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 이만하면 (85/101)

#85. 이만하면2022.03.22.

호텔 로비로 내려온 채 여사는 나린에게 집까지 태워다주겠다고 제안했다. 나린은 여기서도 별 저항 없이 채 여사의 말에 따랐다. 차가 출발한 뒤, 채 여사가 목구멍에 까슬까슬 걸려 있던 말을 조심스레 꺼내 놓는다.

16558042345976.png“혹시 말이야.”

16558042345981.jpg“…….”

16558042345976.png“할아버지는 만날 생각 없니?”

선뜻 마음먹지 못해 외면하고 있던 약점이 건드려지자, 가시에 찔린 것처럼 나린이 움찔했다.

16558042345981.jpg“…….”

16558042345976.png“말할까 말까 했는데……. 할아버지께서 편찮으셔.”

나린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연세도 있으신데 아프다는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외출할 때 지팡이를 짚으시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항상 정정한 모습이었기에 더욱 예상하지 못한 소식이었다.

16558042345981.jpg“많이 안 좋으세요?”

16558042345976.png“너 떠난 뒤로 계속 안 좋으셨는데, 오늘 새벽에 급격히 상태가 나빠지셨어. 지금은 병원에 계시고.”

실은 만나자는 나린의 연락에 채 여사가 기존 일정을 조정하면서까지 달려온 것도 이 문제 때문이 컸다. 나린에게 상황을 알리고 선택권을 주고 싶었다. 돌이킬 수 없게 됐을 때 뒤늦게라도 회한이 남지 않도록.

16558042345976.png“수술을 하셔야 한대.”

수술이라는 단어가 또 한 번 나린의 심장을 쿵 치고 지나갔다. 채 여사는 나린의 반응을 살피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16558042345976.png“근데 아버님께서 수술을 거부하고 계셔.”

16558042345981.jpg“……왜요?”

16558042345976.png“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수술실에 들어가는 게 자신이 없으신 것 같아. 지금 연세로는 쉬운 일이 아니니까.”

16558042345981.jpg“…….”

16558042345976.png“무서우신 게 아닐까. 다신 널 보지 못하게 될까 봐.”

나린이 잠시 입술을 앙다물었다. 결심이 서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한 나린이 채 여사를 바라본다.

16558042345981.jpg“큰엄마.”

16558042345976.png“…….”

16558042345981.jpg“저…… 할아버지 뵈러 가고 싶어요.”

혹시나 하면서도 별 기대가 없었던 채 여사는 크게 감격했다. 이 한 발을 내디디기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을지 헤아리고도 남기에, 나린이 무척 안쓰러웠다. 왈칵 솟구치는 감정을 겨우 삼킨 그녀는 그 즉시 병원으로 차를 돌리라고 기사에게 명령하였다. *** 병실엔 세훈이 와 있었다. 외부 일정을 틈 타 일찍 퇴근해서, 할아버지의 수술을 설득하러 들른 것이었다. 채 여사가 나린을 데리고 들어가자 두런두런하던 병실 안의 말소리가 그쳤다. 세훈과 채 여사는 조용한 눈짓을 교환한 뒤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태용과 나린, 둘만 남겨졌다. 수액주사를 매단 채 축 늘어져 있던 태용이 나린 쪽으로 좀 더 고개를 돌렸다. 그 동작이 힘겹고 위태로워 보여 나린이 주춤거린다. 용기를 내어 다가가자 안 그래도 주름진 태용의 이마가 더욱 쭈글쭈글해졌다.

16558042369097.png“……나린아.”

오랜만에 듣는 음성에 가슴이 아려서, 아픔을 삭이려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16558042345981.jpg“할아버지…….”

탁한 음성이 나린의 입술 새를 비집었다. 다신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손녀의 부름에, 태용의 음성에도 울먹임이 실렸다.

16558042369097.png“고맙다……. 이렇게 만나러 와줘서…….”

두려웠다. 이생에선 이대로 이별일까 봐. 하나 남은 손녀에게 영원히 외면 받게 될까봐. 나린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마구 터져 나오는 울음은 자력으로 수습 불가였다. 있는 대로 쏟아 놓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나린은 굳이 그치려 노력하지 않았다.

16558042345981.jpg“……아프지…… 마세요…….”

북받쳐 오르는 와중에 태용을 걱정하는 마음이 문장이 되어 튀어나왔다. 뚝뚝 끊어지는 발음이었지만 태용의 귀엔 선명히 전달됐다.

16558042369097.png“오냐……. 우리 나린이 보니까 하나도 안 아픈 것 같다.”

애써 미소를 그려내는 태용의 눈 끝에서 귓불까지 눈물길이 연결됐다. 울음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나린은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이 자그만 눈물샘 어디에 이토록 많은 눈물이 저장되어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눈물이 날수록 생각은 단순해진다. 그저 할아버지가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이런 식의 대가를 치르길 바랐던 건 결코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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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58042345981.jpg“저 내일 미국 가요. 그래서 며칠 못 올 거예요. 귀국하면 제일 먼저 할아버지부터 만나러 올게요. 그러니까 꼭 수술 받으셔야 해요. 아시겠죠?”

