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행복해야 할 의무2022.03.04.
완벽한 데이트를 위해 로맨틱한 밤을 기획했다. 키 작은 촛대가 어른어른 불을 밝히며 전기 조명을 대신하는 공간. 예쁜 공간을 선물하고 싶은 욕심에 뷰가 좋은 장소를 골라 화보 촬영장처럼 꾸몄다. 창가 테이블까지 이어진 길이 향기롭길 바라는 마음에서 꽃장식도 예쁘게 놓았다. 무르익은 봄밤에 꽃보다 더 잘 어울리는 건 없을 테니. 너무 크지 않은 룸으로 정한 건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어디에 있든, 네가 내 눈 안에 폭 담기도록. 오늘은 오래도록 너와 얘길 나누어야지. 은은한 빛, 화사한 꽃향기 속에서. 밤새도록 안아주고, 쉴 새 없이 사랑을 쏟아줘야지. 그랬는데. 그렇게 단단히 마음먹고 왔는데. 완벽했던 기획안은 눈치 없는 전화 한 통에 쓰레기통행 위기에 처해 있었다.
“무슨 소리예요. 후계자 자리를 내려놓다니?”
룸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 무섭게 나린의 추궁이 시작되었다. 윤완은 날숨을 길게 뱉었다. 연세훈, 인생에 도움이라고는 안 되는 녀석.
“일단 좀 앉자.”
윤완의 권유에 테이블로 걸어간 나린이 들고 있던 가방을 탁 소리가 나도록 세게 내려놓았다. 흐드러진 꽃 장식을 보고 자그마한 감탄이라도 해 줄 줄 알았더니.
‘너는 정녕 이 꽃밭이 보이지 않는 거냐, 연나린.’
기획안 대실패를 예감한 윤완은 체념하고 나린을 뒤따랐다. 나린도 이 꽃들이 보이지 않는 게 아니었다. 문을 열고 발을 들여놓은 순간, 모든 걸 잊고 탄성부터 내지를 뻔했다. 그러나 일시적인 감동보다는 오래오래 지속될 그의 인생이 더 중요했다.
“어제 파티에서 하려던 말이 그거였어요?”
“어.”
“이유가 뭔데요?”
“스캔들 기사가 나가면 네가 속상할 거 아냐. 그러니까 더 큰 기사감을 주려고 했지.”
더욱 기가 막힐 따름이다. 고작 그런 이유에서였다니!
“그렇다고 충동적으로 그런 얘길 하면 어떡해요. 잠깐 스캔들 기사 막자고 초가삼간 다 태우려고?”
나린이 은근슬쩍 말꼬리를 잘라먹었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충동적인 거 아니었어. 충분히 고민하고 있던 거고, 부모님께도 누차 말씀드렸고.”
잔뜩 상기된 나린과 달리 윤완은 더없이 차분했다.
“말도 안 돼.”
윤완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며 고개를 삐딱하게 놓았다.
“내가 물러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연하죠!”
“왜?”
“그 자리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해왔는지 아니까요. 얼마나 능력 있는지 아니까!”
연인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다고요. 도일 그룹 직원들이 오빠의 재능에 얼마나 큰 기대를 품고 있는지 모른단 말이에요? 뜻밖의 인정과 칭찬에 윤완이 기분 좋게 웃었다.
“알아주니 고맙네.”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근데, 나린아.”
나린이 재차 설득을 해보려는데 윤완이 말허리를 삭둑 베었다. 나린의 얼굴이 그의 까만 눈동자 한가운데 놓였다. 테이블 중앙을 오도카니 점령한 촛불은 그의 얼굴을 비추는 데에만 정성을 쏟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걸 거야. 평소보다 더 가슴이 떨리는 건…….
“네 말처럼 나는 열심히 살았고, 그건 없어지지 않을 내 자산이야.”
“…….”
“내가 가진 능력은 꼭 도일 그룹이 아니라도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발휘될 수 있어.”
“…….”
하지만 넌 세상에 하나뿐이잖아.
“그러니까 걱정 마.”
그럼에도 이지러진 나린의 얼굴은 좀처럼 펴질 줄 몰랐다.
‘미련해.’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참 미련하다, 윤완 오빠. 스르르 일어선 윤완이 나린의 발밑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는다. 올려다보는 애틋한 시선과 내려다보는 촉촉한 시선이 공중에서 뒤엉켰다. 큼지막한 손바닥이 나린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언제 만져도 아기 볼처럼 보들보들한 감촉에 윤완의 가슴이 온기로 가득 찼다.
“나린아.”
“…….”
“네가 있는 곳이면 그게 어디든, 난 다 괜찮아.”
