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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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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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2022.04.05.
아쉬운 대로 하루 더 머물며 도시 여행을 즐긴 윤완과 나린은 이튿날 정오가 되어서야 귀국길에 올랐다.
두 사람이 인천공항에 내린 건 또 한 번 날이 바뀐 다음, 석양마저 사라진 초저녁 무렵이었다.
“LA에 도착했을 땐 시간이 거꾸로 가서 좋았는데…….”
출국장을 빠져나오는 길에 나린이 실없이 한탄했다.
출국할 땐 그랬는데, 귀국할 때는 하루가 흐르다 못해 낮 시간이 증발해버린 게 왠지 손해를 본 기분이다.
“왜? 표시된 시각이 변한 거지 쓰는 시간의 길이가 변한 건 아니잖아.”
역시 이 남자의 사고회로는 착오나 감상 따위 허용하지 않았다. 저 차갑고 딱딱한 뇌로 어떻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줄 수 있는 건지, 연구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손 차장이 차를 대기시켜놓고 기다리고 있다.
캐리어가 트렁크에 실리는 사이, 두 사람은 나란히 뒷좌석에 올라탔다.
“바로 연 회장님 병원으로 가자.”
짐을 다 실은 손 차장이 운전석으로 돌아오길 기다려서, 윤완이 나린에게 제의했다.
“큰엄마께 전화 드려 보고요. 가도 되는지.”
반갑게 전화를 받은 채 여사는 연 회장이 어제 수술을 마쳤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중환자실에 있단 소식을 전해주었다.
잠깐 들러서 누워 있는 모습이라도 보고 올까 했는데 채 여사가 만류했다.
[피곤할 텐데 다음에 가. 날 밝을 때. 아예 깨어나신 후에 찾아봬도 되고.]
그러자 행선지가 사라졌다.
윤완은 내심 함께 그의 펜트하우스로 가고 싶었지만, 채 여사도 승태도 지숙도 모두 나린을 오매불망 기다릴 걸 알기에 그럴 수 없었다.
“어디로 갈 거야? 바로 세훈이네로 갈 거야?”
내키지 않는 질문을 억지로 뱉어본다.
“아뇨. 외삼촌 댁으로요. 아까 연락드려서 도착한 거 알고 계세요.”
의연하면서도 단호한 대답에 왠지 모를 서운함을 느꼈다. 늘 그렇듯, 같이 있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은 저뿐인 것 같았다.
복잡한 상사의 속내를 간파해내지 못한 채로, 손 차장은 매정히 승태의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단지 안에 이르러서 막상 나린을 들여보내려 하니 윤완의 몸과 마음이 더욱 거세게 저항한다.
“올라가서 인사만 드리고 다시 나와.”
그래서 저도 모르게 질척이게 되었다.
“왜요?”
……나랑 더 같이 있어.
“같이 저녁 먹게.”
배고픈 척, 기운 없는 척. 나린이 차마 그를 두고 떠나가지 못하도록.
“배고파요?”
“……어.”
“그럼 올라가서 같이 먹을래요?”
그러다 아차 싶었는지 나린은 얼른 말을 바꿨다.
“아니다. 집밥 별로죠? 가서 인사만 드리고 다시 내려…….”
그때였다. 똑똑, 차창 두드리는 소리에 나린의 말이 끊어졌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린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서 두 눈을 똥그랗게 떴다.
“어? 수정아.”
불투명 유리막이 스르르 내려가고, 얼굴만큼이나 익숙한 이름이 불린다.
“맞구나? 지난번에 탔던 차랑 비슷해 보이길래. 우리 아파트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차종이라 눈에 확 띄었어.”
수정은 윤완에겐 아무 의미가 없는 자질구레한 정보를 대방출했다. 귀가 따가운 느낌에 윤완이 미간을 구겼다.
“안녕하세요?”
“네.”
명랑한 인사에도 그저 고갯짓으로만 까딱 답례해줄 뿐이었다.
이젠 수정도 적응이 되어서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나린이 외에는 아무 관심 없는 사람인 걸 알기에.
수정은 다시 나린에게 시선을 주며 손에 쥔 장바구니를 들어 올려 보였다.
“엄마 심부름. 너 먹인다고, 맛있는 거 잔뜩 해놨어.”
“……아, 그래?”
나린은 순식간에 곤란한 얼굴이 되어 윤완을 돌아봤다. 수정도 덩달아 윤완을 쳐다본다.
위기를 맞은 윤완은 잠시 말을 잃었다.
또다시 그 비좁은 식탁에 앉아 혀에 익지 않은 음식을 삼켜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체념한 그는 마지못해 입술을 뗐다.
그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같이 올라가자.”
나는 너와 함께 있고 싶으니까.
