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 결심 (84/101)

#84. 결심2022.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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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우의 연락은 나린의 예상보다 빨랐다. 마침 세훈, 준우와 저녁 약속이 있던 월요일. 준우가 만날 시간을 앞당겼다.

16558042136164.jpg[네 시까지 2501호로 와.]

준우의 메시지를 본 나린은 대충 채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진득하니 기다리기가 힘들어지던 차에 연락이 온 게 달가웠다. 바깥 공기를 쐬니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다. 뭐가 되었든 움직이니 살 것 같았다. 지하철역으로 난 보도블록을 따라 걸어 내려가는 길. 어느덧 오월도 절반 넘게 지나 있었다. 하늘은 야속하리만치 새파랗고 청명하다. 쨍쨍 내리쬐는 봄볕이 따가워서, 나린의 눈이 빨갛게 물들었다. 봄의 정취가 눈물을 거두어 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16558042136169.jpg‘울면 안 돼. 우는 건 정말 어쩔 수 없을 때 해도 늦지 않아.’

윤완을 떠올리며 대찬 걸음을 옮겼다. 그가 어떤 시간을 겪어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먼저 무너져 내리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 테라 호텔에 이른 나린은 직원의 도움을 받아 25층으로 올라왔다. 2501호 벨을 누르자 세훈이 문을 열어주었다.

16558042136174.jpg“나린이 네 말이 맞았어. 윤완이한테 무슨 일 생겼더라.”

나린을 본 세훈은 인사도 생략하고 씩씩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린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아니길 바랐건만…….

16558042136169.jpg“무슨 일인데요?”

되묻는 나린의 목소리가 바들거렸다.

16558042136164.jpg“윤완이가 갇힌 것 같아.”

세훈보다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준우가 대답했다. 그러나 걱정과 분노를 꾹 내리누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린은 할 수만 있다면 덜렁대는 심장을 손으로 잡아 고정시키고픈 심경이 되었다. ……갇혀? 왜? 대체 왜?

16558042136169.jpg“……샌디에이고에서요?”

16558042136164.jpg“응. 거기 걔네 할아버지 별장이 있거든.”

준우는 어제 손 차장과의 통화를 떠올렸다. 어젯밤 나린의 부탁을 받은 그는 곧바로 윤완의 측근인 손 차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16558042136192.jpg[안 그래도 이상해서 비서실 여기저기 탐문 중이었습니다.]

  준우의 전화를 받은 손 차장은 우군을 맞닥뜨린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다.

16558042136192.jpg[부사장님께서 그러실 분이 아닌데 보고 메일이 계속 미개봉 상태더라고요.]

16558042136164.jpg“뭐 좀 알아낸 거 있습니까?”

16558042136192.jpg[방금 입수한 정보인데, 부사장님 귀국 항공권이 3개월 후로 변경됐습니다.]

16558042136164.jpg“3개월 후요?”

16558042136192.jpg[예.]

  누가 봐도 비자 만료일을 꽉 채운 기간. 아직 세연의 가세까진 모르는 준우는 참으로 단순한 선택이라며 조소했다. 삼 개월만 떨어뜨려 놓으면 헤어지게 될 거라고 생각하신 건가.

16558042136164.jpg“샌디에이고 어디에 머물 계획이었는지는 아십니까?”

16558042136192.jpg[도 회장님 소유 별장에 머무시는 걸로 되어 있었습니다.]

16558042136164.jpg“알았습니다.”

  손 차장이 말한 별장은 준우가 작년 여름휴가를 보낸 곳이었다. 준우는 나린으로부터 들은 얘기와 손 차장이 전한 정보를 종합하여 윤완이 별장에 붙잡혀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즉시 이 결론을 검증해줄 현지 조력자를 선정했다. 마침 딱 맞는 적임자가 있었다. 자정이 되길 기다려 전화를 걸자, 바다 저편에서 태준이 아침잠이 덜 깬 채 전화를 받았다. 라스베이거스에 머물고 있던 태준은 준우의 부탁에 한달음에 샌디에이고로 날아갔다. 그렇잖아도 윤완의 출장 마지막 날 만나기로 돼 있었는데 일정을 앞당긴 셈이 되었다. 별장 주위를 염탐한 그는 세훈의 결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16558042155766.jpg[아무래도 별장에 갇혀 있는 게 맞는 것 같아. 대문 앞에 동양인 남자들이 탄 차가 서 있더라고.]

  사람들 눈에 띄는 게 부담스러운 최 부장 일당은 별장의 첨단 보안 시설을 믿고 드러내놓고 보초를 서지는 않았다. 다만 위급 시 적시 대응을 하기 위해 근처에서 대기 중이었다. 태준이 전한 정보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더욱 놀랄 얘기는 마지막에 준비되어 있었다.

16558042155766.jpg[그리고 그 별장에서 세연이가 나오는 걸 봤어.]

16558042136164.jpg“세연이면, 한세연?!”

  사촌 동생의 이름이 툭 튀어나오자 준우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16558042155766.jpg[응. 그러니까 거기 있는 게 확실해.]

