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해줄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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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해줄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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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해줄 수 있는 것
2022.04.08.
나린과 윤완은 지원군을 보내준 데에 대한 감사인사를 드릴 겸 도 회장을 찾아뵙기로 했다.
안 그래도 도 회장은 나린이 윤완과 함께 또 찾아오겠다 말한 걸 기억하고 있었다.
좋은 기회라 여긴 그는 아들 내외도 불렀다. 부자지간, 모자지간에 쌓인 앙금이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나린과 윤완은 약속 시간에 맞춰 여유 있게 도착했다.
더 일찍 와서 소나무 정원의 정취를 즐기고 있던 일현은 마침 대문을 넘어 들어오는 윤완과 나린을 맞닥뜨렸다.
“왔구나.”
일현이 먼저 알은체하고 윤완은 뚝하게 허리만 숙여 보였다.
일현과 처음 만나는 나린은 조금 긴장을 했다.
“안녕하세요. 연나린입니다.”
몇 달 전 속성으로 받은 예절교육을 되짚어서 손을 바르게 모으고 인사를 드렸다.
“이제야 만나는군요. 반가워요. 내가 윤완이 아버지예요.”
다감한 인사말을 건네고 어색한지 일현이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한때는 그도 나린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런데 또 이렇게 눈으로 보고 나니, 언제 불만을 품었냐는 듯 어여쁘게만 생각되었다.
얼마나 대단하길래 아들의 혼을 쏙 빼놓은 건지 호기심마저 생겨난 상태.
위험 신호를 감지한 윤완이 앞으로 나섰다. 압박면접을 무색케 할 질문들이 쏟아지기 전에 냉큼 순서를 가로채야 했다.
“어머니는 안 오셨어요?”
겸사겸사 어머니의 행방도 물을 겸.
“아파서 못 왔다.”
화연의 와병 시위는 현재진행형이었다.
그게 꾀병인 걸 아는 윤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먼저 굽히고 들어갈 마음이 없는 건 윤완도 화연과 같았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지켜야 할 선은 존재한다. 그 선을 무시하다 못해 짓밟아 버린 사람이 어머니였다.
“들어가시죠. 할아버지 기다리세요.”
“그래.”
윤완이 모른 척 말머리를 돌리자, 고개를 끄덕인 일현이 앞장서서 걸었다.
“어머니 어디 아프세요?”
뒤따르던 나린이 걱정스레 묻고,
“진짜로 아프신 거 아니니까 걱정 마.”
윤완은 따스한 표정으로 나린을 안심시켰다.
“어서들 와라.”
거실에서 도 회장이 흐뭇한 얼굴을 하고서 세 사람을 맞이한다.
이윽고 둘러앉은 식탁에서 삼대가 함께하는 훈훈한 담소의 장이 열렸다.
도 회장은 나린이 테라 그룹으로 들어가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매우 흡족해했다.
일현 또한 제 의견을 조곤조곤, 조리 있게 말하는 나린에게 금세 빠져들었다.
나린은 말과 행동이 순수하고 맑은 아이였다. 윤완이 왜 꼭 이 아이여야만 한다고 버텼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노쇠한 도 회장의 컨디션을 고려해서 자리는 금방 파했다. 딱 저녁 식사까지가 끝이었다.
도 회장이 침실로 들어간 뒤 세 사람은 소나무 정원을 통과해 밖으로 나왔다.
차에 오르기 전, 일현이 나린을 돌아본다.
“오늘 반가웠어요.”
“저도 뵙게 되어 기뻤습니다.”
인자한 미소에 나린 또한 맑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동안 우리한테 서운한 게 많았죠? 미안해요.”
불시에, 담백한 사과가 건네어졌다.
그간 겪은 걸 생각하면 다소 허무한 말 한마디였지만.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일현이 보인 호의를 기억하는 나린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리고 말씀 편히 낮추세요.”
“그럴까? 그럼 우린 나중에 또 따로 만나는 걸로 하지. 허허.”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진 일현은 이번엔 윤완을 향해 돌아섰다.
언제 웃었냐는 듯 표정을 엄히 바꾼 채로.
“넌 대체 언제 출근할 셈이야?”
같은 사람인가 싶게 말투 또한 전혀 딴판이었다. 톤에 불만과 언짢음이 그득그득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나요. 아버지께서 CFO 권한을 강 부사장님께 주셨는데.”
윤완은 그답지 않은 능청을 떨었다.
“네가 일단 회사를 나와야 무슨 조치를 취하든 말든 할 거 아냐.”
“천천히요. 이참에 좀 쉬죠, 뭐. 처음으로 쉬어보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네요.”