병실을 떠나기 전, 나린이 마지막으로 신신당부했다. 할아버지의 마음을 편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여 미국행에 얽힌 자세한 사정은 얘기하지 않았다. 다만, 꼭 다시 오겠노라 다짐을 두었다. 나린은 태용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뒤 병실을 나왔다.

16558042390017.jpg“와줘서 고마워, 나린아.”

세훈이 나린을 배웅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16558042390017.jpg“내일 미국 잘 가고, 윤완이도 잘 구출해 오고.”

16558042345981.jpg“그럴게요.”

세훈이 힘주어 차문을 밀어 닫자 나린을 태운 차가 멀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세훈은 채 여사와 나눈 대화를 곱씹어보았다.

16558042345976.png“나린이가 완전히 이 세계에 들어올 결심을 한 것 같아.”

16558042390017.jpg“…….”

16558042345976.png“회사, 테라 그룹으로 옮기라고 했으니 준비해줘. 네 아버지한텐 내가 말씀드릴 테니까.”

16558042390017.jpg“나린이가 그렇게 하겠대요?”

16558042345976.png“응. 잘된 일이지…….”

  채 여사가 말끝을 흐렸다. 다시 돌아온다 한들 완벽히 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게 조금은 가슴 아팠다.

16558042390017.jpg“어느 계열사가 좋을지 검토해볼게요.”

16558042345976.png“부탁해.”

  고개를 끄덕이던 채 여사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세훈은 회상에서 헤어 나왔다.

16558042390017.jpg‘두 사람이 미국에서 돌아오면 또 한바탕 시끄러워지는 거 아닌가 몰라.’

병실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그의 입가에 어딘지 쓸쓸한 미소가 어린다. *** 태용을 만나고 집에 돌아온 나린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시 테라 그룹으로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전하려 하니 입술이 딱 붙어서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삼촌, 숙모, 수정이를 몽땅 거실에 불러 모으고도 계속 뜸을 들인 건 그 때문이었다.

16558042409139.jpg“할 말이 뭔데?”

나린이 쭈뼛대자 수정이 재촉한다. 내일 미국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윤완 오빠를 생각하자. 바다 건너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를. 결의를 다진 나린은 가족들의 얼굴을 차례로 훑었다. 마지막에 닿은 승태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힘겹게 입을 뗐다.

16558042345981.jpg“삼촌한텐 정말 죄송하지만…….”

16558042409139.jpg“…….”

16558042345981.jpg“저, 다시 테라 그룹으로 들어가기로 했어요.”

흥분해서 펄쩍 뛸 줄 알았던 승태는 의외로 잠잠했다. 당혹감에 몸을 들썩인 사람은 오히려 수정이었다.

16558042409139.jpg“아니, 왜?”

처음 운을 떼는 게 어렵지 한번 물꼬를 트고 나니 다음은 쉬웠다. 나린은 그간 있었던 드라마 같은 일들을, 소설을 낭독하듯 차분히 털어놨다. 도일 그룹의 결혼 허락 배경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사실. 금화연 여사가 결혼을 강하게 반대하며 제삼자까지 끌어들인 일. 샌디에이고에 발이 묶인 윤완을 구하러 내일 당장 미국으로 날아갈 예정이라는 것과 연 회장이 아프다는 사실까지. 나린이 얘길 하는 중간중간 수정의 분노와 지숙의 탄식이 섞여들었다. 오직 승태만이 침묵을 지켰다. 조금 길었던 얘기가 끝난 뒤, 승태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휴대폰을 챙겨 든 그는 슬그머니 현관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나린이 걱정스레 돌아보는데 지숙이 슬쩍 귀띔했다.

16558042409139.jpg“삼촌한텐 다 말했어. 지난번에 너랑 나눈 얘기…….”

대화를 해봐야겠다. 지숙과 허심탄회했던 것처럼 승태와도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16558042345981.jpg“삼촌한테 가 볼게요.”

폰을 챙겨든 나린은 승태를 좇아 밖으로 나갔다.

16558042409139.jpg“엄마, 나 빼고 나린이랑 무슨 얘기 했어?”

등 뒤에서 영문을 알 수 없어 따져 묻는 수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느라 거리가 벌어졌지만 승태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놀이터에서, 입구 왼편 정자에 앉아 있는 그를 발견했다.

16558042345981.jpg“삼촌.”

승태의 눈이 맥없이 나린을 향했다. 옆자리로 다가가 앉은 나린은 푹, 고개를 숙였다.

16558042345981.jpg“죄송해요. 멋대로 이런 결정을 내려서…….”

통보 전에 상의를 했어야 했다는 걸 알기에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급박했어도 잘못은 잘못이니까. 괴로운 얼굴을 한 승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8042409139.jpg“아니다.”