***
침대 위, 이마에 하얀 띠를 두른 화연이 일현의 통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일현의 귀에서 폰이 떨어지자, 화연은 득달같이 몸을 일으켰다.
“손 차장이죠? 뭐래요?”
“윤완이 녀석, 자기 아파트로 갈 모양이오. 당분간 거기서 지낼 거 같다는군.”
“집에 안 들어오고요?”
“당신 같으면 순순히 들어오겠소? 완전히 속아서 감금까지 당했는데.”
“감금이라뇨. 그냥……, 그렇게라도 윤완이랑 같이 시간 보내려고 한 거죠.”
화연은 대차게 반박했다. 아들을 상대로 벌인 일이 감금이라는 무지막지한 단어와 동의어란 사실을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시간 보내러 간 게 아니지 않소? 한 사장 딸까지 끌어들여 놓고. 이쯤에서 무마된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거요.”
“당신도 동의해놓고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이제 와서.”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남 탓이라고 했던가. 화연은 억울하다는 듯 일현을 바라보았다. 일현은 냉정하게 그 눈빛을 외면했다.
“당신이 너무 간절히 부탁하길래 모른 척해준 것뿐이오. 근데,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아직도 포기를 안 하고 있지 않소?”
“포기 안 한 거 아니에요. 저도 알아요. 더는 방법이 없다는 거.”
이 집안의 최고 권위자 도문형 회장이 윤완 쪽으로 기울었으니 이젠 정말 답이 없었다. 세연마저 손들고 떠난 마당에 마땅한 대안도 없다.
“아버님께서 오 비서를 보낸 걸로 뜻을 전하셨는데 제가 어떻게 더 우기겠어요.”
일현은 은근슬쩍 도 회장을 끌어들이는 화연의 태도에 부아가 났다.
“아버지 뜻을 존중해 물러나는 척하지 말아요.”
일현이 냉랭하게 내쏘자 화연은 크게 당황했다.
“그게 아니라…….”
얼른 변명을 해보려 하지만 일현이 말허리를 뎅강 베어낸다.
“윤완이가 아버지께 후계 구도를 재설정해달라고 했나 보더군.”
일현은 도 회장의 비서실에서 귀띔해준 얘길 꺼냈다.
윤완이 어떤 각오인지 들으면 아내의 고집도 조금은 물러지리라.
“도일 그룹 후계자라서 테라 그룹 손녀가 안 되는 거면,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대, 그 녀석이.”
“……!”
일현의 예상대로 화연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입술이 부르르 떨리고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도일 그룹을 버리겠다던 말이 허언이 아니었던 거야? 진짜 모든 걸 내려놓을 마음을 먹었단 말이야?’
일현은 틈을 놓치지 않고 화연을 몰아붙였다.
“고집 그만 부리고 애들 불러서 결혼 허락한다고 얘기해요. 안 그러면 윤완이 녀석, 우리랑 아예 연을 끊을지도 몰라.”
후계 구도 재편은 윤완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일이 아니었다. 그의 자리 또한 바로 아래 남동생에게 넘어갈지 몰랐다.
화연의 입에서 대답 대신 긴 한숨이 흘렀다.
그럼에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만큼은 내버릴 수 없어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붙들어 보기로 했다.
“윤완이한테 저 아픈 거 알리셨어요?”
“손 차장한테 전해 들었겠지.”
“그런데도 집에 안 들어오겠대요?”
“방금 말하지 않았소. 바로 자기 아파트로 간다고. 당분간 거기서 지낼 거라고.”
“그럴 리가 없어요. 당신이 전화해서 직접 얘기해보세요.”
“…….”
일현은 아직도 현실을 부정하는 화연이 가엽게 느껴졌다. 이토록 궁지에 몰려서도 체면을 세워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게 불쌍할 지경이었다.
아내는 지금 시위를 하고 있는 거였다.
패배를 시인할 수 없어서, ‘미안하다’ 그 한마디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아들이 먼저 숙이고 들어와 받아 달라 간청하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회생활다운 사회생활 한 번 못 해봤고, 사교계에서도 늘 최고의 위치에서 군림하기만 했으니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윤완이랑 연 회장댁 손녀 불러서 사과해요. 그게 순서야.”
일현이 재차 부드럽게 얼러보지만, 화연은 뭐가 못마땅한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자리에 누워버렸다.
***
모두가 단란한 가운데 윤완 혼자서만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던 저녁 식사는 큰 탈 없이 끝이 났다.
윤완의 집에서 결혼을 반대하는 걸 다 알고도 승태와 지숙은 여전히 그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가 맞지 않는 음식을 삼키느라 고군분투하는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 환대 덕분이었다.
이렇게 몇 번 더 식사를 하다 보면 곧잘 적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확실히 지난번보다는 덜 고역스러웠다.
“차는 방에 가서 둘이 마셔.”
