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환상과 모험의 세계2022.02.25.
윤완과의 통화 직후, 그가 말한 집안 행사가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는 걸 직감한 나린은 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일엔 왠지 세훈보다 준우가 더 제격처럼 느껴졌다.
[실은 윤완이 어머니께서 일을 벌이셨어.]
나린이 끈덕지게 추궁하자 준우는 화연이 세연을 귀국시킨 일을 알려 주었다. 본격적인 모자 전쟁 발발 소식에 숨이 턱 막혔다. 사태의 발단이 자신이란 사실이 올가미처럼 숨통을 조여 왔다. 그러니까 저 드레스는 원래 파티에 데려갈 생각으로 준 거였나 보다.
‘근데 왜 같이 가자고 말하지 않았을까.’
드레스가 걸려 있는 옷장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한숨을 내쉰다. 왜겠어. 보나 마나 또 혼자 감당하려 그랬겠지. 나를 이 전쟁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서. ……보호해주고 싶어서. 옷장 문을 활짝 열어젖힌 뒤 그가 선물한 드레스를 끄집어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여신 드레스라고 찬탄했었는데 이젠 전투복처럼 보인다. 착장까지 준비된 마당에 이대로 물러나 있을 수는 없었다. 결심을 굳힌 나린은 다시 준우에게 전화를 했다.
“저, 그 파티에 가고 싶은데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안 그래도 윤완이 무슨 사고를 쳐도 세게 칠 것 같아 불안하던 준우로선 듣던 중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나린이가 와준다면……. 그래서 윤완일 이 파티에서 데리고 나가 준다면. 도윤완이 치려는 정체불명의 사고도 막고. 파티에 참석한 이들 앞에 두 사람 사이가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기도 하고. 한세연까지 나가떨어져 주면 더할 나위 없고.
[물론이지.]
준우의 승낙을 받은 나린은 수정의 방을 찾았다. 뷰티 쪽에 비교 우위가 있는 수정은 나린을 도와 메이크업도 해주고 머리도 매만져주었다. 택시를 타고 연회장 건물 앞에 이르자 준우가 마중을 나와 있다.
“시간도 없었을 텐데 너무 완벽하게 꾸미고 온 거 아냐?”
칭찬을 빙자한 실없는 농담에 나린의 긴장이 풀어졌다.
“완벽해야죠. 전쟁을 치르러 가는 건데.”
진짜 전투에 나서는 전사라도 된 듯한 비장함에 준우는 빙그레 웃고 말았다.
“용감하네.”
사랑을 해서 그런가 보다. 사랑을 하면 용감해진다고들 하니까. 준우의 왼손이 척, 허리춤에 얹혔다.
“팔짱.”
뜻 모를 요구에 나린이 주춤거렸다.
“엉뚱한 상상하지 말고. 내 파트너인 척 입장해야 하니까.”
“아아.”
상황을 이해한 나린은 그가 만든 원 안으로 슬며시 팔을 집어넣었다.
“윤완이한테는 평생 비밀이다.”
찡긋 윙크를 해 보인 준우는 나린을 약혼녀인 척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준우의 약혼녀를 잘 알지 못하는 리셉션 직원은 준우를 믿고 그들을 들여보내 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단상 위에 우뚝 올라 서 있는 윤완이 보였다. 준우가 철렁한다. 연회장 안의 표정부터 살피니 다행히 아직 풍랑이 일기 전 바다처럼 잔잔했다.
‘늦지 않았나 보구나.’
준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사이 나린을 발견한 윤완이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그 모습을 본 나린이 그에게로 전진한다. 느리지만 올곧게, 그가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해. 나린을 무사통과시킨 걸로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한 준우는 뒷일을 두 주인공에게 맡기고 물러났다. 좁혀지는 연인 사이의 거리를 뿌듯하게 지켜보는데, 문득 저를 째려보는 세훈이 시야에 걸렸다. 모든 이목이 윤완과 나린에게 쏠린 가운데 홀로 저를 향해 있어 모를 수가 없었다.
‘나린이랑 둘이서만 쿵짝쿵짝한 걸 알고 삐진 게 분명한데.’
한동안 귀찮겠네. 이어질 세훈의 닦달은 영화 관람을 위한 대가인 셈 치기로 하고, 다시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가 요새 푹 빠져 있는 멜로 영화. 여우주연 연나린, 남우주연 도윤완. 윤완에게로 다가선 나린이 주인공답게 손을 내밀었다. 클라이맥스에 이른 미장센은 모든 관객이 숨을 죽일 정도로 긴장감 넘치고 아름다웠다.