  그랬다. 세연의 왕래야말로 부인할 수 없는 증거였다. 자선 파티 때 포기한 줄 알고 안심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겁도 없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에 동참하다니! 준우가 세연 얘기를 해줘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16558042136169.jpg“……누가 가둔 건데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나린이 확인 차 물었다.

16558042136174.jpg“누구겠어? 윤완이 어머니시지.”

준우를 대신한 세훈의 답에, 뜨거운 분노가 폭풍이 되어 나린을 휘감는다. 다신 만날 일 없을 거라던 금 여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출장 기간 동안 신변 확인 전화를 받았어야 하는 사람은 나린이 아니라 그였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금이라니.

16558042136169.jpg‘진짜 엄마 맞아? 엄마가 그럴 수 있는 거야?’

지숙이나 채 여사를 떠올려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아들의 선택이 마음에 안 들 수는 있다. 다른 환경에서 자란,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를 하루아침에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무작정 사랑 받는 며느리가 되어야겠다는 허황된 목표의식도 없으니 환영받지 못한대도 괜찮았다. 그저, 시간이 가면 깨달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었다. 서로 좋아한다는데. 헤어져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데……. 끝내는 깨닫고 받아들여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던 게, 완벽한 오판이었다. 이토록 극렬히 거부하고 있었을 줄이야. 이런 엄청난 일을 꾸밀 정도로. 참담한 기분이 엄습해 와서 두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단 생각에 결심을 굳힌다.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결심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했다.

16558042136169.jpg“제가 가야겠어요.”

나린의 선언에 세훈이 몸을 움찔거렸다.

16558042136174.jpg“가다니, 어딜?”

세훈은 설마 하며 되물었다.

16558042136169.jpg“샌디에이고요.”

16558042136174.jpg“거기가 어디라고 네가 가?”

16558042136169.jpg“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요. 제가 가서 데려올래요.”

16558042136174.jpg“네가 무슨 수로? 경호원들이 진을 치고 지키고 있을 텐데.”

16558042136169.jpg“경찰에 신고하면 돼요.”

16558042136174.jpg“안 돼. 한국도 아니고, 너무 위험해.”

16558042136169.jpg“괜찮아요. 조심할게요.”

사촌 남매가 실랑이를 벌이는 와중에 준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16558042136164.jpg“괜찮은 생각 같은데?”

제 편을 들어 주려니 했던 세훈은 황당한 얼굴이 됐다.

16558042136174.jpg“야, 명준우…….”

하지만 준우도 아무 대책 없이 나린의 결심에 동조한 건 아니었다.

16558042136164.jpg“대신 조건이 있어.”

나린이 준우를 쳐다본다.

16558042136169.jpg“무슨 조건이요?”

16558042136164.jpg“한 사람 더 같이 가.”

나린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세훈도 고개를 기우뚱했다.

16558042136174.jpg“너 휴가 쓰고 같이 가게?”

16558042136164.jpg“아니.”

16558042136174.jpg“그럼?”

16558042136164.jpg“잊었어? 거기 우리 편 한 명 더 있잖아.”

준우가 씩 미소를 그려냈다.

16558042136174.jpg“아!”

세훈의 중지와 검지가 딱 소리를 내며 세게 마찰을 일으키고.

16558042136174.jpg‘그래, 그 녀석이 있었지!’

준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16558042136164.jpg“태준이 아직 샌디에이고일 거야. 전화해볼게.”

  *** 연락을 받은 태준은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나린의 미국행이 확정되었다. 나린은 비자부터 발급받았다. 신청 다음 날 바로 승인이 떨어진 덕분에 항공권 구입도 수월하게 마쳤다. 출국 준비를 하면서 윤완을 구출할 전략을 세웠다. 준우와 손 차장이 적극 도와주었다. 출국 전날, 짐을 싸는 것까지 완벽히 끝낸 나린은 늦은 점심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을 나섰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급작스런 연락에도 채 여사는 흔쾌히 응해주었다.

16558042202908.png“어서 와.”

테라 호텔 스카이라운지 프라이빗 룸. 먼저 도착해 있던 채 여사가 반갑게 나린을 맞는다.

16558042202908.png“세훈이한테 얘기 들었어, 미국 간다고. 뭐 도움이 필요한 거야? 말해. 경비든, 뭐든.”

조용한 말투였지만 채 여사는 나린보다 더 격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금 여사가 한 행동은 채 여사 본인을 무시한 처사이기도 했다. 테라 호텔가를 떠났어도 우리 집 아이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그 경고가 하나도 통하질 않았다니. 나린은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16558042136169.jpg“말씀은 감사하지만, 그건 괜찮아요.”

16558042202908.png“그럼 왜 보자고 한 건데?”

나린의 표정과 말투가 평소와는 다르다. 착 내리깔린 어조에서 비장함이 느껴졌다.

16558042136169.jpg“큰엄마.”

16558042202908.png“응?”

채 여사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생글생글 웃던 아이가 무표정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16558042136169.jpg“저, 마음이 바뀌었어요.”

