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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선택의 여지 (79/101)

#79. 선택의 여지2022.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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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토요일 오전. 막 나린을 바래다주고 펜트하우스로 돌아온 윤완에게 당장 본가로 들어오라는 일현의 엄명이 떨어졌다.

16558041127919.jpg“앉아라.”

본가에 도착해 부부의 침실에 이르자 일현이 근엄한 얼굴을 하고 명령했다. 윤완은 자리에 앉기 전 힐긋, 침대 위의 화연에게 눈길을 주었다.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운 화연은 묵언 시위라도 하듯 아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윤완은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먼저 이 전쟁을 하겠다 나선 건 어머니였다.

16558041127919.jpg“어제 일 다 들었다. 대체 사람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냐?”

일현이 미수로 그쳤던 어제의 상황을 따져 물었다.

16558041127929.jpg“어머니께서 내시려던 기사의 방향을 바꿔보려 했을 뿐입니다.”

16558041127919.jpg“그게 무슨 소리냐.”

윤완은 망설였다. 무턱대고 꺼내놓기엔 두 분이 받으실 충격이 너무도 컸기에. 그래서 말머리에 예고편을 삽입하기로 한다.

16558041127929.jpg“나린이가 파티에 나타난 걸, 그래서 제 입을 막은 걸 감사해하셔야 할 겁니다.”

16558041127919.jpg“뭐?”

뚱딴지같은 대답에 일현의 한쪽 눈썹이 눌리다 못해 찌그러졌다. 윤완은 담담한 어조로 본편을 꺼내놓았다.

16558041127929.jpg“도일 전자와의 임원 계약이 종료되는 즉시 그룹 경영권에서 손을 떼겠다는 얘길 하려고 했습니다.”

그 정도는 돼야 세연과의 스캔들 기사를 찍어 누를 수 있을 테니. 윤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현이 뒷덜미를 턱 붙잡고, 침대에 누워 있던 화연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 흥분을 이기지 못한 일현이 앞에 놓인 탁자를 쿵 내리쳤다.

16558041127919.jpg“너 이 자식! 왜 이렇게 경솔해?! 홧김에라도 할 말이 있고 아닌 말이 있는 거다. 누구보다 냉철한 녀석이 왜 그런 상황 판단을 못 해?!”

16558041127929.jpg“홧김이 아닙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시면 그 애를 선택하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기막히고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일현은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부자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화연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16558041127919.jpg“하아…….”

이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려댄다.

16558041127919.jpg“지금에야 모든 게 네 뜻대로니 무서울 게 없겠지. 그렇지만 막상 여길 떠나 봐라,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지.”

그러나 윤완은 굳건했다.

16558041127929.jpg“……각오하고 있습니다.”

흔들림 없는 어조가 이 결심이 하루 이틀 고민한 결과물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16558041127919.jpg“막연히 생각만 하는 거랑 현실이 같을 것 같으냐?”

본래의 침착한 어조로 되돌아간 일현이 물었다.

16558041127929.jpg“그래도 제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나린이랑 헤어지는 건 생각만으로도 안 괜찮으니까요.”

화연은 졸도할 노릇이었다. 이럴 수가. 냉철한 성격이 자랑스럽다 못해 걱정거리였던 아들이 이 정도로 감정에 휘둘릴 수가.

16558041127929.jpg“그러니까 다시는 이런 식으로 건드리지 마십시오. 한세연은 그만 포기하시고요.”

일방적인 통보를 남긴 윤완은 그대로 침실을 빠져나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부부가 넋이 나간 얼굴로 눈을 맞춘다. 일현은 안타까운 눈길로 화연을 응시했다.

16558041127919.jpg“저렇게까지 나오는데 정말 끝까지 해봐야겠소?”

16558041151914.png“그럼요.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죠.”

일현이 보기엔 승산 없는 싸움인데 화연은 여전히 희망을 잃지 않은 모양이다.

16558041151914.png“걱정 마세요. 제가 어떻게든 윤완이 마음 돌려놓을게요.”

