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 보고 싶을 거야 (81/101)

#81. 보고 싶을 거야2022.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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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라 호텔 강남 2501호. 윤완과 세훈, 준우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둘러 앉아 있다. 태준이 빠진 게 처음도 아닌데 그 빈자리가 몹시도 헛헛하게 느껴졌다. 어쩌다 일이 있어 못 오는 것과 앞으로 쭉 올 수 없는 것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16558041547421.jpg“셋만 모인 게 처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허전하냐.”

세훈이 푸념하자, 윤완이 마뜩찮은 눈으로 쳐다본다. 지은 죄를 잘 아는 세훈의 어깨가 위축되었다.

16558041547421.jpg“야, 너무 그러지 마. 그날 네가 예정대로 터뜨렸으면 나린이도 알았을 거 아냐.”

16558041547429.jpg“…….”

맞는 말이긴 했지만 세훈이 전화를 건 타이밍이 최악이었다. 얼마나 공들여 준비한 밤이었는데.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준우가 중재에 나섰다.

16558041547433.jpg“그래. 어차피 알게 됐을 일 미리 알렸다고 생각해.”

16558041547421.jpg“…….”

16558041547433.jpg“연세훈, 넌 그런 중요한 얘기하기 전에 어딘지, 누구랑 있는지 확인 좀 하고.”

16558041547421.jpg“알았어. 너무 놀라서 그랬지, 나도.”

준우가 연 화해의 장에 세훈이 먼저 발을 디뎠다. 윤완도 날카롭게 세웠던 눈초리를 풀었다. 이미 지나간 일, 길게 타박할 마음도 없긴 했다.

16558041547433.jpg“나린이 파티에 오게 도와주길 잘했네. 무슨 일을 쳐도 크게 칠 것 같아 불안하더라니.”

준우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윤완을 흘겨보았다. 그가 그룹의 차기 후계자로서 어떤 시간을 견디며 살아왔는지 잘 알기에, 화연이 전한 소식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16558041547433.jpg‘도일 그룹은 저 녀석의 전부였는데.’

자리를 내려놓는다 해도 경력이 무위로 돌아가는 건 아니니 어디에서든 환영받긴 할 거였다. 하지만 아무리 높은 자리로 간다 한들 도일 그룹 후계자 자리보다 높을 순 없었다.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때도 있고 뜻이 꺾일 때도 있을 텐데. 견뎌낼 수 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도윤완이?

16558041547433.jpg“너 진짜 자신 있냐?”

준우는 진심을 담아 걱정했다.

16558041547429.jpg“자신 있어.”

16558041547421.jpg“대단하다.”

윤완의 무던한 대답에 세훈이 경탄한다. 윤완의 선택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그들 중 누구에게도 쉽지 않았다. 이 세계를 떠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는 살아본 적 없는 귀공자들에겐. 쉬웠다면 태준이 지아와 헤어지는 일도 없었을 거였다.

16558041547421.jpg“그래도 아직은 아닌 거지?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

세훈이 재차 따져 물었다. 도일 그룹 후계자 자리에 도윤완이 아닌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건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 그림이었다.

16558041547429.jpg“……아직은.”

미정일 뿐 아주 마음을 접은 건 아니다. 칼자루는 이제 부모님들 손에 쥐어져 있었다. 다행히 자선 파티 이후 다시 세연과의 만남이 주선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기다려 보기로 했다. 부모님들께서 마음을 바꾸시는 데엔 제법 긴 시간을 요할 테니. 뭐든 뜻대로 하며 살아온 분들이기에 더더욱.

16558041547433.jpg“근데, 오늘 왜 보자고 했어?”

모임을 소집한 이가 윤완이란 걸 상기한 준우가 물었다. 윤완은 특별한 목적 없이 연락할 사람이 아니었다.

16558041547429.jpg“너희한테 부탁이 있어.”

윤완의 얼굴이 세훈에게 한 번, 또 준우에게 한 번 지그시 머물다 간다.

