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헤어나지 않게 해줘2022.02.22.
금요일 저녁, 윤완은 행사 시작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연회장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매의 눈을 장착하고 사전 조사에 착수한다. 테이블 좌석마다 명패가 놓인 걸 확인한 그는 제 이름이 적힌 자리부터 찾았다. 다른 테이블들은 전부 여섯 명씩 앉도록 배정된 가운데 그의 테이블에 할당된 인원수만 단 세 명. 금화연, 도윤완. 그리고 나머지 명패엔 한세연, 세 글자가 또박또박 새겨져 있었다. 예상했던 바라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었다. 다음 윤완의 시선이 옮겨간 곳은 카메라를 설치 중인 단상 앞이었다. 카메라에 붙은 로고를 보니 도일 그룹 커뮤니케이션팀 장비들이다. 기자를 부르자니 부담스럽고, 기사는 내야겠고. 그래서 내부 자원을 활용해 보도 자료를 제작, 배포하려는 모양이었다. 상황 파악을 마친 윤완은 폰을 꺼내 들며 연회장 바깥으로 나왔다. 0번을 길게 누르자 반가운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네, 윤완 오빠.]
이제는 참 자연스러운 호칭.
“뭐 해?”
[집에 있어요. 저녁에 수정이랑 수제비 해 먹으려고요. 오빤요? 무슨 행사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응. 근데…….”
폰을 들지 않은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그가 비뚜름히 벽에 기대어 선다.
“문제가 좀 생길 것 같네.”
[무슨 문제요?]
“그냥, 기사가 하나 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혹시 보게 되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그 놀라움의 원인은 내가 바꿀 거지만. 원 기획자의 의도와 달라지도록. 물론, 그렇게 되면 기사가 무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긴 했다.
[무슨 기사요?]
“그냥, 나에 대한 기사.”
이래저래 나린을 데려오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 이 아일 언론에 노출시키는 건 올바른 결정이 아니니까.
[……무슨 일 있는 거죠?]
“응.”
하지만 넌 몰랐으면 좋겠는 것. 이대로 모르는 채 해결될 수 있다면.
[뭔지 말해주면 안 되는 거예요?]
“……안 돼.”
[나한텐 뭐든 다 털어놓으라고 했잖아요.]
그래도 다른 여자와의 결혼이 추진되고 있단 얘긴 할 수 없었다. 더더군다나 이렇게 안아줄 수 없는 거리에서는.
“그동안 하나도 안 털어놓은 사람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
폰 너머에서 꽁한 표정이 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잔잔한 미소가 물결이 되어 윤완의 입가를 점령했다.
“이따 행사 끝나고, 다 해결된 다음에.”
……기사 내용 바꾼 다음에.
[나는 가만히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응.”
나린은 채근을 멈추었다. 그간의 경험들로 윤완을 향한 믿음은 무엇보다도 강력했다.
[알았어요. 나중에 꼭 얘기해 주세요.]
“그럴게.”
전화를 마친 윤완은 연회장으로 되돌아왔다. 파티 준비는 순조로워 보였다. 아니, 공연 준비라고 해야 하나. 이 자선 파티의 목적은 기금 마련이 아니다. 도일 그룹 사회 공헌 활동 홍보 기사인 척, 윤완이 세연과 함께 있는 사진을 내보내기 위해 연출된 무대에 불과했다. 윤완과 세연 그리고 금화연 여사가 배석해 있는 사진 한 장이면, 그들 사이를 두고 온갖 추측 기사가 쏟아질 것이었다. 서동요 설화를 만들어낸 선조의 지혜를 빌어, 소문을 먼저 일으키고 현실이 소문대로 되게 만들려는 어머니의 의도가 여실히 읽혔다. 그래도, 기금 마련 순서는 끝낸 다음에 뒤엎는 게 좋겠지. 기왕에 열린 자선 파티니까. 나린이 살아가는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윤완은 조용히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 파티 시간이 가까워지자 화려하게 치장한 참석자들이 속속 입장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인 사람은 세연이었다. 비즈 장식이 빼곡히 수 놓인 파란 드레스 차림의 세연은 구두 굽을 대각거리며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모두 고갤 들어 나를 숭배하라 외치기라도 하듯 도도함이 하늘을 찔렀다.
“참, 어릴 땐 귀엽기라도 했는데.”
정신 연령이 십 년 전에 멈춰 있는 것 같은 사촌 동생을 보며 준우가 끌끌 혀를 찼다.
“누가 아니래. 철없고 순수하던 한세연이 저런 야심가가 돼서 나타날 줄이야.”
가볍게 맞장단을 친 세훈은 주위를 둘레거렸다.