아들의 강경함에 남편이 흔들리고 있다. 화연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일현을 바라봤다. 윤완의 결혼 문제는 아무리 생각하고 또 해봐도 타협이 불가능했다. 내 인생이 완벽했듯, 하나뿐인 내 아들의 인생도 완벽하길 바란다. 끝내는 윤완이도 내 선택이 옳았다고 인정하게 되겠지.

16558041127919.jpg“일단은 알았소.”

화연의 굳은 의지를 헤아린 일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답을 해주었다. *** 영화관으로 향하는 나린의 걸음걸음 상쾌한 리듬이 실렸다. 윤완이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먼 거리도 아니고, 오랜만에 봄볕이 그리웠다. 모처럼의 낮 약속이니 햇살을 쬘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은 쉽게 윤완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들뜬 마음을 안고 영화관에 도착해서 에스컬레이터가 보이는 의자에 앉았다. 언제쯤 그가 나타나 줄까. 설렘이 들어찬 가슴 안엔 삿된 감정 따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이윽고 윤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듯한 이마가 드러나는 시점부터 나린은 딱 그를 알아봤다. 잘생기지 않은 곳이 한구석도 없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남자. 이제 만나면 자연스럽게 손부터 잡는 다정한 남자친구.

16558041127929.jpg“일찍 왔네.”

16558041177635.jpg“일찍 나왔거든요. 날씨가 좋아서.”

봄 햇살을 만끽하게 둔 보람이 느껴지도록 나린이 따사로운 미소를 그려냈다. 그러다가 손바닥 뒤집듯 불시에 근심 어린 표정을 했다.

16558041177635.jpg“집엔 연락드려 봤어요?”

16558041127929.jpg“들렀다 오는 길이야.”

16558041177635.jpg“어머니께서 뭐라세요? 화 많이 나셨죠?”

16558041127929.jpg“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했지?”

어디까지나 저와 부모님 사이의 일이라고, 그는 재차 경계를 명확히 했다.

16558041177635.jpg“그래도…….”

네가 쳐들어온 게 오히려 우리 부모님을 도와드린 거였는데. 나린이 말끝을 흐리자, 진실을 다 말할 수 없는 윤완은 웃음으로 무마했다.

16558041127929.jpg“쓸데없는 걱정 말고 재밌게 놀자.”

나린의 머리로 향하던 윤완의 손이 멈칫한다. 신경 써서 꾸민 스타일을 망치면 안 되니까. 손은 멈추었지만 눈은 거침없이 나린을 내리훑었다. 풋풋한 스타일링이 꼭 대학생처럼 보였다.

16558041127929.jpg“예쁘다.”

뭔들 안 예쁠까, 내 여자친구는. 그의 칭찬에 나린이 기분 좋게 웃었다. 이젠 하루라도 안 들으면 서운할 것 같은데. 예쁘다는 말. 좋아한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영화 상영 시간 10분 전. 입장을 알리는 안내 멘트가 전광판에 흐른다. 나린은 윤완의 손을 잡아끌고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16558041177635.jpg“자는 거 아니죠?”

좌석번호를 확인하고 자리에 앉은 뒤 연신 하품을 해대는 그에게 물었다.

16558041127929.jpg“안 자.”

16558041177635.jpg“잘 거 같은데.”

16558041127929.jpg“안 잔다고.”

그러나 제아무리 윤완이라도 졸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나린이 고민을 거듭하여 영화를 고른 보람도 없이, 광고가 나오는 시점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그는 타이틀이 뜨기 무섭게 잠이 들었다. 스르르 내려앉은 윤완의 상체가 점점 낮아지고, 날렵한 선을 자랑하는 얼굴이 툭, 나린의 어깨로 떨어졌다. 짓눌러오는 무게에 나린이 꿈틀한다. 나린은 곧 허리를 최대치로 세운 뒤 움직임을 최소화했다.

16558041177635.jpg‘피곤할 만도 하지…….’