얼마 전 지숙이 한 얘기가 떠올라서 그 역시 갈등하고 있었다. 지숙이 나린에게 해주었다는 조언은 승태도 뭐라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16558042409139.jpg“……숙모 말이 맞아. 네 엄마는 네가 평생 할아버지를 원망하며 살길 바라지 않았을 거야.”

착한 승혜라면 그랬겠지. 어떻게 하면 나린이가 행복할지, 오직 그것만 생각했겠지.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와 가슴은 다르다. 연 회장에 대한 분노는 그리 간단히 누그러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승태는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선 그 노인네가 아프든 어쩌든 모른 체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린의 선택을 막고 싶지도 않았다. 호강은 못 시켜줘도 서럽게 만들지는 않겠노라, 동생의 주검 앞에 다짐했으니까. 이 앤 동생의 몫까지 행복해야 하는 아이니까. 그래…….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내가 다 떠안으마. 그러니 넌 꼭 행복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원래 누려야 했을 것들을 되찾아야 한다면……. 네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면. 마음을 다스린 승태가 가만히 나린의 손을 쥐었다. 놀이터를 보니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16558042409139.jpg“나린아.”

16558042345981.jpg“네, 삼촌.”

여전히 나린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승태가 힘없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16558042409139.jpg“네가 네 살 때쯤엔가……. 널 데리고 놀이터에 간 적이 있었어. 그때 아는 사람을 만나서 잠깐 얘길 나누는데, 웬 젊은 남자가 너한테 말을 걸더구나.”

16558042345981.jpg“…….”

16558042409139.jpg“놀라서 소리를 지르니까 바로 도망치긴 했는데…….”

16558042345981.jpg“…….”

16558042409139.jpg“지금 생각해보니, 그 사람이 네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경찰에 신고는 했지만 미수에 그친 탓에 적극적인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승태도 바쁜 생업에 치여 금방 잊어버렸다. 그땐 그저 가슴 철렁한 해프닝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전혀 다르게 해석되었다. 멀끔한 차림의 남자가 그것도 보는 눈이 많은 대낮에 아이에게 접근하다니.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고, 그때도 의아해했던 기억이 났다. 그 남자가 나린의 아빠였다고 하면 모든 게 설명됐다. 품에 안아보지도 못한 채 이별한 딸이 너무 그리워서 맴돌다, 맴돌다, 참지 못하고 다가왔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목소리라도 한 번 들어보고 싶어서.

16558042409139.jpg“막 널 집에 데려왔을 땐, 나도 숙모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16558042345981.jpg“…….”

16558042409139.jpg“좀 정리가 되고 나서 너랑 네 엄마가 머물던 보육원에 가서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려고 했는데, 그 수녀님이 어디로 가버리고 안 계시더구나.”

유일한 단서를 놓친 승태는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이 또한 연 회장이 손을 쓴 것이었다. 외삼촌이 나타나 나린을 데려갔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발 빠르게 조치를 취했다. 오로지 다현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16558042409139.jpg“미안하다. 내가 좀 더 노력했더라면, 좀 더 눈치가 있었더라면…… 네가 아빠를 만났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나린은 거듭,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댔다.

16558042345981.jpg“그게 왜 삼촌이 미안할 일이에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나린은 제 손을 쥔 승태의 손등에 남은 손을 올려 포갰다.

16558042345981.jpg“저는 삼촌이랑 숙모 덕분에 늘 행복했어요. 두 분께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지 못해 항상 죄송했는걸요.”

쭉 마음에 두었으면서도 정작 입 밖으로 내본 적은 없는 진심을 전하자, 승태의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16558042409139.jpg“무슨 소릴……. 우리야말로 네가 있어서 얼마나 행복했는데.”

나린이 와락, 승태를 끌어안았다. 승태도 나린을 마주 안아주었다. 승태의 손이 나린의 등을 토닥거렸다.

16558042409139.jpg“이왕 그 집으로 가게 된 거, 남부러울 거 없이 살아라. 다른 사람 걱정 같은 거 하지 말고, 우리 걱정도 말고, 오로지 네 미래만 생각하면서…….”

나린은 대답 대신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울먹이는 얼굴을 승태의 어깨에 묻으며 겨우 목소리를 낸다.

16558042345981.jpg“……저는 삼촌이랑 숙모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승태의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16558042409139.jpg“우리야 뭐…… 이만하면 행복하지.”

처음엔 동생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이었다. 동생이 그 지경이 되기까지 무관심했던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싶었다. 그러다 사랑으로 변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어도, 이 아이 또한 사랑하는 가족이 되었다. 이만하면 잘 키웠다고 자부해도 될까. 먼 훗날 네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까, 승혜야……. 물기 어린 승태의 두 눈이 밤하늘을 우러른다. 별이 보이지 않는 까만 하늘이 오늘따라 무척 외로워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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