“……데리러 왔어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 관객들이 있는 곳에선 여자주인공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강인해 보이는 뒷모습만큼, 앞모습도 환히 빛나리란 걸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넋이 나가다 못해 현실을 잊은 듯한 남자주인공의 표정이 그걸 똑똑히 증명해주었으니까. *** 얼이 빠진 화연을 뒤로한 채, 윤완과 나린은 연회장 밖으로 달음질쳐 나왔다. 지그재그로 엇끼워진 손가락들이 실낱같은 간극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어떻게 된 거야?”
드레스 차림의 나린이 추울까 봐 어깨에 재킷을 덮어주며 윤완이 물었다. 봄인데도.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텐데도.
“드레스가 예뻐서요. 입어보고 싶어서.”
나린은 생글생글 웃으며 장난을 쳤다. 어이가 없다는 듯 윤완이 실소한다. 처음 같이 술을 마셨을 때부터 간이 큰 줄은 알았지만. 보고서 형식을 가지고 트집 잡는다고 대들었던 그때부터. 그게 시작이었을까. 네가 야금야금 내 마음을 장악해 들어온 게. 자유로운 한 손을 마저 움직인 윤완이 나린의 남은 손에도 깍지를 끼웠다.
“고마워, 오늘 와줘서.”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무슨 짓을 했을지 몰라.
“멋지게 일장연설 하려던 거, 방해한 건 아니었고요?”
단상 위에 서 있던 윤완을 떠올린 나린은 자못 심각한 표정을 해 보였다.
“아니.”
구원의 빛처럼 한 발 한 발 다가오던 나린의 모습이 그림처럼 생생히 되살아난다. 너무 눈부셔서, 하려던 말도 뒤엎으려는 계획도 까맣게 잊고 말았다. 딱 한 번 가 봤던 놀이공원보다 더 환상과 모험의 세계 같은 여자. 유혹을 이기지 못한 윤완이 나린의 손을 잡아끌었다. 본능이 인도하는 대로 건물과 건물 사이로 쏙, 몸을 집어넣는다. 어둠의 공간 안에 삼켜지자 기다렸다는 듯 윤완이 나린을 꽉 끌어안았다. 나린의 어깨를 두르고 있던 재킷이 그의 손짓 한방에 바닥 위로 툭, 묵직하게 떨어졌다.
“……잠깐만요. 누가 봐요.”
팔 안에서 나린이 저항하자, 이성의 끈이 다시 윤완의 머릿속에서 매듭을 묶었다.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예쁘래.
“집으로 가자.”
“무슨 집이요?”
“우리 집.”
“네? 어머니 앞에서 그 사고를 쳐놓고 어딜 가자고요?”
윤완은 픽 웃고 말았다. 얘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회사 근처 아파트.”
“아.”
그렇지. 거기도 윤완 오빠네 집이지. 너무 당연한 걸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습관적으로 얼굴을 가리려는데 이번엔 윤완이 제동을 걸었다.
“안 돼. 얼굴 볼 거야.”
내뱉은 말을 성실히 실천하려는 듯, 이른 열대야 같은 시선은 오래도록 나린의 얼굴에 머물렀다. 정지해있던 그의 얼굴이 예고 없이 가까워 온다. 묶인 건 손목뿐인데 온몸이 사슬에 칭칭 감긴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입술이 맞닿기 직전, 그가 방향을 선회했다. 코를 스치고 올라간 입술은 이마에 도착해 무늬 없는 도장을 콕 찍었다.
……이대로 널 안고 순간이동 하고 싶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떼어 한 발짝 물러선다. 바닥에 팽개쳐진 재킷을 집어 든 윤완은 폰을 꺼내 차를 가지고 오라고 전화를 걸었다. *** 하늘하늘한 파자마 차림을 한 나린이 침대 위로 풀썩 몸을 쓰러뜨렸다. 몇 번이고 그의 손길에, 또 입술에 내맡겨졌던 후유증 탓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이 잠옷은 또 언제 준비해놨어요?”
오로지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한정판 세심함에 감탄하며 그녀가 물었다. 베개에 등을 기대고 있던 윤완은 대답 대신 긴 팔을 쭉 뻗어 ‘앞으로 나란히’를 했다. 윤완의 팔과 몸통이 만들어낸 전용 안락의자 안으로 나린이 가붓하게 몸을 던져 넣었다. 단단하고 너른 가슴이 나린의 무게를 고스란히 떠안았다.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준비해놓을게.”
굵은 힘줄이 보기 좋게 뻗친 두 팔이 나린의 가슴 아래서 교차되었다.
“알겠어요.”
뒤로 젖힌 나린의 이마가 그의 턱 바로 아래 놓이고.
“어머니께서는…… 괜찮으실까요? 많이 당황스러워하시는 것 같던데.”
나린은 불쑥 화연을 걱정했다. 아까 윤완과 손을 맞잡을 때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처럼 파들거리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며칠을 고심해 마련한 무대를 이렇게 간단히 빼앗길 줄 몰랐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넌 신경 쓰지 말고 나한테 맡겨.”
