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데려올걸 그랬어2022.03.11.
윤완이 출장을 떠나고 이틀 뒤, 나린의 정식 퇴사일이 되었다. 진짜로 퇴사자 신분이 되고 나니 마지막 출근 때와는 또 다른 시원섭섭함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저 오늘부로 완전 퇴사예요. 시간 될 때 위로주 사주세요.]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려 민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린 씨가 날 사줘야지. 퇴사한 사람이 승자인 거 몰라?]
민하와 좀 더 메시지를 이어간 끝에 모레 저녁,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민하는 CFO의 부재 덕에 이른 퇴근이 가능할 거라고 전해왔다. 부서 전체가 축제 분위기라는 말도 함께.
[부사장님한테 이르면 안 돼.]
뒤늦게 나린과 윤완의 친분을 떠올린 민하가 첨언하고, 나린은 대리 억울함을 느꼈다. 알고 보면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인데. 그러나 도일 전자 경영지원실 직원이라면 어느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평가였다. 그 다정한 모습을 나만 볼 수 있다는 게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어제 LA 공항에 도착한 직후 그가 보내왔던 메시지를 열어본다.
[도착했어. 벌써 보고 싶다.]
쪽. 그의 메시지에 입을 맞췄다. 휴대폰에 입을 맞추는 바보 같은 행동은 평생 안 할 줄 알았는데. 언젠가 수정이 폰에 입을 맞추는 걸 보고 몇날 며칠을 놀려댔던 기억이 난다. 뭐든 쉽게 장담하면 안 된다는 걸, 무슨 일이든 신중해야 한다는 걸 이렇게 또 깨달았다. 문득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시차를 확인해보니 연락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업무 중이라 전화가 힘들 수도 있으니 메시지를 보내두기로 했다.
[바쁘죠? 호텔 들어가면 전화해줄 수 있어요?]
전화는 세 시간 후에야 걸려왔다. 반차를 써서 일찍 퇴근한 수정과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던 나린은 부르르 떠는 전화기를 잡아채며 방 안으로 달음질쳐 들어왔다.
“여보세요?”
[나야.]
“이제 호텔 들어간 거예요?”
[응. 미팅 끝나고 저녁 먹고 술 한잔하고. 그랬더니 늦었네.]
“누구랑요?”
[제이크 밀턴.]
“와! 플럼 CEO 말하는 거죠? 부럽다. 그런 줄 알았으면 따라갈걸.”
세계적인 유명인사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흥분한 나린이 목소리를 높였다.
[…….]
“그 사람 실물은 어때요? 진짜 사진처럼 잘생겼어요?”
나린은 전화기 너머의 윤완이 빈정이 상한 줄도 모른 채 말을 이었다.
[연나린.]
“네?”
[지금 나랑 떨어져 있는 건 괜찮고, 플럼 CEO 못 본 건 아쉽고. 그런 거야?]
아, 그렇지. 깜빡했네. 이 질투의 화신을. 그럼에도 질투할 때마다 놀려주고픈 마음 또한 여전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놀릴 수 있겠어.
“아뇨. 당연히 둘 다 안 괜찮죠. 오빠랑 떨어져 있는 것도 안 괜찮고, 플럼 CEO 못 본 것도 안 괜찮고.”
[끊어.]
예상대로 윤완의 목소리가 차게 식었다.
“왜요.”
[기분 나쁘니까.]
보이지 않아도 퉁명스러운 얼굴이 충분히 상상되었다. 이때만큼 이 남자가 귀여운 순간도 없는데.
“농담이에요. 화 푸세요.”
더 이상 놀렸다가는 정말로 전화가 끊길지 모른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됐다. 별거 아닌 일에도 서운함이 쌓여 큰 싸움으로 번지기 십상이니까. 얼른 대화 주제부터 바꾸자.
“내일은 뭐 해요?”
[왜? 또 누구 잘생긴 사람 만난다고 하면 비행기 타고 날아오려고?]
전화 저편의 목소리는 아직 냉랭하기만 했다. 전화로는 역시 한계가 있나 보다. 눈앞에 있었으면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금세 풀렸을 텐데.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나한테 잘생긴 사람은 윤완 오빠밖에 없는데?”
나린은 짐짓 너스레를 떨어댔다.
[……방금 한 말을 녹음해 놨어야 하는데…….]
“그건 그냥, 사람들 얘기가 맞는지 확인해본 거죠. 제 의견이 아니라.”
억지 주장이었으나 당당했다. 때로는 억지를 써도, 이치에 닿지 않는 소리를 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관계니까. 연인이란 그런 거니까.
[관두자, 이 여우야.]
철면피 화법이 통했는지 윤완의 음성에 웃음기가 어렸다. 나린도 따라서 자그맣게 웃음소리를 낸다. 나린의 웃음소리는 윤완의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내일 추가 미팅 진행하고, 끝나는 대로 샌디에이고 넘어갈 거야.]