16558041547421.jpg“뭐?”

아리송한 세훈과 달리, 준우는 뻔하단 얼굴을 했다. 뭐겠어. 도윤완이 이렇게까지 나올 일이라면 하나뿐이지.

16558041547429.jpg“내가 내일 출장을 가거든. LA랑 샌디에이고.”

16558041547421.jpg“얼마나?”

세훈이 물었다.

16558041547429.jpg“주말 포함 9일.”

윤완이 건조한 입술을 축이려 생수병을 집어 드는데 준우가 핵심 메시지를 가로채 갔다.

16558041547433.jpg“나린이 부탁하려는 거지?”

역시, 세훈이랑 다르게 눈치도 빠르고, 진중하고. 몇 안 되는 친구들이지만 구성이 이토록 균형 잡혀 있을 수가 없다.

16558041547429.jpg“내가 없는 사이 혹시 무슨 일 생길까 봐.”

채 여사도 든든히 버티고 있고, 화연도 지난번이 마지막 만남이라고 했으니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겠지만. 그럼에도 아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어서 이렇게 부탁을 하게 되었다.

16558041547421.jpg“야. 그걸 뭘 부탁까지 하냐? 난 남도 아니고 사촌 오빤데. 걱정 마. 내가 눈 크게 뜨고 지켜볼게.”

16558041547429.jpg“나 몰래 나린이를 신혜원한테 데려다준 게 누구더라.”

호기롭게 장담하는 세훈을 향해 윤완이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16558041547421.jpg“그건!”

발끈하던 세훈은 입을 닫았다. 이유야 어떻든 나린을 호랑이 소굴에 데려다준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었다.

16558041547421.jpg“그렇게 엄청난 게 준비돼 있을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냐.”

세훈이 억울함을 표출하며 찡찡대는데,

16558041547433.jpg“나도 잘 지켜볼게.”

준우가 마른 웃음을 웃으며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든다.

16558041547429.jpg“부탁해.”

세훈과 달리 준우에게는 무한한 신뢰의 눈빛이 쏟아졌다.

16558041547421.jpg“나린이가 부탁해서 어쩔 수 없었던 건데…….”

세훈이 구시렁댔지만 못 들은 척한 윤완은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못내 서운해하던 나린이 눈에 밟혀 마음이 편치 않았다. *** 오래전부터 잡혀 있던 중요한 출장이라 미룰 수가 없었다. 함께 갈까도 고민했지만 사규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이었다. 누구보다 모범을 보여야 할 그가 규정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순 없었다. 그건 나린에게도 이롭지 못한 선택이었다. 윤완은 목 끝까지 차오른 같이 가자는 말을 따스한 염려로 갈음했다.

16558041547429.jpg“무슨 일 있으면 꼭 세훈이랑 준우한테 연락해. 채 이사님께 알려도 괜찮고.”

1655804159522.jpg“걱정 마세요.”

16558041547429.jpg“어머니께서 만나자고 하셔도 절대 나가지 마. 예의 차린다고 나갈 거 없어. 알았지?”

1655804159522.jpg“알았어요. 몇 번을 말해요. 귀에 딱지 앉겠네.”

무한궤도를 도는 그의 잔소리를 멈추려, 나린이 슬쩍 손깍지를 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손 틈새를 꽉꽉 채우자 윤완의 마음도 행복으로 꽉꽉 채워졌다. 윤완은 나린에게 붙들린 손을 끌어와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16558041547429.jpg“너 쉬는 동안 자주 만나기로 했는데. 이렇게 돼서 미안…….”

1655804159522.jpg“일 때문이잖아요. 그만 미안해해요. 저도 앞으로 금지할래요. 미안하다는 말 금지.”

끌려간 팔을 따라 기울어진 몸을 더욱 기울인 나린이 그의 어깨에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윤완의 심장이 박자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한다. 데려가고 싶다. 같이 가자고 하면 그러자고 할 텐데. 비밀스런 동행이어도 괜찮다고…….