“그렇지만…….”
“우리 어머니야. 내가 감당해.”
“그래도요. 오늘은 너무 늦었고, 내일 일어나는 대로 전화 드려 보세요.”
“…….”
“네?”
“알았어.”
윤완의 고분고분함에 나린이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머리를 스치는 또 하나의 얼굴에 입술을 샐그러뜨린다.
“맞다.”
나린이 홱 허리를 트는 바람에 윤완의 팔이 툭 풀리고 말았다.
“왜?”
아늑한 품을 빠져나온 나린은 그의 옆에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털썩 주저앉았다. 화연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 그녀가 아마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심통이 나서 치켜 올려진 눈썹이 은근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머리가 하얘진 윤완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
나린이 찌릿,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다른 여자랑 결혼할 뻔 해놓고 왜 말 안 한 건데요?”
“……그런 적 없는데.”
“그럼 오늘 파티에서 같이 앉은 여자는 누군데요?”
아. 이걸 또 이렇게. 어떻게 알았지. 단상에 올라가 있을 때 도착했으니, 같은 테이블에 있는 건 못 봤어야 맞는데.
“……준우가 세연이 얘기까지 다 했어?”
준우가 도운 걸 전해 들었기에 유력 용의자는 한 명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결혼할 뻔이라니. 완전 악마의 편집이네.
“아아. 그 여자 이름이 세연이구나.”
뿔난 표정을 한 나린은 제 기분을 더욱 도두보이려 팔짱까지 꼈다. 분명 보고 싶어 했던 모습인데. 질투하는 모습, 언젠가 한 번은 꼭 보고 싶었는데. 근데 왜 당황스럽기만 한 걸까.
“연나린…….”
반전을 꾀해 보려 엄한 어조를 꾸며냈으나 나린은 더욱 반발하며 그를 노려봤다.
“왜요? 뭐? 자기는 나한테 질투하네, 어쩌네 하면서 태준 씨랑 같은 테이블에 앉지도 못하게 하더니.”
“……자기?”
“사귀는 사이에 뭐 어때서요.”
“내가 언제 태준이랑 같은 테이블에 못 앉게 했어.”
“준우 오빠 약혼식장에서 그랬잖아요.”
이쯤 되자 진심으로 화났나 싶어 진땀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누구한테 쩔쩔매는 사람이 아닌데. 제가 처한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윤완은 자조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내 질투는 질투도 아니구나. 무섭다, 연나린.
“가까이 와.”
토라진 마음을 어루만져주려 윤완이 손을 내밀었으나, 나린은 대꾸도 없이 침대 아래로 폴짝 뛰어 내려가 버렸다. 윤완의 손이 반사적으로 나린을 붙잡았다. 두텁고 단단한 팔이 나린의 허리에 찰싹 감긴다.
“잘못했어.”
보드라운 등허리에 포옥 묻힌 조각 같은 얼굴. 빙글 몸을 돌린 나린이 그를 내려다봤다.
“언제 말하려고 했는데요?”
“가능하면 말 안 하고 끝내려고 했지. 별것도 아닌데 너 신경 쓸까 봐.”
윤완은 열심히 눈을 맞추며 결백을 주장했다.
“오늘 파티에서 사람들이 다 봤는데도요?”
“그건…….”
하. 명준우, 이걸 그냥.
“봐. 할 말 없죠?”
있는 힘껏 윤완의 팔을 뿌리친 나린은 침대 끝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철가루가 자석에 달라붙듯 윤완의 시선도 나린의 움직임을 좇아간다.
“……어떻게 하면 용서해줄 건데?”
나는 왜 이 애처럼 여우가 아닐까. 이 앤 참 간단히도 내 기분을 풀어 놓던데. 그 순간 나린이 쿡 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
뭔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 윤완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입에 꽉 힘을 주어 웃음을 누르던 나린은 더 참지 못하고 다시 쿡쿡 소리를 내고 말았다. 윤완이 멀건 눈을 하는데 나린이 살포시 그에게로 안겨들었다. 경영 일선에선 이보다 더 활발할 수 없던 그의 뇌세포가 고장 난 것처럼 삐그덕댔다.
“장난이에요. 원해서 간 자리 아닌 거 다 알고 있는데요, 뭐.”
심장께에 놓인 나린의 입술이 속살거리고. 기습 포옹에 얼얼해 하던 윤완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너…….”
“사랑해요.”
반격이 이어지기 전에 나린이 재빨리 그를 올려다보며 혀를 쏙 내민다. 귀여운 애교에 어쩔 수 없이 윤완의 입꼬리가 들어 올려졌다. 회전목마를 타듯 빙글빙글 어지러웠다가, 롤러코스터를 타듯 아찔했다가, 퍼레이드를 보듯 설렜다가. 정말이지, 이런 놀이공원 같은 여자가 따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