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감금2022.03.15.
윤완은 눈을 의심했다.
“어머니께서 왜 여기에…….”
“어제 왔어. 여기서 너랑 몇 달 같이 지낼까 하고.”
미쳤군.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생각을. 험한 말이 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결혼 문제로 이렇게까지 억지를 쓸 일인가 싶어 어머니가 모르는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도야, 오빠.”
험악한 분위기가 전혀 전달이 안 되는지 세연이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화연의 고갯짓에 윤완을 붙잡고 있던 경호원들이 물러나자, 자유를 되찾은 윤완이 재빨리 현관으로 몸을 날린다. 문고리를 비틀려는 그의 손을, 최 부장이 저지했다.
“비밀번호를 걸어놔서 경보음이 울릴 겁니다. 창을 열려고 하셔도 마찬가지고, 깨셔도 결과는 같습니다.”
자신이 표적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에 혼자 남을 나린을 걱정하느라 정작 스스로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하고 말았다. 비서실에서 숙소를 별장으로 정했다고 보고했을 때 의심해봤어야 하는데. 윤완은 차가운 표정으로 어머니를 돌아봤다.
“이런 식으로 제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보십니까?”
“이런 방법까지 쓰게 된 건 유감이야. 하지만 네 고집이 이만저만이 아니니 어쩔 수 없지.”
엄마니까. 엄마로서 자식에게 오점 없는 인생을 선물하려는 것뿐이다. 출생 배경, 성장 환경이 남다른 그 애 옆에선 윤완도 덩달아 온갖 이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될 거였다. 벌써부터 쑥덕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데. 나더러 그 꼴을 어떻게 봐내란 거야.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봐야 했다. 아들이 강적이기에 강수를 두었다. 초강수인 만큼 마지막 방법이란 걸 알고 있다. 사랑이 절로 샘솟을 것 같은 아름다운 도시. 삼 개월의 휴가 뒤에 윤완의 마음이 세연에게 기울어 있기를.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단 말이 꼭 들어맞기를. 화연은 그녀가 아는 모든 신을 상대로 간절히 기도했다. 상황의 불리함을 깨닫고 잠정 후퇴를 결정한 윤완이 2층으로 발길을 돌린다.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오빠!”
세연이 쫓아가려는데 화연이 제지했다.
“내버려 두렴.”
“하지만…….”
“너무 조급해할 거 없어. 시간은 많으니까.”
똑같이 조급한 처지인데도, 화연은 속내를 감추며 세연을 다독였다. *** 숙소에 도착하면 전화를 하겠다던 윤완은 서너 시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린은 초조한 기분이 되었다.
[전화한다더니 무슨 바쁜 일 생겼어요?]
기다리다 못해 먼저 메시지를 했는데 읽지 않음 표시는 쭉 사라지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도 긴 통화 연결음 끝에 상대방이 받을 수 없다는 안내만 흘러나왔다. 하루 종일 마음 졸이며 기다렸지만,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바다 너머 아침을 맞이했을 그에게 재차 메시지를 보냈다.
[일어났어요? 메시지 보면 전화 주세요. 잠깐 목소리만 듣고 끊을게요.]
다음 날 아침. 답장을 기다리느라 잠을 설친 나린의 눈가가 데꾼데꾼했다. 눈을 뜨자마자 폰부터 확인했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워질 줄 모르는 읽지 않음 표시가 온갖 불길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무슨 일 생긴 건가. 혹시 사고를 당했다거나…….’
그러다가 도리도리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그런 끔찍한 일은 생각으로도 하지 마.’
할 수 있는 건 전화뿐이었지만, 이번엔 폰이 꺼져 있다는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어디예요? 일하느라 바쁜 거 아는데 그래도 답장해주면 안 돼요? 걱정돼서 그래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혹시 폰 잃어버렸어요?]
폰 액정 가득 나린의 상상을 담은 말풍선들이 일렬로 줄지어 섰다. 하지만 쭉 혼자 떠들다 보니 제풀에 지치고 말았다. 보고 싶다면서. 이렇게 누군가가 보고 싶은 적 처음이라면서. 보고 싶은 사람한테 이렇게 하는 게 어딨어. 알 수 없는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혼자서만 애태우고 있는 건 아닌가 억울해질 무렵, 세훈으로부터 나린의 안위를 점검하기 위한 전화가 걸려왔다. 윤완일까 싶어 허둥지둥 폰을 확인한 나린은 조용히 실망을 했다. 세훈은 아이 달래듯 조곤조곤 나린을 안심시켜 주었다.
[출장 일정이 너무 바쁘면 그럴 수 있어. 멕시코 왔다 갔다 하느라 정신없을 수도 있고.]
