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저렇게나 좋을까2022.03.29.
내몰리다시피 하여 별장 밖으로 나온 세연에게 태준이 폰을 건넨다.
“받아봐.”
세연은 태준을 째려보며 폰을 받았다. 이곳까지 나린을 데려온 그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알아도 나를 더 오래 알았을 텐데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르는 그 애 편을 들다니. 원망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폰을 귀에 붙였다. 전화 너머 목소리를 확인한 세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응, 응.”
변명하려는 시도를 차단당한 세연은 ‘응’만 반복하다가 무기력하게 전화를 끊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세연은 태준에게 폰을 돌려주며 버럭 성을 냈다.
“연락 안 된다고 걱정하시길래.”
그에 반해 태준의 어조는 몹시도 여유가 넘쳤다. 전화 상대는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세연의 어머니였다. 준우로부터 연락처를 받아둔 태준이 타이밍 맞춰 전화를 건 것이었다. 준우가 고모에게 연락해 사촌 동생의 무모한 도전을 알렸다. 세연의 어머니는 준우의 말을 듣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연인이 있는 남자한테 매달리느라 별장까지 쫓아갔단 얘기에 낯 뜨거워 참을 수 없었다. 낯 뜨거운 만큼 딸을 엄히 꾸짖었다. 당장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경제적 지원을 끊겠다고 윽박질렀다. 변호사 자격증까지 따놓고도 여전히 부모님의 재력에 기대어 살아가는 세연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미련이 가시질 않아 윤완을 슬쩍 바라본다. 그는 아직 별장 건물 쪽을 향해 돌아서 있었다. 들려오는 말소리에 한 번쯤 쳐다볼 법도 한데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저 안에 있는 그녀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듯했다. 그 뒷모습이 비집고 들어갈 틈 하나 없는 천혜의 요새처럼 보였다. 이렇게까지 철벽남은 처음이다. 나 정도 되는 미인이 다가가면 그래도 한 번은 돌아봐 주던데. 잠깐이어도 흔들리긴 하던데. 윤완의 등을 빤히 응시하던 세연은 하릴없이 발길을 돌려세웠다. 축 처져서 떠나는 그녀를, 태준이 후련한 미소로 배웅해주었다. *** 안 되겠다 싶어 윤완이 들어가 보려던 찰나에 문이 열리고 나린이 나왔다.
“별일 없었어?”
윤완은 바투 다가서며 나린을 살폈다. 나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의 어머니이기에 당돌하게 군 게 미안했다. 그러나 윤완은 개의치 않았다. 나린이 어머니께 무슨 말을 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나린이 상처받았을까 봐, 오직 그것만이 걱정됐다. 나린이 아버지께서 이런 식으로 어머니와 이별했다던데. 외딴곳에 감금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갓 태어난 딸을 품에 안아보지도 못한 채로. 안타까운 마음에 윤완이 나린의 손을 잡아 쥔다. 돌발 행동에 흠칫한 나린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든 손잡고 걸어준다고 했잖아, 네가.”
아픈 얘기를 들출 수 없어 서툴게 둘러댔다. 윤완은 겨우 이런 위로밖에 해줄 수 없는 스스로를 무능하다고 느꼈다. 스스로 무능하다고 생각해본 건 성인이 되고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흠흠.”
여기 사람 있어요. 친구의 애정행각을 코앞에서 목격한 태준이 얼굴을 붉히며 인기척을 냈다.
“둘만의 시간은 나중에 갖고, 일단 차로 가자.”
태준은 빠르게 앞장서 걸었다. 연인을 향한 친구의 행동과 대사가 너무도 낯설다. 도윤완 이중인격설을 뒷받침할 증거가 이렇게 또 하나 늘어난 것 같았다. 차가 있는 곳에 이르자, 대기 중이던 도 회장의 비서가 앞, 뒷문을 차례로 열어주었다. 태준이 조수석에 오르고 윤완과 나린은 함께 뒷좌석에 탔다. 두 손은 여전히 꽉 맞붙인 채로. 룸미러로 힐긋, 그 모습을 포착한 태준은 픽 웃고 말았다.
‘저렇게나 좋을까.’
태준이 도 회장의 비서에게 해안가 레스토랑으로 갈 것을 주문한다.
“저녁 먹긴 아직 이르지 않아요?”
뒤에서 나린이 묻자,
“점심 거의 안 먹었잖아요.”