“…….”
“얼마든지 네 세상에서 살아가도 괜찮단 얘기야.”
오랜 기간 다져온 단단한 다짐을 사랑스러운 연인 앞에 툭 내려놓았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나린의 숨을 멎게 할 것만 같았다. 불현듯, 천천히 겹쳐오는 입술. 입술이 맞닿는 순간 나린의 눈 끝에 매달린 눈물방울이 산란히 부서진다. 나도 오빠가 있어서 오빠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었어요. 낯선 세상으로 들어가는 게 두렵지 않았어. 하지만. 나 때문에 그런 희생을 하진 말아줘요.
‘부탁이야…….’
벌어진 입술 틈새로 열기가 이드거니 퍼부어지는 가운데 나린의 마음이 그에게 애원했다. 코끝에 끼치는 서로의 체취가 방 안을 메운 꽃향기보다 싱그럽게 두 사람을 감싸 안는다.
*** 수정의 방에서 노트북을 들고 나온 나린은 식탁 앞에 반듯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전원 버튼을 누르고, 화면이 밝아지길 기다려 폭풍 검색에 돌입했다. 검색어는 요리 학원. 단, 초일류 셰프가 가르치는 곳으로. TV에서 본 적 있는 유명 셰프의 이름을 앞에 붙여보기도 하고, ‘호텔’, ‘재벌’ 같은 키워드를 조합해보기도 하며 열심히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는데, 안방에서 지숙이 나왔다. 승태와 수정의 출근길을 보살펴준 뒤 깜빡 잠이 들었던 터라 머리가 부스스 헝클어져 있었다.
“웬 요리 학원?”
가까이 온 지숙이 어깨 너머로 모니터를 내려다본다.
“아, 외숙모. 일어나셨어요?”
“나린이 너, 요리 배우게?”
“그냥, 쉬는 동안 다녀볼까 하고요.”
지숙은 의미심장하게 두어 번 고갤 끄덕였다.
“결혼 준비하려고 그러는 거구나.”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일단 부인부터 했는데,
“그럼?”
따지고 보면 결혼 준비가 맞기에 딱히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장 결혼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숙은 쑥스러워하는 나린을 향해 한 번 웃어 보이고는 바로 옆 식탁 의자를 잡아챘다.
“회사 다니느라 바쁘면서 뭘 요리까지 배워. 여느 집도 아니고, 가사일 하는 분들 있을 텐데.”
“그래도요. 다른 사람 도움 없이도 살 수 있어야 하니까요.”
“지금도 웬만큼은 하잖니. 그 정도면 충분해. 수정이에 비하면 넘치지, 뭐.”
“윤완 오빠가 너무 귀하게 자라서 까탈스러운 데가 있거든요……. 특히 입맛이요.”
“왜? 지난번 왔을 때 보니까 소탈하던데.”
그날 윤완이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다는 걸 모르는 지숙이 어리둥절해 했다.
“외숙모 솜씨가 좋아서 그런 거예요. 원래는 얼마나 까다로운데요.”
나린은 지숙의 기분을 배려해 하얀 거짓말을 했다.
“그래? 음식 가리는 사람 데리고 살면 피곤한데.”
말을 마친 지숙은 스스로 기가 차다는 듯 꺄르르 웃어댔다.
“어머,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니. 그런 최고의 사윗감을 두고.”
외숙모의 유쾌한 웃음소리를 듣자 나린도 따라서 웃음이 샜다. 두 여자의 웃음이 잦아들 무렵, 지숙이 별안간 표정을 바꾼다. 예리한 눈초리를 한 지숙은 나린을 슬쩍 흘겨봤다.
“너 솔직히 말해 봐. 요새 무슨 고민 있지?”
예측 못한 습격에 나린이 뜨끔하였다.
“내 눈은 못 속여. 혹시 그 댁에서 반대하는 거 아니야? 이제 테라 호텔 손녀 아니라고.”
지숙은 어렴풋하게나마 나린의 신변에 무슨 변화가 생겼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
“실은…… 맞아요.”
안 그래도 답답한 상황을 나눌 수 있는 어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터라 나린은 순순히 인정했다.
“설마, 그 댁에서 못살게 굴고 그러는 건 아니지?”
지숙의 눈가에 빠르게 근심이 내려앉았다.
“그런 건 아니에요.”
지숙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자 나린이 부연 설명을 덧붙인다.
“큰엄마 덕분인 것 같아요.”
“아.”
지숙은 납득을 했다. 다행히 그 댁에서 아직 챙기나 보구나. 그래야지. 어쩌니저쩌니해도 그 댁 핏줄인데.
“근데, 외숙모.”
