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되풀이되지 않길2022.03.25.
도 회장의 비서가 나린의 미국행에 동행했다. 나린은 채 여사와 연 회장을 만나기 전, 준우와 함께 도문형 회장을 찾아갔었다. 손 차장이 나서서 다리를 놔주었다. 도 회장은 좀처럼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속 좋은 노인의 외양을 했지만 말 한마디 허투로 뱉는 법이 없었다. 능구렁이 같은 도 회장 앞에서 나린은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오로지 윤완을 만나러 가야 한단 일념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정신력을 발휘했다.
“네가 연 회장 손녀로구나.”
나린을 마주한 도 회장은 의도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연나린이라고 합니다.”
나린도 차분한 답변으로 응수했다. 아쉬울 게 없으니 주눅들 것도 없었다. 도 회장을 만나러 온 건 어디까지나 여러 해결책 중 하나일 뿐, 꼭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다. 빈손으로 돌아가게 된대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나린의 얘길 들은 도 회장의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다. 샌디에이고에 있는 그의 별장으로 가 윤완을 데려오겠단 말에, 도 회장은 선뜻 비서를 한 명 내주었다. 예상 밖의 소득에 나린뿐 아니라 준우도 몹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상대를 제압할 강력한 비기를 손에 넣은 것만은 분명했다. 나린은 감사 인사를 올린 뒤 도 회장의 집을 떠났다. 다음엔 윤완과 함께 찾아오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비서실장 또한 도 회장의 선택에 의문을 품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린이 비행기에 몸을 실은 그 시각. 왜 나린을 도와주었는지, 비서실장이 조심스레 그의 의중을 물었다. 도 회장은 책상 서랍에서 보고서 하나를 꺼내 건네는 걸로 답을 갈음했다.
“지난주에 윤완이가 주고 간 거다.”
비서실장이 빠르게 눈을 굴려 보고서를 훑는다.
“그걸 주면서, 도일 그룹 총수 자리는 필요 없으니 후계 구도를 다시 설정해달라고 하더구나.”
약속도 잡지 않고 홀연 찾아온 윤완은 오직 한 사람만을 원한다고 했다. 그 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그룹의 후계자 지위를 미련 없이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대신 도일 소프트웨어를 제게 달라 했다. 윤완이 건넨 보고서 안에는 향후 어떻게 도일 소프트웨어를 키워나갈지에 대한 중장기 전략이 담겨있었다.
“내 큰아들 놈이나 윤완 어미나 근시안적인 사고밖에는 못 하지. 앞으로 윤완이가 살아갈 세상에 집안 간의 결탁이 얼마나 더 소용 있을 것 같으냐?”
“…….”
“이러니저러니 해도 테라 그룹 핏줄이다. 연 회장이 그토록 아끼는데 상속받을 재산만 해도 어마어마할 게다.”
“…….”
“그런 계산도 못 하고 고작 입방아에 좀 오르내린다고 초가삼간 다 태우는 꼴이라니. 어리석은 것들.”
도 회장은 혀를 끌끌 차며 창가로 걸어갔다. 날렵하게 다가선 비서실장이 도 회장을 부축했다.
“처음부터 윤완 어미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허니, 이기는 쪽에 거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
애지중지하는 소나무 정원을 바라보며 도 회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비서실장의 얼굴에 경탄의 빛이 어렸다. 이만큼 나이가 들어서도 계산기를 두드리는 감이 조금도 녹슬지 않은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근데 왜 굳이 미국까지 가게 두신 겁니까. 부회장님을 불러 부사장님을 풀어주라고 하시는 편이 더 간단할 텐데요.”
잠깐 그럴까도 했었다. 하지만 강압적으로 아들 부부의 뜻을 꺾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손자의 결혼 문제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인상을 주었다간 며느리와 사이가 틀어지기 십상이다. 무시할 수 없는 배경을 가진 며느리이니 척을 져서 좋을 게 없었다.
“글쎄다……. 나이가 드니 심심한가 보지.”
속내를 감춘 도 회장은 껄껄껄, 한바탕 크게 웃어댔다. *** 오후에 인천 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시간을 거슬러 오전에 LA 공항에 내렸다. 나린이 긴 대기 끝에 입국 심사를 마치고 나오자 태준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렇게 금방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반가운 마음에 태준의 눈꼬리가 예쁘게 휘었다. 그럼에도 나린은 마주 웃어줄 수 없었다. 그저 담담히 고마운 마음만 전하였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뭘요. 윤완이 일인데, 당연한 거죠.”