“근데, 은영 씬? 초대 안 받았어?”
“아. 다른 일 있대서 일부러 올 필요 없다고 했어. 현주 씨는?”
준우도 똑같이 세훈의 파트너 행방을 물었다.
“우린 뭐, 아직 약혼한 것도 아닌데. 따로 초대 안 받았길래 그냥 뒀어.”
세훈이 답하기 무섭게 지이잉, 진동음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각자의 폰을 내려다봤다.
“어, 나린아.”
준우가 폰을 귀에 붙이며 의자에서 일어난다.
‘나린이가 윤완이도 아니고 준우한테 전화를?’
이유가 궁금해진 세훈이 엉겨 붙으려 하자 준우는 날쌔게 연회장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저만 빼고 작당 모의를 하는 정황에 안 그래도 날카로운 세훈의 눈매가 더욱 삐죽해졌다.
‘자기 사촌 동생이나 잘 단속할 것이지. 나린인 내 사촌 동생이라고.’
한참이 지나서야 연회장으로 되돌아온 준우가 싱글벙글하자, 세훈이 눈을 흘긴다.
“나린이랑 무슨 얘기 했어?”
“아무 얘기도 안 했어.”
“나한테까지 숨기냐?”
“내가 뭘.”
찰거머리 같은 세훈의 호기심을 떼어 놓기 위해, 준우가 턱짓으로 윤완을 가리켰다.
“근데 도윤완, 저대로 얌전히 있을 것 같냐?”
단순한 세훈은 금세 관심을 빼앗겼다.
“아니. 시한폭탄 초 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뒤집어엎겠지?”
“응. 카메라도 많겠다, 백 프로. 세연이 어떡하냐? 네 사촌 동생인데 걱정 안 돼?”
“난 분명 포기하고 미국 돌아가라고 충고했어. 다 자기가 자초한 거야.”
준우는 저와 상관없다는 듯 팔짱 낀 어깨를 달싹여 보였다. ***
“그 어렵다는 미국 로스쿨 졸업해서 변호사 시험도 척 붙고. 우리 세연이가 그렇게 똑똑한 줄은 몰랐네.”
우리 세연이……? 지루하게 오가는 두 여자의 대화를 들으며 윤완이 비소를 띠었다.
“아니에요, 어머님. 그냥, 운이 좋았어요.”
“너무 겸손해하지 않아도 돼. 부모님들께서 아주 뿌듯하시겠어. 이렇게 똑똑하고 예쁜 딸이 있으니. 나는 아들밖에 없어서 얼마나 재미없는데.”
들을수록 점입가경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귀를 눈처럼 감을 수 없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렇게 부러우시면 수양딸을 삼으시지 왜 며느리를 삼으시려는 건지.’
딸이랑 며느리는 엄연히 별개인데. 이 와중에도 연회장 내부를 촬영하는 척, 윤완이 앉은 테이블을 향한 셔터 소리가 찰칵찰칵 어지럽게 이어졌다. 지루해서 나린이 보고 싶었다. 그 애만큼 단박에 웃게 해주는 존재도 없는데. 얼른 식사가 마무리되고 기금 마련 활동도 종료됐으면 좋겠다. 얼토당토않은 이 공연을 망쳐 놓으면 좀 재밌어질 것도 같으니까.
“잠시만.”
화연이 자리를 뜨고, 막 메인 접시를 비운 세연이 윤완을 돌아본다. 안 그래도 윤완과 얘길 나누고 싶었는데 화연이 쉼 없이 말을 거는 바람에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저기, 오빠. 지난번에 마주쳤을 땐 내가 왜 왔는지 몰라서 인사 안 한 거지?”
눈치가 없다고 해야 할지, 낙천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
“그럼 왜 인사 안 했어?”
“할 필요 없으니까.”
그러다가 윤완은 세연의 의중을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모든 걸 알고도 어머니와 한패가 되길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도 그저 가련한 희생양에 불과한 것인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 만나는 사람 있어.”
말을 뱉은 윤완은 세연의 반응을 살폈다. 자존심에 상처받고 울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세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들었어. 그날 마주쳤을 땐 몰랐는데, 어제 어머님께서 얘기해주시더라.”
세연의 눈이 윤완의 얼굴을 떠나 와인잔으로 향했다. 반 박자 늦게 따라간 손이 와인잔을 집어 든다.
“결혼할 거라고 했다며.”
“…….”
포도향 알코올을 꿀꺽 삼킨 세연의 목소리는 더욱 되바라져서 윤완의 귓전을 때렸다.
“근데 오빠, 보기보다 순진하다. 우리가 어디 좋아하는 마음만 가지고 결혼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
“…….”