태준이 돌아보며 맞받아쳤다. 미안한 마음에 윤완이 나린의 손을 더욱 힘주어 쥐었다. 전화하겠다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연락 두절이 됐으니 내내 걱정했으리란 것쯤 불 보듯 훤했다. 하루하루 피가 말라서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엉망이었을 것이다.
“괜찮은데…….”
머쓱해진 나린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윤완은 나린을 바라보며 애틋하게 미소 지었다.
“아냐, 나도 배고파.”
나린을 배려해서, 레스토랑행을 관철시키고자 한 말이었지만 진실이기도 했다. 그 역시 별장에 갇힌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거부해왔다. 화연과 세연을 마주하고서는 단 한 톨의 음식도 삼킬 수 없었기에.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손 차장이 연락했어?”
별장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졌을 즈음, 윤완이 태준을 겨냥해 물었다.
“아니. 나린 씨가 먼저 알아채고 준우한테 알아봐달라고 했대.”
윤완이 이번엔 나린을 쳐다본다.
“안 그래도 연락이 안 돼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민하 과장님 만나서 우연히 들었어요. CFO 자리가 몇 달 비게 됐고, 업무 대행까지 지정됐다고요.”
“나린 씨 연락받고 준우가 곧장 손 차장한테 연락했대. 마침 손 차장도 이상해서 알아보고 있던 중이었나 봐.”
잇따른 설명에 윤완은 상황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의문은 하나였다.
“오 비서님은 어떻게 오신 거예요?”
운전 중인 도 회장의 비서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회장님께서 여기 두 분이 소란 없이 별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께서 왜. 윤완이 고개를 비트는데 나린이 답을 했다.
“출국 전날 아침에 할아버님을 찾아뵀었거든요. 준우 오빠랑.”
노회한 도 회장을 만났다는 말에 윤완의 표정이 굳었다.
“할아버지를 만났다고?”
“네. 근데 아무 일도 없었어요.”
윤완이 느낄 불안을 해소시켜주고자 나린이 냅다 핵심부터 던진다. 그런 다음 추가 설명을 이어갔다.
“다른 얘긴 안 하고, 샌디에이고 별장에 갈 거라고, 허락해달라는 부탁만 드렸어요.”
“…….”
“할아버님께서 소유하고 계신 별장이니 허락을 받아두면 도움이 될 거라고 준우 오빠가 그랬거든요. 어디까지나 별 기대 없이,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간 거였지만요.”
그랬는데, 오 비서와 동행하게 되는 뜻밖의 수확을 얻게 된 거였다. 태준은 새삼 가슴을 쓸어내리며 오 비서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오 비서님 아니었으면 용역업체를 알아봤어야 했을 텐데……. 그럼 어쩔 수 없이 물리적인 충돌이 났을 거고,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아닙니다. 저는 회장님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오 비서는 상황에 맞게 정답을 출력하도록 설계된 인공지능처럼 말했다. 윤완은 생각에 잠겼다. 얘기를 종합해보면 도 회장은 그와 나린의 사이를 반대할 의사가 없는 것 같았다. 적극적인 찬성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까다로운 장애물이 하나 사라진 건 맞으니까. 출장 오기 전 할아버지를 찾아가 내민 보고서가 아주 효과가 없진 않았나 보다. 윤완은 내심 천군만마라도 얻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 나린이 떠나고도 한참이나, 화연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꿈쩍 않고 앉아 힘겹게 분을 삭인다. 나린이 남기고 간 말이 협박인 양 귓전에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뭐야. 연 회장님처럼 늙어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이만 굴복해라 이거야?’
말한 사람은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듣는 이의 귀와 뇌를 거쳐 왜곡이 되었다. 화연은 분했지만 분풀이할 방법이 없었다. 초조하게 입술을 깨무는데, 별안간 세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금 여사님, 저 세연이에요.]
어머님이 아니라 금 여사님. 바뀐 호칭에서부터 그 용건이 짐작되고도 남았다.
[저, 아무래도 그만해야 할 것 같아요.]
이 전화는 세연의 어머니가 강제한 것이었다. 혼삿길이 막힐 걸 우려하여 당장 금 여사에게 포기하겠단 의사를 전하라고 딸을 닦달했다. 어머니의 따끔한 충고에 세연도 슬쩍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어찌 됐든 결혼도 하기 전에 남자와 함께 별장에서 지내려 한 사실이 알려져 좋을 게 없었다. 아무리 화연이 같이 있었다 하더라도. 화연은 암담한 기분이 되었다. 세연마저 손들고 떠나버리면 윤완에게 맞설 패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기회를 주셨는데 죄송해요.]