16558042202908.png“…….”

더는 이대로 현실을 외면하며 지낼 수 없다. 조금은 뻔뻔한 길을 택해볼 참이었다. 행복해지기 위해……. 외숙모가 그래도 된다고 했으니까. 하늘에 계신 엄마도 그걸 원할 거라고 했으니까.

16558042136169.jpg“저도 윤완 오빠를 지킬 힘을 갖고 싶어요.”

흐트러짐 없던 채 여사의 허리가 힘을 잃으며 아래로 쑥 꺼졌다.

16558042202908.png“나린아.”

나린의 얼굴에 오기가 서렸다. 나린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았다.

16558042136169.jpg“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

16558042202908.png“…….”

16558042136169.jpg“삼성동 땅, 받으면 되는 거예요? 아빠 몫으로 주어졌다는 유산, 다 받으면 되는 거예요?”

나린의 눈동자 위로 투명 수막이 형성되어 반짝 빛을 내었다. 이해할 수 없게도 나린과 한집에 살았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채 여사의 머릿속을 흘렀다. 낯선 환경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기 위해 나린이 했던 인내와 노력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본 채 여사였다. 행여 폐라도 끼칠까 조심스러워하던 모습 하나하나 뇌리에 새겨져 있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것에 있어서는 뜻을 꺾지 않고 맞서던 아이였다. 회사를 그만두는 문제도 그랬고, 전시회 사건으로 경영수업을 받아들일 때도 그랬고, 집을 떠날 때도 그랬다. 보기보다 참 강단 있는 아이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랬던 아이가 욕심내지 않던 것에 욕심을 내겠다고 한다. 이기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선택. 그러나 저 혼자만을 위해서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선택. 그래서 지금 이 아이가 얼마나 절망하고 분노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가여운 생각이 들어 꼭 안아 주고 싶어졌다. 채 여사는 냉정을 되찾았다. 감상에 젖어 있는 건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될 테니까.

16558042202908.png“너한테 간 지분 회수하는 거 멈추라고 할게. 외삼촌께 드린 아파트도 그냥 둘 거지?”

16558042136169.jpg“네. 삼촌은 제가 어떻게든 설득해볼게요.”

채 여사의 만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16558042202908.png“전에 내가 말한 대로 테라 그룹으로 들어와.”

16558042136169.jpg“…….”

16558042202908.png“어느 회사에서 일하는지도 여기선 중요한 문제야.”

나린이 테라 그룹에서 커가며 세훈에게 힘이 되어 줬으면 하고 바라온 채 여사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회사 내에 세훈의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성실하고 똘똘한 아이이니 잘 성장시키면 훌륭한 동업자가 될 것이었다.

16558042202908.png“처음부터 임원 자리에 앉으라고는 안 해. 호텔이든 다른 계열사든, 일단 재무팀에서 실무부터 시작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어때?”

16558042136169.jpg“……알겠습니다. 대신 새로 가기로 한 회사에 양해를 구해야 해요. 이직 도와주신 분도 계시고요.”

16558042202908.png“그래. 나도 세훈이랑 상의해볼게.”

첫 번째 요구 사항이 손쉽게 합의에 이르자 채 여사는 곧장 다음 요구 사항으로 넘어갔다.

16558042202908.png“앞으로는 파티나 사교 모임 같은 데에도 잘 참석해주면 좋겠어. 싫어하는 건 알지만, 다 필요한 거니까.”

16558042136169.jpg“네. 그럴게요.”

나린이 너무 고분고분하게 나오자 오히려 김이 새는 느낌이었다. 독하게 각오를 다지다 못해 뼈에 새기고 온 것처럼 보여 마음이 안 좋았다. 이쯤 되자 다른 요구 사항들은 조금 천천히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보다는 더 중요한 걸 일깨워 줘야겠다. 저 아이의 마음에 흉터가 남는 건 원치 않으니까.

16558042202908.png“나린아.”

16558042136169.jpg“네…….”

16558042202908.png“도일 그룹에서 끝까지 반대하면 내가 단독으로라도 결혼 추진할 거야. 윤완이 데릴사위 삼지, 뭐.”

16558042136169.jpg“…….”

16558042202908.png“그러니까 너무 스트레스받을 거 없어. 나는 나린이 네가 지금 모습을 계속 간직해줬으면 좋겠어.”

이 아이를 아끼게 된 이유를 지켜주고 싶다. 이런 일을 당했다고 해서 깨끗한 마음이 변색되지 않길 바랐다.

16558042202908.png“창조 일보 신혜원처럼 세상을 휘두르려 하지도 말고, 도일 그룹 금화연 여사처럼 외적인 조건으로만 사람을 판단하지도 말고.”

16558042136169.jpg“…….”

16558042202908.png“그래 줄 거지?”

채 여사의 충고는 나린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것들을 새삼 환기시켜 주었다. 마침내 미소를 띤 나린이 당차게 대답했다.

16558042136169.jpg“그럴게요.”

지숙이나 채 여사 같은 좋은 어른들이 곁을 지켜주고 있다는 게 여간 든든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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