윤완은 아직 앙금을 풀 생각이 없어 보인다.
골치가 아파진 일현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차를 타고 떠났다.
“이제 그만하고 회사 다시 나가요.”
일현을 배웅한 뒤, 나린이 차에 오르며 한마디 했다.
“뭘 그만해?”
윤완은 일현에게 그랬던 것처럼 능청을 피웠다.
“아버님께 시위하는 거요.”
“시위하는 거 아닌데…….”
아주 아닌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게 전부는 아닌데.
“나한테도 거짓말해요?”
“진짜야. 요새 너도 쉬고, 나도 쉬고. 매일 붙어 있을 수 있잖아.”
그러니 더 누리고 싶어.
온전히 너하고만 쓸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을.
‘그럼 내가 출근하면 오빠도 출근할 거예요?’
나린이 되물으려던 말은 먼저 새어나온 하품에 가로막혔다.
윤완은 재빠르게 나린과 가까운 쪽 어깨를 내렸다.
“졸리면 기대서 자.”
“괜찮아요.”
그 대답이 무색하게, 얼마 못 가 나린은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편히 대해주셨다고 해도 어른들을 뵙는 자리다 보니 신경을 많이 썼던 모양이다.
‘업어 가도 모를 것 같은데 진짜로 업어 가버릴까?’
어깨에 기대 잠든 나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윤완은 무모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팔딱팔딱 뛰는 심장이 어깨에 얹힌 무게를 나눠 지어주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
주환과 채 여사가 부부동반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
“한국병원으로.”
채 여사의 간결한 지시에 오 기사가 운전대를 꺾는다.
수술 사흘 차 새벽에 의식을 찾은 연 회장은 곧장 일반병실로 옮겨올 만큼 경과가 좋았다.
그럼에도 아직 제대로 된 대화는 불가능했다. 연 회장의 기력이 많이 쇠한 탓에 오래 말을 할 상황이 못 되었다.
세훈과 나린도 병실을 찾았지만 번번이 기면 상태인 그를 마주하고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어제 온종일 병실을 지키고 오늘도 새벽같이 들렀으면서, 아내는 또 아버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주환은 채 여사를 향한 무한한 존경심을 느꼈다. 아버지를 극진히 챙기는 효심이 고맙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단 한순간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아내.
‘저 정도 되니까 자식인 나보다 더 사랑받을 수 있는 거겠지.’
주환이 탄복하는데 채 여사가 불쑥 다른 화제를 꺼냈다.
“나린이 회사 문제는 곧 마무리될 거 같아요.”
“…….”
“케이콤통신 쪽은 준우가 나서서 수습해주기로 했어요. 다행히 차점자가 입사 의향이 있다고 했나 봐요. 헤드헌팅 비용은 우리 쪽에서 전액 지불하기로 했고요.”
“이젠 명준우 전무라고 불러야지. 더 이상 다현이 약혼자가 아니잖아.”
주환은 애먼 꼬투리를 잡았다. 나린이 테라 그룹으로 돌아오게 된 게 못마땅해서였다.
이젠 회사까지 옮긴다고 하니 지난번처럼 단순히 한 집에 사는 수준이 아니다.
‘고양이인 체하는 호랑이 새끼를 들이는 건 아닐까. 도윤완 부사장의 사주를 받고 세훈이 자리를 위협하려는 걸지도 몰라.’
배배 꼬인 주환의 머릿속엔 이미 불길한 시나리오가 여럿 쓰여 있었다.
채 여사는 주환이 갖는 경계심을 모르지 않았다. 주환은 나린에게 동생의 그림자를 투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동생에게 가졌던 콤플렉스가 은연중에 조카에게까지 편견을 갖게 한 것이다.
“전에 제가 말했죠? 좋은 애라고.”
“얼마나 겪어봤다고.”
“몇 달 안 됐어도 한 집에서 부대끼고 살았어요. 그 정도면 충분히 파악 가능해요.”
“…….”
“이젠 정말 우리 식구고 평생 얼굴 보며 살 텐데 딸이려니 생각하고 잘 대해주세요.”
“흠.”
채 여사가 보기에 주환은 앞뒤가 꽉꽉 막힌 사람이었다. 오만한 태도와 권위의식이 젊은 시절 연 회장을 쏙 빼다 박았다.
그나마 아내의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하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밤이라 그런지 병원 내부는 한산했다. 부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VIP 병동으로 올라갔다.
“그래도 아버지께서 마음을 돌리셔서 천만다행이야. 수술 안 받겠다고 버티실 땐 앞이 캄캄하더니.”
“그게 다 나린이 덕분이란 거 잊지 마세요.”