말만 죄송하다고 할 뿐 어조는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복잡한 상황에 저를 끌어들인 화연을 원망하는 것처럼도 들렸다.
“아냐, 일이 이렇게 돼서 내가 미안하지. 그동안 고마웠어.”
그럼에도 온화하게 답한 건 대외적인 이미지를 고려해서였다. 괜히 세연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간 알음알음으로 이상한 평판이 돌까 염려가 됐다.
[그럼 건강하세요.]
다시는 연락할 일이 없을 거라는 뜻을 다르게 표현한 끝인사가 전해진 후 전화가 끊겼다. 이어서 최 부장이 화연을 찾아왔다. 충성스러운 최 부장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걸 무척 송구스러워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하지만 회장님 비서실에서 전화를 주셔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최 부장이 덧붙인 말에 금 여사의 눈이 커졌다.
“아버님 비서실에서요?”
“예. 모르셨습니까?”
“처음 듣는 얘기예요.”
“이유야 어찌 됐든 지시사항을 이행하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됐어요.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 들어갈 준비나 해주세요.”
최 부장을 내보낸 화연은 허탈한 얼굴이 되어 방으로 돌아왔다. 전 재산을 탕진한 노름꾼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슬슬 앞으로의 일이 걱정된다. 가장 걱정되는 건 아들의 반격이었다.
‘윤완이가 어떻게 나올까. 얌전히 있지는 않을 텐데.’
서서히 고개를 돌리자 화장대 거울이 보였다. 그 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처량해 보였다. 이대로 패배를 시인해야 하는 걸까. 그 나린이라는 아이를 인정하는 것 말고는 전혀 방법이 없는 걸까.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마음이 뻣뻣하기 이를 데 없다. 머리가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심장이 거부했다. 방금 전, 함께 노력하지 않을 거면 자신도 굽힐 생각이 없다고 고개를 치켜들던 당돌한 아이. 그런 아일 집에 들이다니 상상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해 미칠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이젠 사면초가였다. 시아버지마저 은근슬쩍 그 앨 도왔다는 얘길 들으니 더욱 사기가 꺾였다. 화연의 눈에서 주르륵, 쓰라린 눈물이 흘러내렸다. *** 그간 있었던 일을 서로 공유하는 사이에 차가 목적지에 이르렀다. 오 비서는 세 사람을 레스토랑 앞에 내려주고 뒷일을 수습하러 떠났다.
“와.”
나린은 바다에 둥둥 떠 있는 듯한 레스토랑을 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바다와 맞닿은 배 모양 레스토랑은 1층에선 일반적인 식사를 제공하고, 2층은 고급 코스 요리만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여기 괜찮아. 메인 셰프가 6성 호텔 출신이라 윤완이 네 입맛에도 잘 맞을 거야. 그래도 샌디에이고까지 왔는데 한 끼 정도는 바닷가에서 먹어야지.”
윤완의 입맛이 까다롭다는 걸 아는 태준은 2층으로 올라가는 길에 사족을 늘어놓았다. 창가 자리로 안내를 받은 뒤, 정갈하게 세팅된 테이블에 둘러앉는다. 한숨 돌린 나린은 그제야 파란 바다가 드넓게 펼쳐진 풍경을 눈에 담았다. 소리 없는 감탄과 함께 표정이 환해졌다. 나린의 얼굴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흔적도 없이 걷히자 윤완의 표정도 한층 밝아졌다. 언제나 그랬듯 경치는 뒷전이고 나린에게만 시선이 끌렸다. 그에게는 나린이 있는 풍경만큼 아름다운 게 없으니.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공항에서 봤을 땐 곧 죽을 것 같았는데.”
덩달아 활기를 찾은 태준이 나린을 놀렸다.
“제가 언제요…….”
나린은 윤완의 눈치를 살피며 위력 없이 발끈했다. 직원이 다가오자 태준이 능숙하게 음식을 주문했다.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와인이 먼저 서빙되고 인원수에 딱 맞게 잔이 채워진다. 그러나 윤완은 받아만 두고 마시지 않았다. 제 몫까지 마실 기세인 나린을 보며 이따금 자그마한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언제는 와인 맛을 도통 모르겠다더니, 시음까지 자처하며 신나게 잔을 비우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제야 이 도시가 훌륭한 여행지라는 걸 깨달은 걸까. 아무쪼록 오늘은 알코올을 멀리하는 편이 좋겠다.
‘싱가포르에서처럼 또 널 안아 들고 침대로 데려가는 행운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