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연습만이 살 길2022.02.18.
태준이 미국으로 떠나는 날. 준우가 기어이 공항까지 배웅을 나왔다.
“윤완이랑 세훈이 안 왔다고 너무 서운해 말고.”
출국장이 가까워오자 준우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런 생각 따위 조금도 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태준이 덥석 손을 맞잡는다.
“우리가 그런 걸로 서운해 할 사이냐.”
준우는 고개를 까딱하는 걸로 가벼운 동의를 표했다.
“윤완이랑은 따로 인사했어?”
지난번 위스키 모임 때 윤완만 빠졌던 걸 상기한 준우가 물었다. 세연 때문에 잠깐 2501호에 모였을 땐 작별인사를 나눌 경황이 없었다.
“응. 어제 윤완이가 잠깐 들렀더라고.”
철저히 이성적인 그라면 이 도피성 미국행을 이해해주지 못할 것 같아 주저하는 사이, 윤완이 먼저 태준에게 연락을 해왔다.
[집이면 잠깐 갈게.]
태준을 찾아온 윤완은 긴 말 대신 잘 다녀오라는 담백한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 다신 없을 미국에서의 시간을 후회 없이 보내길 바란다고 응원과 지지의 말을 해주었다. 돌이켜 보면 윤완은 한결같이 그의 선택을 믿어 주고 존중해주었던 친구였다. 이유를 꼬치꼬치 따져 묻거나 옳으니 그르니 평가하는 법이 없었다. 새삼 든든한 제 편을 마주하고 나자 태준은 더더욱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어졌다. 사이가 틀어지기 전에 나린을 포기한 건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다음 주에 미국 출장 갈 거야. 일정 한번 맞춰보자.”
“그래. 그럼 잘 있어라.”
악수를 청하며 태준이 말하고,
“잘 다녀와.”
윤완이 응한 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무수한 언어가 찰나의 눈빛에 실려 빠르게 오갔다. 어떤 순간에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진심이 통하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도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태준과 준우는 짧은 눈인사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했다. 먼저 돌아선 사람은 떠날 시각이 정해져 있는 태준이었다. 남겨져야 하는 준우는 당산 나무처럼 자리를 지키고 섰다. 떠나는 친구의 여정을 축복하며, 출국장으로 향하는 태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는다.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간 태준은 금세 인파에 묻혀 시야에서 사라졌다. *** 세연의 등장 이후, 금 여사의 계획은 더욱 노골적이 되어 윤완의 목덜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이게 뭐죠?”
업무 캘린더에서 저도 모르는 공식 일정을 발견한 윤완은 비서 정 대리를 불러 추궁했다.
“그룹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내일 사모님께서 주최하는 자선 파티가 있으니 반영해달라고요.”
“사전에 보고도 없이요?”
“죄송합니다. 저도 보고 드려야 한다고 했는데…….”
중간에 낀 비서가 무슨 죄냐 싶은 윤완은 날 선 질문을 멈추었다.
“알았으니까 나가 보세요.”
정 대리가 나간 뒤 윤완은 이마를 짚었다. 어머니의 속셈이 깊은 산속 옹달샘처럼 투명하게 들여다보였다. 이 파티는 그와 세연을 만나게 하기 위한 무대. 굳이 파티까지 여는 건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일 테고.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폰을 집어 세리의 부티크로 전화를 건다.
[도 부사장, 웬일이야? 직접 전화를 다 주고.]
“급한 부탁이 있어서.”
[뭔데?]
“혹시 나린이가 입을 만한 드레스 있어? 당장 내일 필요한데.”
[있기야 한데……. 기성복은 어쩔 수 없이 핏이 덜 살지.]
“괜찮아. 바로 준비해줘. 비서 보내서 픽업할게.”
[알겠어.]
얄팍한 수를 알아챈 이상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세리와 통화를 마친 윤완은 나린에게 퇴근하고 만나러 가겠다는 연락을 했다. *** 그러나 막상 나린을 보고 나니 마음이 달라졌다. 파티에 나린을 데리고 가는 건 양날의 검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의 계획을 망칠 적절한 수단에 해당하지만, 자칫 나린을 위험하고 불편한 상황에 밀어 넣을 수도 있었다. 어떤 함정이 준비돼 있을지 모르는 곳에 이 앨 데려가는 게 옳은 결정일까. 위험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할 아이를.
“웬 드레스예요?”
그 사이 옷상자를 열어본 나린이 의아해한다.
“아, 그냥 선물.”
