니, 5분만.”
“5분 동안 뭐 할 건데…… 읍!”
순식간에 입술을 잡아먹히는 바람에 나린은 말을 채 맺지 못했다.
겉을 자극하던 숨결이 어느새 몸속 깊이 흘러들고 있다.
입 안을 건드리는 보드라운 감촉에 나린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대외비 표식과 함께 테라 호텔 조직도가 그려진 종이들이 팔랑팔랑 바닥으로 흩어졌다.
허공을 헤매던 나린의 손이 그의 셔츠를 꽉 움켜쥐었다.
윤완은 그대로 나린을 번쩍 안아 들었다. 공중에 들리는 느낌이 낯설어서 나린이 얼른 그의 목을 감아 안는다.
“역시, 5분으론 안 되겠지?”
색이 짙은 눈빛,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그가 침실을 향해 뚜벅, 나아갔다.
“아니…… 읍.”
나린이 하려던 답은 또다시 그의 입술에 쏙 집어 삼켜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