수정이 나린의 방에 미니 다과상을 마련해주며 일렀다.
“엄마가 그렇게 하래. 불편하게 거실에 있을 거 없다고.”
나린은 수정에게 고맙다고 눈짓을 해 보인 뒤 윤완을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윤완은 휑한 나린의 방을 보고 아무런 반응도 내놓지 못했다.
급하게 구입한 침대와 옷장만 덜렁 놓인 단출한 공간.
그럼에도 넓지 않은 탓에 꽉 차 보인다.
윤완의 표정을 읽은 나린이 장난스레 눈을 치켜떴다.
“직접 보니까 간담이 서늘하죠?”
“…….”
윤완이 수수께끼 같은 물음 속을 헤매는 사이,
“내 세상에서 살아도 괜찮다고 했던 거 말이에요.”
더욱 장난스러워진 나린이 설명을 보탰다.
“이 방 보니까 왜 그런 말을 했나 후회되지 않아요?”
겁도 없이 나린은 그를 도발하고 있었다. 도발의 최후가 어땠는지 여러 번 겪어봐서 체득하고 있을 텐데도.
“아니.”
딸각, 문손잡이에 꽂힌 잠금 핀이 눌리고.
소리에 반응한 나린이 홱 돌아보자, 윤완의 엄지가 핀 위에 살포시 얹어져 있다.
“뭐 하는 거예요?”
행여 문이 잠기는 소리가 새어나갔을까 봐, 그래서 식구들에게 엉뚱한 오해를 살까 봐 나린은 안절부절못해 했다.
“여기라고 이런 걸 못 하진 않을 거 아냐.”
윤완의 걸음이 훌쩍, 간극을 뛰어넘었다.
“왜, 왜요? 뭐 하려고요?”
그윽하게 깊어진 눈빛에 당황한 나린은 뒤로 종종걸음을 쳤다.
아냐. 여긴 윤완 오빠가 사는 집과 달라……. 프라이버시가 완벽하게 보장되는 곳이 아니라고요.
반대편 벽까지 내몰려서 더 다가오지 못하게 막으려 휙, 손을 올린다. 넓게 펴진 손바닥이 탄탄한 그의 가슴을 턱, 짚었다.
둥둥. 심장 안에서 북소리인지 장구 소리인지 알 수 없는 타악기가 연주되었다.
그의 왼 가슴에 닿은 손끝에서도 똑같은 울림이 전해지고 있었다.
나린의 얼굴에 머물러 있던 윤완의 눈길이 힐끗, 가슴께로 떨어졌다. 제풀에 놀란 나린은 냉큼 손을 내렸다.
방어막이 사라진 틈을 포착해서 윤완이 더욱 가까이 붙어 섰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부딪히고 가슴이 닿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
뒤늦게 나린이 옆으로 피하려 시도해보았지만 그마저도 민첩하게 벽을 짚은 팔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렇게 나린은 차가운 벽과, 따스한 팔과 뜨거운 품 안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어릴 적 순정만화에서 수도 없이 봤던 장면을 이런 식으로 따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상대가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비현실적인 외모를 자랑할 거라는 것 또한 상상해본 적 없었다.
이글이글 타는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어서, 곧 잡아먹을 것 같은 입술을 쳐다보고 있을 수도 없어서, 오뚝하게 솟은 코끝에 겨우 시선을 걸쳤다.
“알았어요. 살 수 있어요. 여기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어요.”
두근거리고, 설레고, 야릇하고.
눈 깜짝할 사이 돌변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깨보고자 아무렇게나 항복 선언을 했는데.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주의하려다 보니 속삭임이 되었다.
말소리보다 더 크게 섞여든 숨소리가 윤완의 목젖을 간질였다.
아아, 이게 아닌데.
뜨거운 숨결에 반응해서 움찔하는 윤완을 보며 나린은 울 것 같은 표정이 됐다.
울고 싶긴 윤완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가 어딘지 잊지 않았기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그냥 물러나기 아쉬운 윤완이 나린의 입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윤완의 입술이 덮쳐오는 순간 나린은 심해로 잠수하듯 숨을 참고 눈을 감았다.
그가 입술을 뗀 뒤에도 여전히 긴장한 얼굴로 눈을 질끈 내리감고 있다.
그 표정이 사랑스러워서 윤완의 얼굴에 웃음이 맺혔다.
아까는 목을 간질이더니, 이제는 눈을 간질이는 그녀.
그만하려고 했는데 그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할 수도 없고.
아쉬운 마음을 진한 포옹으로 대신했다.
“눈 감고 상상한 건 다음에 해줄게. 둘만 있는 데서.”
그제야 눈을 뜬 나린의 귀에 대고 윤완이 속살거렸다. 양 볼이 홧홧 달아오른 나린은 그의 품 안으로 쏙 얼굴을 감추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