업무가 그렇게 많은데 데이트한다고 제대로 쉬지도 못했으니. 어깨가 저릿했지만 온 힘을 다해 버티기로 했다. 오토바이가 뒤집히고 건물이 폭발하고 총소리가 난무하는데도, 윤완은 잘만 잤다. 귓가에 와 닿는 쌔근쌔근 숨소리가 사랑스럽게 들려서, 나린의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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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야경이 발아래 펼쳐지는 고층 호텔 프렌치 레스토랑. 나린의 바람대로 영화 관람 후엔 윤완에게 익숙한 장소로 넘어왔다.

16558041177635.jpg“영화 줄거리 얘기해 줘요?”

애피타이저 서빙이 끝나고 직원이 멀어진 뒤 나린이 놀리듯 물었다.

16558041127929.jpg“아니.”

16558041177635.jpg“시끄러운데 잘 자더라고요. 잠자리가 예민한 편은 아닌가 봐요.”

나린의 세계에선 자꾸만 실수를 하게 된다. 불리한 얘기는 답을 할수록 더욱 수렁으로 빠져드는 법이었다.

16558041127929.jpg“근데, 오늘 진짜 안 들어가도 되는 거야?”

윤완은 뻐근한 목을 비트는 동시에 대화 주제도 슬쩍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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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041127929.jpg“삼촌께서 생각보다 관대하시네.”

16558041177635.jpg“수정이가 얻어낸 자유예요. 그러니 수정이한테 감사하세요.”

부녀간의 기 싸움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 없었던 때를 떠올린 나린의 입가에 빙긋 웃음이 어렸다. 애피타이저 접시가 정리되고 다음으로 파스타 접시가 준비되었다. 친절한 서빙에 나린은 꾸벅 고개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윤완이 자그맣게 웃는다.

16558041177635.jpg“출근 안 하고 노니까 생각보다 훨씬 좋은 거 있죠. 날짜 줄어드는 게 막 초조하고 속상해요.”

영화도 보고, 맛있는 저녁도 먹고. 행복으로 꽉 찬 하루의 끝을 실감한 나린이 아쉬움을 뱉었다. 이렇게, 쉼표 같은 하루가 또 하나 삭제되고 있었다.

16558041127929.jpg“회사 그만 다니고 싶어?”

16558041177635.jpg“그런 건 아니고요.”

16558041127929.jpg“결혼하면 그만둬도 돼.”

16558041177635.jpg“아직 결혼하기로 한 거 아니잖아요.”

내가 왜 그랬을까. 왜 일 년 뒤에 대답하라고 했을까. 윤완에겐 일 년 내내 후회로 남을 프러포즈였다. 어김없이 굳어지는 윤완의 표정을 확인한 나린이 싱그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16558041177635.jpg“놀기만 하면서 살 순 없잖아요. 뭐든 열심히 해야죠. 일도 열심히, 노는 것도 열심히.”

모범생 같은 답은 처음 함께 술을 마셨을 때와 변함이 없었다. 도일 전자 대리 직책을 소중한 자산인 양 여겼고, 하루아침에 재벌가 손녀가 된 걸 무겁게 받아들이던 그때와. 그렇게 많은 일을 겪고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너는. 여전히 내 마음을 흔들었던 순수함 그대로.

16558041177635.jpg“민하 과장님은 잘 지내요?”

코스 순서에 따라 바뀌는 접시와 식기들처럼 테이블 위의 대화 주제도 다채롭게 변하고 있다.

16558041127929.jpg“그걸 왜 나한테 물어?”

16558041177635.jpg“매일 얼굴 보는 직원이잖아요. 너무 관심이 없는 거 아니에요?”

16558041127929.jpg“내 관심은 다들 사양일걸.”

16558041177635.jpg“그건 또 그렇겠네요.”

상대가 맞장구를 쳐준 건데도 윤완은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16558041127929.jpg“근데, 유 과장은 왜?”