“그래도 이렇게까지 연락이 없는 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윤완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으면 여긴 벌써 난리 났지. 걱정 마. 일정이 빡빡해서 그런 걸 거야. 폰을 숙소에 두고 나갔거나.]
세훈은 태평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나린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울리지 않는 폰을 불안하게 주시했다. 그러다가 곧 생각을 궁굴리기로 했다.
‘세훈 오빠 말이 맞을 수도 있잖아. 별일 없는데 나 혼자 조바심내고 있는 걸지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나쁜 일이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곧 연락이 오겠지. 바빴다며, 미안해하겠지. 좀 더 인내심을 가져 보기로 한 나린은 외출 준비에 착수했다. 오늘은 민하와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 저녁 식사도 건너뛴 윤완은 꼼짝없이 2층 게스트룸에 틀어박혀 하루를 보냈다. 탈출 방안을 강구하려 밤새도록 뇌세포를 총동원했지만, 폰도 빼앗기고 PC도 없는 상황에선 할 수 있는 게 전무했다. 최 부장의 경고처럼 보안 프로그램이 철통같은 건물이라 몰래 빠져나가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애초에 승산이 없는 시도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당장의 탈출을 단념한 윤완은 들끓는 분노를 잠재웠다. 이럴 때일수록 냉철한 상황 판단이 필수였다. 이곳은 비자 없이 체류할 수 없는 나라다. 발을 묶어둘 수 있는 시간은 최장 삼 개월. 딱, 비자가 만료될 때까지. 출입국 관리가 철저한 곳이니 제아무리 날고 기는 도일 그룹이라도 이 이상은 손쓰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엔 시간 싸움인 셈이었다. 단순 시간 싸움에 불과하다면 윤완도 버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좋은 기회일지 몰랐다. 맑은 날씨, 푸르른 바다, 여유로운 일상. 차분히 중장기 계획을 구상하기엔 이보다 더 안성맞춤인 장소가 없었다. 나린이만 아니라면…….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심장이 타들어 가는 유일한 이유. 벌써 보고 싶어서 심장이 멎을 지경인데……. 매일 밤 그 애를 품에 안았던 기억으로 버티는데……. 그리움이 단숨에 망망대해를 건넌다. 전화하겠단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토라졌을까. 연락이 끊겨서 오만가지 상상을 하며 불안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할수록 미칠 지경이었다. 오로지 나린을 위해서, 이곳에 매인 기간을 최소화할 방법이 절실했다. 윤완은 다른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측근 중 누군가는 그의 연락 두절 사태를 알아차리고 도와주러 올 거란 가능성. 준우든, 손 차장이든. 하다못해 둔탱이 연세훈이든.
‘손 차장이 제일 가능성이 높긴 한데…….’
눈치 빠른 그라면 일일 보고에 대한 피드백이 늦어지는 데에 의심을 품을 것이다. 그룹 비서실 소속이니 윤완의 행방을 수소문하기에 용이한 위치이기도 했다.
‘뭐가 됐든,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건가.’
한숨을 집어삼키며 목을 뒤로 젖히자, 뻑적지근하게 뭉쳐 있던 뒷덜미가 찌릿했다. 곱씹을수록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다. 아무리 그래도, 감금이라니.
‘이런 무리수를 둬야 할 만큼 내 결혼 상대가 중요하단 말이야?’
이따금 어머니의 생각을 이해 못 할 때는 있었지만 이번만큼 상식 밖이라고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그보다 더 납득이 안 가는 건 아버지의 묵인이다. 그간 회사 일을 하면서 지켜보셔서 아실 텐데. 도일 그룹을 버리겠단 내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걸. 윤완은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냥 자선 파티에서 선수를 칠 걸 그랬다. 나린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단상을 그냥 내려온 게 사무치도록 후회됐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오빠.”
세연의 명랑한 음성이 청각을 찔렀다.
“어제 저녁도 안 먹고 배고프지? 아침 먹게 내려와. 어머님 기다리셔.”
침대에 앉아 무색무취의 눈으로 세연을 응시하던 윤완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이에 굴할 세연이 아니었다. 세연은 꿋꿋하게 방 안으로 걸음을 들여놓았다.
“나도 이렇게까지 할 마음은 없었는데 어머님께서 간곡히 부탁하셨어. 같이 지내다 보면 분명 오빠 생각이 바뀔 거라고.”
윤완이 힐끔 세연을 돌아봤다.
“말했을 텐데.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대체 왜 이런 시간 낭비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네.”