LA에서 차를 달려 샌디에이고로 향하는 길은 의외로 한산했다. 호텔에 도착한 나린은 이른 체크인을 했다. 태준이 손을 써둔 덕분에, 체크인 시간이 아닌데도 바로 룸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캐리어만 달랑 던져 넣어놓고 점심식사를 하러 나온다. 당장 윤완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태준이 우겨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든든히 먹어둬야 해요. 납치된 것도 아니고. 한두 시간 늦는다고 별일 없을 테니 걱정 마요.”
알아요. 아는데……. 보고 싶으니까. 너무 보고 싶어서 숨도 제대로 못 쉬겠으니까. 나린과 태준은 호텔에 딸린 레스토랑에서 가볍게 샌드위치를 먹었다. 야무지게 배를 채운 태준과 달리 나린은 많이 먹지 못했다. 태준이 쳐다볼 때만 몇 입 베어 무는 시늉을 한 게 전부였다.
“가요.”
더 권해봤자 나린을 괴롭게 할 뿐이라 판단한 태준은 식사를 끝내고 로비로 나왔다. 그 사이 태준의 지시를 받은 도 회장의 비서가 주차장에서 차를 가져왔다. 태준과 나린은 차를 타고 별장으로 이동했다. 하늘도, 바다도, 바람도, 모든 게 쨍하고 맑은 도시. 풍광을 즐기는 이들의 표정 또한 티 없이 맑다. 그럼에도 나린은 아무 감흥이 없었다. 차창 밖, 시원스레 펼쳐진 해안가 풍경을 보고도 굳은 얼굴은 좀처럼 펴질 줄 몰랐다.
“저기, 저 3층 집이에요. 준비됐어요?”
목적지에 이르러 태준이 말하자 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편에서 내려 막 길을 건넌 순간,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최 부장 일행이 다가왔다.
“누구십니까?”
최 부장 일행은 별장으로 향하는 길목을 가로막고 섰다. 도 회장의 비서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회장님 지시로 왔으니 비켜주십시오.”
“회장님이라면…….”
“이 별장의 주인, 도문형 회장님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최 부장은 긴가민가하여 믿지 못했다. 어딘가로 전화를 건 도 회장의 비서가 폰을 내밀자, 전화를 받은 최 부장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허둥대는 손짓으로 수하들을 물러 길을 터준다. 대문 앞에 이른 도 회장의 비서는 도어록에 마스터키를 갖다 댔다. 철커덕 소리와 함께 굳게 잠겨 있던 대문이 열렸다.
“들어가십시오.”
그는 현관의 보안 설정까지만 더 해제해주고 차로 돌아갔다. 문형의 지시가 딱 여기까지였다. 괜한 충돌이 나서 기삿거리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 태준과 나린은 활짝 열린 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무혈입성을 하게 되었으니 제일 험준한 산을 힘 안 들이고 넘은 셈이었다. 거실에 앉아 티타임을 즐기고 있던 금 여사와 세연이 나린을 보자마자 아연실색했다. 금 여사의 손에서 찻잔이 툭 떨어진다.
“네가 어떻게…….”
찻물이 카페트를 적시고 찻잔이 그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안녕하세요.”
나린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태준도 뒤따라 묵례했다. 새파랗게 질린 금 여사는 감전된 것처럼 몸을 떨었다. 꼭 유령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까 봐 여기까지 온 건데.’
굳이 윤완의 출장을 기다려 이 먼 미국까지 온 건 준우와 세훈, 태준이 미칠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태준이 미국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게 뼈아픈 실책이라면 실책이다. 친정 쪽 힘을 빌리는 대신 도 회장의 별장을 택한 것도 윤완의 의심을 조금이나마 피할 목적에서였다. 세연과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게 계획의 전부이니, 윤완이 별장에 등장했을 때만 해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줄 알았다. 석 달을 꼬박 같이 지내다 보면 정도 금방 붙겠지, 그렇게 느긋하게 기다리려 했건만.
“최 부장은 대체 뭘 하고……. 최 부장? 어디 있죠, 최 부장?!”
정신을 가다듬은 금 여사가 톤을 높여 고함을 쳤다. 이토록 아무 저항 없이 들어온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금 여사의 목소리가 2층 바닥과 맞닿은 천장을 울렸다. 소동이 생긴 걸 감지한 윤완은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거실 전체가 시야에 담기는 지점에서, 그가 턱, 멈춰 선다.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의 눈빛이 신기루처럼 일렁였다. 신기루일까 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까 봐, 윤완의 머릿속에서 이성이 밀려났다. 남은 계단을 쏜살같이 밟아 내려온 그는 단숨에 나린이 있는 곳까지 나아갔다. 팔이 닿는 거리에 이르러 손을 뻗은 윤완이 나린의 양어깨를 세게 끌어당겼다. 그토록 닿고자 했던 윤완의 품 안에, 나린이 살포시 안착했다.