채 여사는 이때다 싶어 나린의 공을 강조했다. 이렇게라도 주환이 나린에 대한 시각을 바꿔주길 바랐다.
부부가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담당 교수를 위시한 의료진이 연 회장의 병실을 빠져나온다.
불안한 시선을 교환한 부부는 서둘러 다가갔다.
“무슨 일 있습니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에 주환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 아뇨. 회장님께서 퇴원 일정을 궁금해하셔서요.”
마침 채 여사도 확인하고 싶었던 정보였다. 연 회장을 집으로 맞기까지 얼마나 준비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언제쯤 가능할까요?”
“경과가 좋으셔서 내일모레면 될 거 같긴 합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 좀 더 계시겠다고 하시네요.”
“아버님께서요?”
“예. VIP 병실이야 여유로우니 얼마든지 더 계셔도 되지만……, 보통은 빨리 퇴원하고 싶어 하시는데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연 회장이라고 딱히 집에 가기 싫을 이유가 없는데.
의아한 눈짓을 주고받은 부부는 병실로 들어갔다.
병실을 지키던 간병인과 비서가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아버님…….”
“…….”
채 여사의 부름에도 연 회장은 답을 하지 못했다. 기운 없고 건조하여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아버지?”
주환이 침대로 다가서며 묻자 연 회장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 회장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끔뻑끔뻑 눈꺼풀만 여닫았다.
“퇴원, 미루고 싶다고 하셨다면서요. 왜 그러셨어요? 불안해서 그러세요?”
연 회장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주환아.”
공기로 꽉 찬 쉰 소리가 가까스로 목청을 통과했다.
“예, 아버지.”
폭포수처럼 떨어지던 손녀의 눈물을 두고 다진 다짐이 있다. 나린이 그를 찾아와 수술을 설득했을 때 굳힌 결심이 있었다.
그 뜻을 실행하려면 아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연 회장은 느릿느릿 힘겹게, 한 음절씩 끊어서 말을 이었다.
“혼자 조용히 지낼 거처를 좀 마련해다오.”
나린을 다시 보게 된 후 쭉 그런 고민을 했더랬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할아비를 찾아와 아프지 말라며 펑펑 눈물을 쏟는 손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 애의 행복을 위해 나는 무얼 해야 하나.
수술실에 들어갈 날을 기다리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런 그의 앞에 놓인 답은 모순적이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함께 산다 한들 우리가 행복할 수 있겠는가.’
지독한 과거가 낱낱이 까발려졌는데 그 애가 나를 보고 그늘 없이 웃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어느 한쪽은 떠나야만 했고, 그렇다면 그건 자신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조용히 손녀의 곁을 떠나주자.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도 그이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도 그이다.
내가 일군 모든 것을 손녀에게 내어 주리라. 쓸쓸히 여생을 보내는 걸로 스스로에게 벌을 주겠다.
연 회장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주환과 채 여사는 알쏭달쏭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지?”
주환은 아버지의 지시사항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
“말 그대로…….”
“…….”
“남은 생은 혼자 조용히 보내고 싶다.”
읊조리는 투로, 그러나 확고히 반복된 의사표시에 채 여사와 주환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주환은 즉시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그러나 연 회장의 결심은 아들의 고집보다 더 단단했다.
“아버님 뜻대로 해드려요.”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연 회장의 마음을 헤아린 채 여사가 주환을 타일렀다.
“도일 그룹 도문형 회장님도 한적하고 공기 좋은 곳에 따로 별채 얻어서 지내시잖아요.”
“…….”
“몸 편히 모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도 중요해요. 어쩌면 그게 더 중요할지도 몰라요. 아버님께서 원하시니 못 이기는 척 따라드려요.”
채 여사는 연 회장이 나린을 생각해 이런 결정을 했다는 걸 눈치챘으면서도 주환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알면 나린이 테라 그룹으로 들어오는 걸 막으려 들지 몰랐다. 안 그래도 나린을 경계하고 있는데 빌미 삼아 트집 잡기 딱 좋았다.
주환은 잔잔한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럴 때면 그가 연상인지 아내가 연상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렇지. 혼자 지내시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고집이 흐무러지는지 드높던 주환의 목소리도 한풀 꺾였다.
“제가 자주 찾아뵐게요. 입주 도우미도 쓸 거고, 비서실에서도 자주 들락거릴 테고요.”
“…….”
주환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자, 채 여사가 때를 놓치지 않는다.
“그럼 당신도 동의한 걸로 알고 적당한 곳으로 알아볼게요. 집에서도, 병원에서도 멀지 않은 곳으로요.”
승기를 잡은 김에 아예 못을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