“응?”
“저는 괜찮은데.”
“…….”
“그 사람이 많이 힘든 것 같아요.”
지숙의 얼굴이 재차 근심에 휩싸였다.
“도 부사장이 왜?”
“어머니랑 계속 냉전 중인 것 같고…….”
“…….”
“끝까지 반대하시면 회사를 떠날 생각까지 하는 것 같거든요.”
그에겐 꿈이었을 텐데. 줄곧 그 목표를 위해 살아왔을 텐데. 나린의 눈이 내리깔리는 것과 반대로, 지숙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도 부사장이?”
“네.”
말로 뱉고 나니 더더욱 죄인이 된 것 같아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저 때문에 그 사람이 자기 자리를 포기하려는 게 너무 가슴 아파요.”
나린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각막이 촉촉해지며 흰자위가 붉게 물든다. 엄마를 위해 테라 그룹 배경을 집어던졌다던 아빠와 똑 닮은 상황이 운명의 장난과도 같이 느껴졌다.
“내가 다시 테라 호텔로 들어가면…….”
“…….”
“그럼 좀 낫지 않을까 싶은데…….”
“…….”
“그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끝내 몸집을 불린 투명 구슬들이 툭툭 떨어지고 만다. 윤완의 생각을 알게 된 후로 나린도 간절히, 그를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테라 호텔로 들어가는 건 큰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다. 지숙은 울음을 참아내느라 들썩이는 나린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지숙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린이, 너……. 정말로 그렇게 할아버지가 밉고 용서가 안 되니? 평생 안 보고 살 작정인 거야?”
나린이 고개를 흔들자 눈물방울들이 톡톡 비를 뿌린다.
“잘 모르겠어요. 사실은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요. 할아버지께서 그런 일을 하셨다는 게…….”
테라 호텔가에 입성한 이래 줄곧 인자함만 선사해준 할아버지. 작년 12월 31일, 함께 촛불을 불어 끄며 행복해하던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그래서 과거 얘기들은 하나같이 거짓말처럼 들렸다. 증거물이 없었더라면 결코 인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렸을 때 한 번씩 내 부모님들은 어떤 분이실까 궁금하기는 했어요.”
“……”
“하지만 딱히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진 않았어요.”
삼촌과 숙모 덕분에……. 두 분께서 내 아빠와 엄마가 되어주신 덕분에.
“아빠도 새 가정을 꾸리셨고……. 언니도 새엄마를 친엄마로 알 정도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고 들었고요.”
“…….”
“근데, 돌아가신 엄마만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파요…….”
“…….”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서,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지숙은 엄마의 고통을 대신 헤아리려는 나린의 감정에 십분 공감했다.
“……네 말이 맞아. 간단히 용서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그럼에도, 이 아이에게 엄마의 마음을 알려주어야겠다. 엄마의 마음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그런데 나린아.”
“…….”
“돌아가신 엄마는 네가 그 원망과 미움을 대신 짊어지고 살길 바라지 않으실 거야.”
울음 찌꺼기들을 겨우 털어낸 나린이 지숙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지숙은 새삼 훌쩍, 예쁘게 자라난 나린이 대견해 보였다. 더불어 이만큼 키워낸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남편이 바득바득 우기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떠안았던 아이. 너무 버거워서 못 하겠다 나자빠질까 진지하게 고민도 했더랬다. 고심 끝에 보육원으로 돌려보내자고 제안했다가 며칠 부부싸움을 한 기억은 아직까지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 방긋방긋 웃는 아이의 얼굴에 길들여졌다. 몇 달 먼저 태어난 티를 내듯 고사리 손으로 수정이를 잡아끄는 게 언니 같았고, 아프기라도 하면 가장 먼저 달려와 걱정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맏딸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행착오 끝에, 하루하루 가슴으로 받아들였던 귀한 내 딸…….
“당장 용서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너무 미리서부터 마음을 닫을 필요는 없어.”
“…….”
“네가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고 용서한다 한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야.”
“…….”
“우리 나린이는, 하늘에 있는 사람들의 몫까지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린아. 너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뭘 해도 괜찮아. 그래도 돼……. 긴 얘기에 마침표를 찍듯 지숙이 나린을 품에 안았다. 나린도 마음 놓고 지숙의 품에 얼굴을 묻는다. 자그맣던 시절 수도 없이 안겼던 품은 요람처럼 아늑했다. 그럴까요. 정말로 엄마는 그걸 바랄까요. 진정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할 존재는 이 세상에 살아 숨 쉬고 있지 않다. 딱 한 번만 엄마를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따스한 품에 안겨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불가능한 소망이 나린의 가슴 안에 움을 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