눈앞에서 보란 듯이 이뤄진 포옹에 충격을 받은 세연은 양손으로 입을 콱 틀어막았다. 찢긴 자존심이 해진 깃발인 양 마구잡이로 나부꼈다. 금 여사 또한 충격으로 말을 잃었다. 저런 표정, 저런 행동은 엄마인 그녀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성을 되찾은 윤완은 나린을 놓아주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찰나였지만 온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애 닳았던 시간을 조금이나마 보상받은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야?”
세상에 오로지 한 사람만 보이는 듯한 눈빛과 말투.
“데리러 왔죠. 지난번 파티 때처럼.”
지친 미소가 나린의 얼굴을 뒤덮었다. 이 사람에게 닿기까지 얼마나 마음 졸였던가. 움츠러들어 있던 심장이 이제야 제 크기를 찾은 듯했다. 윤완은 나린의 손을 꼭 쥐고 현관 쪽으로 몸을 틀었다. 뒤에 남겨진 금 여사에게는 어떠한 말도 건네어지지 않았다. 금 여사는 망연자실했다. 이대로 윤완을 보내고 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 그러나 붙잡을 수도 없었다. 붙잡는다 한들 말이 먹힐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후 아들이 할 반격을 두려워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나린이 우뚝 발걸음을 세웠다. 결연한 눈빛, 비장한 각오를 읽은 윤완은 괜스레 긴장을 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저, 어머님이랑 단둘이 얘기 좀 해도 괜찮을까요?”
나린이 생긋 미소 지었다. 윤완은 불안한 표정으로 금 여사와 나린을 번갈았다. 그러다 끝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미소 속에 숨긴 고집은 언제나 그렇듯 이길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 기다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끝과 끝에 금 여사와 나린이 마주 앉았다. 이 정도 거리는 아무것도 아닐 만큼 훨씬 더 골이 깊은 사이.
“그래, 할 말이 뭐지?”
도도한 말투와 다르게 금 여사의 속마음은 몹시도 비참했다. 마지막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계획이 그 결과를 보기도 전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앞으로 윤완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두려웠고, 그에게 맞설 수단이 없어 절망적이었다.
“이렇게 말도 없이 들이닥쳐서 죄송합니다.”
“…….”
“하지만 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뭐?”
당돌했다. 지난번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음전한 말투를 유지한 나린이 말을 이었다.
“저를 겪어보지 않으셨기에, 단지 아드님이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받아들이기 힘드실 거라는 거 충분히 이해합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지? 대화의 향방을 종잡을 수 없어진 금 여사가 나린을 빤히 주시한다. 엇비스듬히 내려졌던 나린의 시선이 금 여사를 향해 치켜 올려졌다.
“그렇지만 그건 저도 같은 입장이니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뭐라고……?”
기가 차서 금 여사의 입이 헤벌어졌다.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애원해도 마음을 돌릴까 말까 한 판에 함께 노력해야 한다니. 금 여사가 붉으락푸르락했지만, 나린은 멈추지 않았다.
“어머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하는 거, 혼자서는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
“함께 노력할 준비가 되셨을 때…… 그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여기까지 날아오는 내내 고심했다. 금 여사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의 어머니이니 무조건 예의를 다해야 할지, 부당한 처사에 분노를 표출해야 할지. 갈등 끝에 다다른 결론은 그저 담담하게, 솔직한 생각을 전하자는 것이었다. 상대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데 억지로 열려 하면서까지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대화를 나눌 마음이 없는 상대에게 헛되이 시간을 쓰고 싶지도 않다.
“그럼,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나린이 끝인사를 전하는데,
“우리 윤완이가 나린 양 편이라고 기고만장하군요.”
금 여사가 나직이 내쏘았다. 나린은 안타까운 얼굴로 금 여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걷는 길은 과거에 이미 누군가 걸었던 길이기에. 후회와 눈물뿐인 그 길을 가려는 그녀가 못내 안타까울 뿐이었다.
“저희 부모님께 있었던 일, 들어서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연 회장이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했는지 안다면 마음을 돌리게 될까. 아들의 행복을 망친 스스로를 얼마나 질책하며 살아왔는지 알게 된다면…….
“어떤 식이든 그런 가슴 아픈 일이 되풀이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나린은 끝까지 침착하게 허리를 숙여 보인 뒤, 금 여사를 남겨두고 별장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