16558041547429.jpg“나 없는 동안 뭐할 거야?”

이기적인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나린의 계획을 물었다. 알차게 예정된 활동들을 확인하고 나면 데려가고픈 마음을 단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655804159522.jpg“음……. 생각을 좀 해보려고요.”

16558041547429.jpg“무슨 생각?”

살짝 틈을 벌린 나린의 입술이 갈피를 잃는다. 외숙모와의 대화 이후, 정답도 해설지도 없는 난제가 주어졌다.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건지. 용서하는 게 맞는 건지. 이대로 모르는 체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니, 용서하고 말고 할 자격이 있기나 한 건지.

1655804159522.jpg“……윤완 오빠 생각이죠, 당연히.”

그럼에도 달달한 장난으로 무마한 건 늘 행복만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의 발로였다. 출장을 앞두고 정신없을 그에게 짐을 얹고 싶진 않으니까.

16558041547429.jpg“틈날 때마다 연락할게. 시차 맞춰서.”

서운함이 짙게 배인 목소리에, 허리를 곧추 세운 나린이 그와 눈을 맞췄다.

1655804159522.jpg“무리하지 마세요. 출장 가면 바쁜 거 다 아니까요.”

16558041547429.jpg“출장 자주 가봤어?”

1655804159522.jpg“지난번 싱가포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요.”

16558041547429.jpg“…….”

당당하기 이를 데 없는 대답에 윤완은 어이없단 표정을 했다. 그 사이 나린이 입매를 쭈그러트린다. 싱가포르 출장을 떠올리자 난데없었던 추가 업무 지시가 부록처럼 연상되었다.

1655804159522.jpg“그때 갑자기 보고서가 추가되는 바람에 매일 야근했거든요. 회사랑 호텔만 왔다 갔다 해서 나중엔 서울인지 싱가포르인지 헷갈릴 정도였어요.”

거기에다 테라 호텔 손녀라는 배경 때문에 서먹해져 버린 동료들까지……. 윤완과 보냈던 시간마저 없었더라면 최악의 기억으로 남았을 첫 해외 출장이었다.

16558041547429.jpg“아, 그거.”

잊고 있던 사실이 기억난 윤완은 짧게 감탄사를 뱉었다.

16558041547429.jpg“판관비 분석 보고서 말하는 거지?”

1655804159522.jpg“어? 어떻게 알았어요? 그게 CFO 보고까지 됐어요?”

그럴 만한 이슈 사항은 없었던 것 같은데.

16558041547429.jpg“아니. 그 보고서, 내가 지시한 거거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린의 눈꺼풀이 규칙적인 속도로 아래위를 왕복했다. 상황 파악이 끝난 나린이 깍지 낀 손을 확 잡아 뺀다. 배신감에 머리가 멍했다.

1655804159522.jpg“아니, 왜? 대체 왜요?”

잊고 있던 윤완의 첫인상이 되살아났다. 역시. 이 사랑은 미운 정에서 시작된 거야. 틀림없어. 억울해하는 나린의 표정이 귀여워서 윤완은 웃음부터 흘렸다. 그의 손이 야무지게 움직여 떠나간 나린의 손을 되찾아왔다.

16558041547429.jpg“너랑 윤재오 귀국 날짜가 같길래 떼어 놓으려고.”

출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찰거머리 같이 들러붙던 재오가 생각나자, 그제야 나린의 기억도 완전해졌다.

1655804159522.jpg“아.”

오해가 풀리기는 했으나 억울함은 가시지 않았다. 뜬금없던 추가 업무 지시와 늘어난 출장 일정에 얼마나 절망을 했던가.

1655804159522.jpg“그래도 그렇지, 그런 식으로 막 일 더 주고, 일정 바꾸고 그러면 어떡해요? 완전 직권 남용이에요.”

16558041547429.jpg“……그 정도로 널 좋아했던 거지.”

1655804159522.jpg“대체 어느 대목에서요?”