그럼에도 소심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짐짓 무딘 척을 했다.

16558041177635.jpg“잘 지내는지 궁금해서요.”

16558041127929.jpg“잘 지내겠지. 일 잘하고 똑똑하잖아.”

16558041177635.jpg‘그런데 보고 때마다 그렇게 트집을 잡았어요?’

나린은 잘못 튀어나올 뻔한 말을 황급히 회수하며 입을 닫았다. 하마터면 민하를 절벽 아래로 떠밀 뻔했다. 메인 접시가 서빙 되느라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16558041127929.jpg“아파트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새 포크와 나이프를 집으며 윤완이 또 대화 주제를 변경했다.

16558041177635.jpg“아, 그거……. 일단 내년까지 기다리기로 했어요.”

원래는 즉각 처분해서 대금을 반환할 계획이었는데, 테라 호텔 측 변호사가 세금 문제를 들먹이며 막았다. 절세가 가능한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동안 거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6558041127929.jpg“그냥 살면 안 되는 거야? 그 정도는 삼촌께서도 받으시는 게 맞지 싶은데.”

채 여사의 사주를 받은 윤완이 부드럽게 타일렀다. 며칠 전 채 여사가 전화를 걸어 아파트만큼은 꼭 남겨주고 싶으니 설득해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하늘에 있는 나린의 부모님도 그걸 바랄 거라고……. 나린 역시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고민이 많은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나린도 백번 그렇게 하고 싶지만 외삼촌의 고집을 꺾기가 어려웠다. 식사가 이어지고, 디저트까지 끝낸 두 사람은 룸으로 내려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 도착 타이밍에 맞춰 지이잉, 윤완의 전화가 울린다.

16558041233619.jpg[야! 도윤완!]

맥락도 없이 쩌렁쩌렁 울리는 세훈의 목청에 폰을 귀에 댄 윤완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16558041233619.jpg[너 진짜야? 진짜 도일 그룹 후계자 자리 내려놓을 거야?!]

더욱 쩌렁쩌렁해진 음성은 기밀 정보를 우렁차게도 퍼뜨렸다. 부리나케 통화 음량부터 줄여 보았으나 때는 이미 늦은 것 같다. 단둘뿐인 조용하고 비좁은 공간 안. 나린이 세훈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파도처럼 출렁이는 투명 눈동자가 더더욱 그걸 증명했다. 정말, 준우랑 다르게 눈치도 더럽게 없는 녀석.

16558041127929.jpg“나중에 얘기해.”

윤완은 짜증을 섞어 세훈에게 일렀다.

16558041233619.jpg[뭘 나중에 얘기해?! 너희 어머니께서 전화하셨더라.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아보라고.]

내가 무슨 생각인지는 누누이 말씀드렸건만, 그걸 또 왜 연세훈한테.

16558041127929.jpg“……나 지금 나린이랑 있어.”

이미 엎질러진 물 같으니 아예 떠먹여 주기로 하고 나지막한 경고를 담아 말했다. 그럼에도 세훈은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도윤완이 경영권을 내려놓을 결심을 했다는 건 여간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16558041233619.jpg[네가 지금 나린이랑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16558041127929.jpg“…….”

그러다가 세훈의 목소리가 한풀 꺾인다.

16558041233619.jpg[아? 나린이랑 있어?]

16558041127929.jpg“…….”

16558041233619.jpg[방금, 내 목소리가…… 좀 컸나?]

16558041127929.jpg“…….”

16558041233619.jpg[으아. 미안하다. 끊는다.]

뚝. 사고 현장에서 꽁무니를 빼듯 전화가 끊겼다. 대체 뒷수습을 어떻게 하라고. 띵!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나린은 꼼짝하지 않았다.

16558041177635.jpg“이게 무슨 소리예요?”

바닥에 뿌리를 박고 선 채 나린이 물었다.

16558041127929.jpg“일단 내려. 룸에 가서 얘기해.”

문 열림 버튼을 지그시 누르며, 그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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