다시 세연을 외면한 그의 입에서 무미건조한 음성이 흘렀다. 짜증이든, 분노든, 세연에게는 그 어떤 감정도 보여주지 않을 심산이었다. 상대를 지치게 만드는 데엔 무반응만 한 게 없을 테니. 나린이 언급되자 세연은 단박에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이 주인공인 줄로만 알았던 파티에 혜성처럼 등장해 윤완의 손을 잡고 떠난 여자. 저보다 나을 게 하나 없어 보여 분통을 터뜨렸던 기억은 금세 화를 돋웠다.
“시간 낭비가 될지는 두고 봐야 아는 거 아냐?”
세연의 당돌함은 서울에서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빳빳하고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적어도 기회는 줄 수 있잖아.”
“…….”
“고작 석 달이야. 석 달 후에도 오빠 마음이 그대로면, 그땐 깨끗이 물러날게.”
석 달이면 오빠 마음 빼앗아올 수 있어. 그런 자신감이 엿보이는 엄포.
“시간 낭비라니까. 난 여기서 시간 낭비할 생각이 없고.”
“뭐야. 자신 없는 거야?”
세연은 윤완의 말을 저 좋을 대로 해석했다.
“…….”
“떨어져서 석 달도 못 버틸 감정이면, 헤어지는 게 낫지 않겠어?”
세연이 윤완의 옆에 붙어 앉으며 스리슬쩍 기대려 하자 윤완이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안해진 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재차 입을 열어 태연한 목소리를 내려 해본다.
“어머님께서도 이게 마지막 방법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 그러니까 딱 삼 개월만 참아 봐.”
삼 개월이 아무 시간도 아닌 양 가볍게 말하는 태도가 윤완의 신경을 거슬렀다. 화연 못지않게 말이 통하지 않을 상대라고 판단한 그는 그대로 문을 나서 맞은편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침 안 먹어?”
세연의 외침은 그가 발산하는 냉기를 뚫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
“CFO 대행이요?”
나린의 손에서 젓가락이 분리되어 바닥에 부딪히는 걸 본 민하가 덩달아 움찔한다.
“몰랐어? 사적으로 친하다더니.”
“……몰랐어요.”
넋이 나간 채로 나린이 중얼거렸다. 새 젓가락을 꺼내 앞에 놓아주며, 민하가 하던 얘기를 마저 이었다.
“처음엔 일주일 출장 가는 것처럼 하더니 갑자기 몇 달 자리를 비우게 됐다고 그러더라고.”
“…….”
“업무 대행까지 정해졌어. 강석원 부사장님으로.”
나린의 눈빛이 흐리멍덩해졌다. 분명 9일이라고 했는데. 이번 주 목요일에 돌아온다고, 그렇게 약속하고 갔는데. 무언가 어그러진 게 틀림없다. 이쯤 되니 그런 확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장님. 정말 죄송한데, 저 전화 한 통만 하고 올게요.”
“그래.”
민하에게 양해를 구한 나린은 비치적비치적 식당 밖으로 나갔다. 다리에 좀처럼 힘이 실리지 않았다. 윤완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른다.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었던 감정 없는 기계음을 또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나린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가락을 통제하여 겨우 전화를 걸었다. 준우 오빠. 네 글자가 폰 액정에 떠올랐다.
[나린아, 왜?]
“준우 오빠…….”
음절 끝에 어쩔 수 없는 떨림이 섞여들었다. 평소와 다른 목소리에 준우의 반응도 심각해졌다.
[왜 그래? 무슨 일 생겼어?]
“……네.”
나린은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들먹여 겨우 답을 뱉었다.
[무슨 일인데? 어디야? 데리러 갈까?]
“아뇨, 제가 아니라……. 윤완 오빠한테 생긴 것 같아요.”
[윤완이한테?]
“……네.”
나린의 음성이 말라비틀어진 고목 밑둥 같다.
“……도일 전자에서 CFO 대행을 임명했대요.”
새하얀 머릿속을 뒤적여서, 방금 민하로부터 들은 얘기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 전달했다.
[CFO 대행은 왜? 윤완이 보직 바꾼대?]
“윤완 오빠가 몇 달 자리를 비울 거라고 했다나 봐요.”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진짜야?!]
웬만해선 들썽거리지 않는 준우가 폰에 대고 소리를 쳤다.
“네.”
[그럴 리가……. 잘못 안 거겠지.]
“도일 전자 경영지원실에 있는 선배한테 들은 거예요.”
[…….]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봐 주실 수 있으세요?”
[알았어. 바로 알아볼게. 끊자.]
사안의 중차대함을 인지한 준우의 행동이 민첩해졌다. 전화를 끊은 나린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고자 벽에 기대어 섰다. 알지 못하는 곳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정신이 가무러졌다. 윤완이 걱정되어서 금방이라도 마음이 부서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