16558041547429.jpg“내가 없는 데서 네가 안전하길 바랐다는 대목에서?”

나린이 기가 막혀서 훅 콧김을 뱉는데, 윤완이 성큼 얼굴을 가까이했다.

16558041547429.jpg“그때 결심했었어, 난.”

코끝이 스칠 법한 거리에서 그윽한 눈을 한 그가 속살거렸다. 한순간에 두 사람을 에워싸는 야릇한 공기. 예고 없는 표정 변화가 미묘한 긴장감을 몰고 온다.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바꾸는 건 반칙이잖아요…….

16558041547429.jpg“한국에 가면 다 뒤집어엎자고.”

1655804159522.jpg“…….”

16558041547429.jpg“널 내 옆에 두자고.”

말을 마친 윤완의 입술이 찬찬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곳엔 내내 꿈꿔왔던 파라다이스가 있었다. 윤완의 입술이 나린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아준다. 작고 도톰한 분홍빛 입술에 윤기가 더해졌다. 가느스름하게 뜬 윤완의 눈을 따라 나린의 눈빛도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16558041547429.jpg“보고 싶을 거야, 나린아.”

윤완의 왼손이 잘록한 허리에 감기고, 활짝 펼친 오른손은 붉게 물든 뺨 위를 폭 덮었다.

16558041547429.jpg“보고 싶어서 애가 닳을 거야.”

보드라운 귓불에서 시작된 음성이 애틋한 진심이 되어 마음을 울렸다. 금방이라도 심장을 녹여 없앨 감미로움에 나린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진다. 윤완은 나린을 번쩍 들어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몸이 허공에 놓이는 순간, 나린의 두 팔이 반사적으로 윤완의 목에 둘러졌다. 줄곧 서로를 훑던 눈동자가 닿을 듯 가까이 놓이자 윤완이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겹쳐왔다. 열이 옮을 듯 뜨거운 체온. 그럼에도 결코 벗어나고 싶지 않은 품 속. 나린의 등줄기를 받치던 손이 천천히 높이를 낮추고, 윤완의 상체가 기울어지며 나린의 몸도 속절없이 하강했다. 쓰러지는 느낌에 놀란 나린은 그의 셔츠를 꾹 거머쥐었다. 그 바람에 도리어 적극적으로 그를 당겨온 셈이 되고 말았다. 한 번 목표를 정하면 놓치는 법이 없는 집요함은 나린에게라고 예외가 없었다. 자세가 바뀌는 와중에도 윤완의 입술은 나린의 입술을 물고 놓아 주지 않았다. 윤완이 소파 바닥을 짚은 팔에 힘을 주었다. 버티는 건 한 팔로도 충분했기에 다른 한 손으로 나린의 얼굴과 목을 쓰다듬는다. 입술이 만든 비밀 통로로 뜨거운 숨결이 쉼 없이 오갔다. 이대로 없어져 버리는 건 아닐까. 숨이 막혀서. 열기에 녹아서. 목 안 깊숙한 곳까지 뜨거운 기운이 뻗치자 한계에 이른 나린이 바르작거렸다. 그 버거움을 느낀 윤완은 조심스레 뒤로 물러났다. 시야가 확보되며 눈동자 안에 고스란히 담기는 광경이란. 어지러이 흐트러진 머리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 숨을 고르느라 높낮이를 바꾸어대는 가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려다보는 얼굴에 애간장이 녹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그림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보고 있어도 이런데, 못 보게 되면 어떡하지. 널 보지 못하는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 내가. 윤완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나린이 황급히 손바닥을 펼쳐 눈을 가렸다. 밝은 조명 탓에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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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입술 새로 비눗방울처럼 톡 미소가 터졌다.

16558041547429.jpg“기다려.”

다정히 속삭인 윤완은 조명 스위치가 있는 쪽을 향해 빠른 걸음을 옮겼다. 아흐레 치 사랑을 다 쏟아 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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