“난 괜찮으니까 얼마든지 연애해. 다만, 결혼 전에만 정리해줬으면 좋겠어.”
“…….”
“뭐, 안 돼도 할 수 없고.”
이 애는 목표가 확실하구나. 도일 그룹에 입성해 세상에 군림하는 게 목적.
‘그것도, 날 이용해서?’
세연의 복심을 확인한 윤완은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잠갔다. 뒤엎기로 한 계획을 변경하지 않아도 되겠다. 저 애는 능동적인 가담자 같으니. 오히려 일을 크게 키워서 하루빨리 단념하게 만드는 편이 좋을 것도 같았다. 때마침 자리로 돌아온 화연 덕에 대화는 그대로 종료됐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본격적인 기금 모금 행사가 이어진다. 주요 인사들이 속속 호명되어 후원 증서를 전달하고, 사이사이 초청 가수들의 축하 무대도 있었다. 하나같이 쉽게 만나볼 수 없는 인기가수들이었지만 관객 성향 탓에 분위기는 내내 차분하기만 했다. 중간중간 파티 참석자들이 후원 기금을 내도록 유도하는 이벤트도 열렸다. 파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금세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다. 최후 순서로는 주최자인 화연이 감사 인사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식순을 꿰고 있는 화연은 차례가 왔음을 인지하고 단상으로 올라갈 채비를 했다. 그런데 사회자의 입에서 사전에 보고받은 바 없는 엉뚱한 멘트가 흘러나왔다.
“다음은 도일 그룹 도윤완 부사장님께서 참석해주신 귀빈 여러분들께 한 말씀 하시겠습니다.”
태풍이 불어 닥치기 직전의 고요. 화연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윤완에게로 향했다. 윤완은 동작도 날렵하게 벌써 단상 위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윤완이 마이크 앞에 서자, 여기저기 산개해 있던 연회장 안의 시선이 하나로 모아졌다.
“안녕하십니까. 도일 그룹, 도윤완입니다.”
짧은 자기소개 후 쉼표를 찍은 그가 단상 아래를 내려다본다. 명랑한 얼굴로 저를 주목하는 세연과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고 있는 화연이 한눈에 담겼다. 어머니의 애처로운 표정에 죄송한 마음은 들었지만, 죄송하지 않자고 제 인생을 불행의 나락으로 던져 넣을 순 없었다. 윤완은 차분히 입술을 들썩였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나온 건, 중대한 발표 사항이 있어서입니다.”
‘안 돼. 당장 저 녀석을 막아야 해.’
그러나 화연에겐 이런 돌발 상황에 걸맞는 순발력이 없었다. 몸이 머리의 속도를 따라주질 못해 우왕좌왕하는 사이. 찬찬히 연회장 내부를 훑던 윤완의 눈이 어느 지점에 이르러 탁 멈추었다. 꼭 덫에 걸린 것처럼. 시야에 잡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반응하여 아우성을 쳐대는 존재. 눈부신 자태에 꼭…… 한눈에 반할 것만 같다. 이미 여러 번 반한 여자인데도. 반하다 못해 심장을 통째로 갖다 바친 사람인데도……. 군중 속에서도 참 간단히 그의 시선을 끌어가는 여자. 그가 선물한 드레스에 감싸여 다이아몬드보다도 눈부시게. 기성복은 핏이 안 살 거라고 하더니 세리도 틀릴 때가 있네. 대체 얼마나 더 아름다우려고 하는지. 연나린, 너는.
“실례하겠습니다.”
마이크에 대고 짤막하게 양해를 구한 윤완은 홀린 듯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파티 참석자들이 윤완의 눈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비추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윤완이 내려오는 걸 본 나린도 한 발 한 발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단상 아래에 선 윤완은 차분히 나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시야를 독점한 그녀가 마침내 그의 앞에 이르러 생긋, 말간 웃음을 내비쳤다.
“……데리러 왔어요.”
나린이 찬찬히 손을 뻗었다. 내밀어진 손을 맞잡을 때, 윤완이 답지 않게 서두르는 바람에 손뼉을 친 것처럼 짝 소리가 났다. 작은 실수가 빚어낸 경쾌한 소리에 나린이 눈을 동그랗게 키우며 쿡쿡 웃었다. 웃어? 이 상황에서도? 윤완도 따라 웃고 만다. 언제나 그렇듯이. 너밖에 없다, 연나린. 날 이만큼 긴장시켰다가, 또 바로 웃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너 하나뿐일 거다. 이러니 헤어날 수가 없지. 그의 손가락이 쫙 펴지더니 나린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행여 보물을 놓칠세라 두 손이 꽉 맞물렸다. 제발 부탁이야. 이대로 영원히 헤어나지 않게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