“샌디에이고는 왜요?”
[멕시코 공장 둘러보려고.]
“샌디에이고에서 멕시코로 출퇴근해요?”
[응, 비행기로.]
상대적으로 열악한 멕시코 대신, 샌디에이고에서 국경을 넘어 출퇴근하는 방식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비행기라니. 일반 직원들은 상상도 못 할 스케일이긴 했다.
“……샌디에이고가 그렇게 예쁘다던데.”
[맞아.]
“날씨도 좋다고 들었어요.”
[따뜻해. 햇살도 좋고.]
“…….”
[……다음엔 같이 오자.]
보여주고 싶어. 너에게…… 아름다운 풍경을.
“그래요.”
[……아직 이틀밖에 안 지났다니.]
윤완이 혼잣말처럼 한탄했다.
“다음 주면 만날 수 있잖아요.”
못지않게 서운한 마음을 꼭꼭 감춘 나린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한국 가면 떨어져 있었던 시간만큼 꼭 붙어 있을 거야.]
“회사는 어떡하고요?”
[휴가 내면 돼.]
“출장 후속 업무로 엄청 바쁠 거잖아요.”
[아냐. 꼭 휴가 낼 거야.]
“……알았어요. 기대할게요.”
[…….]
“거긴 밤이죠? 얼른 씻고 자요.”
[응…….]
“잘 자요.”
[너도.]
“…….”
[나린아.]
“네……?”
[너무너무 보고 싶어.]
“…….”
[……누군가를 이렇게 보고 싶어 해본 적 처음이야.]
“…….”
[이 정도일 줄 알았으면 너도 데려올걸 그랬어.]
“조금만 참고, 금방 만나요.”
[……응.]
“끊을게요.”
그에게 맡겨 두었다간 무한정 통화가 늘어질 것 같아 나린이 먼저 종료 버튼을 눌렀다. 시차 적응도 안 됐을 텐데 조금이라도 일찍 휴식에 들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애정이 듬뿍 전달되어 왔던 폰을 소중히 품에 안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멀찍이 떨어지고 나니 휴대폰이 얼마나 위대한 발명품인지 실감하게 되었다. *** 단란한 저녁식사를 마친 나린이 막 욕실로 향하는데 폰이 울렸다. 나린은 보나마나 준우일 거라고 생각했다. 윤완이 출장을 떠난 이후, 세훈과 준우가 조석으로 갈마들며 안부 전화를 걸어오고 있었다.
[별일 없었어?]
전화를 받자 어제의 복제판 같은 준우의 질문이 들려온다.
“네, 없었어요. 무슨 일 생기면 안 숨기고 다 말할 테니까 이렇게 전화 안 하셔도 돼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세훈이가 꼭 아침저녁으로 확인을 해야 한다잖아.]
“세훈 오빠가요?”
[응. 내가 생각해도 과한 거 같은데 말이지.]
“세훈 오빠, 나중에 연애하면 장난 아니겠다.”
[연애하잖아, 지금.]
“어머. 정말요? 누구랑요?”
덤덤히 전해진 깜짝 소식에 나린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듣기 싫은 비명이 아니라 기분 좋은 탄성이어서, 가만히 듣고 있던 준우도 덩달아 마음이 말캉해졌다.
[지난번에 내 약혼식 때 데려왔던 사람.]
기억이 나는 것도 같다. 이름이 현주라고 했던가.
“그땐 그냥 파트너라고만 해서 사귀는 줄 몰랐어요. 조만간 세훈 오빠 만나서 얘기 들어봐야겠다.”
[너도 남의 연애 얘기 좋아하는구나?]
“친한 사람이면요. 준우 오빤 관심 없어요?”
[응. 윤완이도 별 관심 없을걸.]
윤완 오빠야 워낙 남 일엔 신경을 안 쓴다지만…….
“진짜요? 안 설레요?”
[하나도.]
이런 데에선 또 닮은 구석이 있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윤완과 준우는 비슷한 색을 띠는 것도 같았다. 윤완은 항상 차가운 색이고 준우는 이따금 차가운 색을 띤다는 게 큰 차이점이긴 해도.
‘윤완 오빠가 좀 더 사회화가 진행되면 준우 오빠처럼 되는 건가.’
그런 거라면 쌍둥이 자매의 남자 보는 취향도 꽤나 닮아 있었다.
[근데 너희 커플은 좀 관심이 가.]
나린의 단상이 끝을 모르고 뻗어가는데 준우가 불쑥 내뱉었다.
“왜요……?”
[도윤완이 그렇게 안절부절못해 하고 감정적으로 구는 거 처음 보거든. 신기한 구경거리랄까.]
준우는 생각할수록 재밌다는 듯 웃어댔다.
[오늘은 윤완이가 전화 안 했어?]
“했어요.”
그래. 안 했을 리가 없지.
[뭐래?]
“어어. 사적인 통화 내용을 왜 물어요? 당연히 비밀이죠.”
[그런가.]
준우가 한바탕 웃어 재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진짜, 전화 받느라 하루가 다 가는 거 같아요. 아침엔 세훈 오빠, 오후엔 윤완 오빠, 저녁엔 준우 오빠.”
나린이 과장을 섞어 툴툴댔다.
[오빠 복이 터졌네.]
“이렇게까지 터질 필요는 없는데 말이죠.”
준우는 또 한 번 파안일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알았어. 난 내일부터 안 할게. 대신 진짜 무슨 일 있으면 꼭 말해 주는 거다.]
“네. 약속할게요.”
[윤완이 오기 전에 세훈이랑 밥 한번 먹자. 월요일 저녁, 어때?]
“좋아요.”
[세훈이랑도 조율해 둘게. 잘 자고.]
“준우 오빠도요.”
담백한 끝인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내일모레는 민하를 만나고, 그다음 날엔 세훈과 준우를 만나고. 사흘만 더 어떻게 견디면 끝이 보인다. 돌아오는 목요일엔 그가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걸로 되어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금방 가겠네.’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참 다행이야. 달콤한 기분을 안고 잠자리에 든 나린은 그날 밤, 공항으로 윤완을 마중 나가는 꿈을 꾸었다. 행복해서, 꿈이란 걸 알고도 깨지 않길 바랐다. 눈을 뜨면 그가 돌아오는 아침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다음 날, LA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한 윤완은 차를 타고 샌디에이고 별장으로 향했다. 샌디에이고에 마침 할아버지 소유의 별장이 있었다. 십여 년 전, 도시의 여유로운 분위기에 홀딱 반한 도문형 회장은 그 즉시 해안가 고급 주택을 매입해 별장으로 삼았다. 윤완은 작년 여름휴가를 이곳에서 보냈다. 세훈, 준우, 태준도 함께였다. 올여름엔 나린이랑 같이 와야지. 나린을 떠올리자마자 주저 없이 전화를 건다.
[세훈 오빠한테 여자친구 생긴 거 알았어요?]
전화가 연결되고, 윤완은 관심도 없는 세훈의 연애 얘기가 시작되었다.
[어떻게 만났을까요? 만나면 물어봐야겠어요.]
뭘 어떻게 만났겠어. 집안끼리 약속해서 만났겠지. 목소리가 저렇게나 밝다니, 보고 싶어서 애가 타는 사람은 그뿐인 것 같다. 그럼에도 다행이라고 안심하였다.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뜻이니까.
“지금은 차 안이라 길게 통화 못 해. 이따 숙소 도착해서 다시 전화할게.”
운전기사를 의식한 윤완은 짤막하게 통화를 끝마쳤다. 차는 두 시간 남짓 달려 마침내 목적지에 닿았다. 별장 안으로 들어가는 윤완의 걸음에 조바심이 실렸다. 해가 지기 전 통유리창을 통해 파랗게 담기는 바다를 나린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유리창을 마주하고 선 그가 서둘러 폰을 꺼내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오고. 예민한 윤완이 뒤를 돈 순간, 덩치 큰 사내 둘이 축지법이라도 쓴 것처럼 날쌔게 그를 덮쳤다. 사내들은 눈 깜짝할 사이 윤완의 팔을 한쪽씩 붙들어 맸다.
“실례하겠습니다, 부사장님.”
정중한 말씨와 달리 거친 손동작이 이어지며 윤완의 손에서 폰이 사라진다.
‘……이게 무슨.’
윤완은 그들로부터 벗어나려 힘을 써보았지만, 건장한 사내 둘을 혼자서 당해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윤완은 침착하게 상황을 되짚어보았다. 보안 시설이 삼엄한 별장 안에 소리소문없이 잠입해 있었던 걸로 보아, 미리 준비된 함정임에 틀림없다. 결정적으로 그들의 입에서 나온 ‘부사장님’이라는 호칭. 윤완의 머릿속에서 불길한 가설이 세워지던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또 다른 사내가 출현했다. 윤완은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최 부장님?”
몇 년 전까지 그룹 직속 비서 겸 경호원을 지내다가 홀연 자취를 감춘 아버지의 옛 측근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사장님. 늦었지만 승진 축하드립니다.”
“……축하 인사를 이딴 식으로 하나요?”
가설이 진실임을 확실한 윤완은 저음으로 으르렁거렸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저도 지시에 따르는 것뿐이니 이해해주십시오.”
“누구의 지시입니까?”
그때였다. 2층으로 이어진 계단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답을 가로챘다.
“왔니?”
계단이 직각으로 꺾이는 층계참 위에 화연이 서 있고,
“오랜만이야, 오빠.”
뒤에서 세연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