윤완은 즉석에서 답변을 수정했다. 나린이 싱겁다는 듯 웃었다.
“이제 이런 거 입을 일이 뭐가 있다고요.”
“그래도 갖고 있어. 혹시 생길 수도 있잖아.”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알겠어요. 고마워요.”
보관만 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나린은 흔쾌히 선물을 받았다. 옷상자를 쇼핑백 안에 되돌려놓은 뒤 통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구석에 잘 갈무리해 둔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있는 장소와 참 안 어울리는 선물이었다. 빨갛고 쫄깃한 떡들이 소담한 접시를 보자 웃음이 절로 났다. 이런 화려한 드레스를 선물하는 남자도 떡볶이가 주는 소박한 행복을 알까.
“떡볶이 먹어 봤어요?”
“응.”
“언제요?”
윤완은 이따금 나린에게 외계인 취급을 받는단 생각을 했다.
“어릴 때도 먹어 봤고, 회사에서 직원들이랑도.”
발끈하여 구구절절 대답한 건 그 때문이었다.
“어땠어요? 입맛에 맞았어요?”
“아니. 너무 자극적이야.”
포크로 떡을 콕 찍던 나린은 황당한 얼굴이 됐다.
“그런데 여길 오면 어떡해요. 싫다고 했어야죠.”
“연습할 거야.”
포크를 집은 윤완도 나린을 따라 떡을 하나 콕 찍는다.
“이런 걸 대체 왜요?”
네가 좋아하는 거니까. ……네가 사는 세상에 적응해야 하니까. 그의 답을 기다리던 나린이 침묵 속에서 떡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윤완의 입엔 맞지 않는다던 자극적인 맛이 기대했던 행복을 몰고 왔다.
“귀하게 자란 것도 좋은 것만은 아니네요. 이런 행복도 모르고.”
나린이 단정 짓자 윤완은 억울해졌다. 귀하게 자라다니, 누가.
“……아닌데.”
어린 시절 겪어낸 혹독한 훈련 과정들이 떠올라 억울함은 배가 됐다. 거대 기업 집단을 경영할 능력을 갖추기 위해 했던, 뼈를 깎는 노력들을 하나하나 열거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속도 모르고 나린은 장난스레 푸념을 했다.
“걱정된다…….”
“…….”
“결혼한 뒤에 말이에요.”
“뭐가?”
윤완의 눈썹과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내가 누구한테 걱정 끼치고 그런 사람이 아닌데.’
나린은 짐짓 암울하다는 표정을 자아냈다.
“집안일도 할 줄 모를 거고, 음식도 웬만한 건 입에도 안 댈 거고…….”
전문가들이 다 알아서 해줄 텐데, 쓸데없는 걱정을. 그렇게 반박하려다가,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데.
“배우면 다 할 수 있어. 걱정 마.”
윤완은 포크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떡을 입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
‘연습하면 될 거야. 연습만이 살 길.’
미각 세포들이 극렬히 거부하는 빨간 떡을 꾸역꾸역 씹어 본다. 그 표정이 반찬 투정하는 아이처럼 보여서 나린은 배시시 웃고 말았다.
“됐어요. 장난이에요. 조금이라도 더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면 되죠.”
“…….”
“먹는 게 문제긴 한데……. 쉬는 동안 셰프 자격증이라도 따야 하나.”
나린이 진지하게 고민하자, 윤완이 팔을 뻗어 나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적어도 짐이 되진 않을 거니까.”
“하긴. 일 년 뒤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베어 물고 남은 떡 반쪽에 소스를 묻히며 나린이 또 한 번 장난을 쳤다. 윤완의 미간이 우글쭈글해진다. 괜한 배려를 했다. 확답부터 듣고, 결혼식만 천천히 진행하자고 했어야 하는 건데.
“내일 저녁엔 뭐 해요? 기왕 연습하는 거, 색다른 거 안 해볼래요?”
“아. 선약이 있어…….”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말 없었잖아요. 무슨 약속인데요?”
파티엘 가야 해. 솔직히 답하려다 멈칫한 건 방금 전 건넨 드레스 때문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선물의 본래 목적을 알아챈 나린이 함께 가겠다고 우길 게 뻔했다. 내키지 않으면서, 그를 위해서.
“집안 행사.”
윤완은 포괄적인 표현을 선택하여 거짓말이 되는 것만은 피했다.
“알겠어요.”
“색다른 거, 뭐 하려고 한 건데?”
궁금증이 인 윤완이 화제를 되돌렸다.
“그냥, 별 건 아니고, 같이 영화 보고 싶어서요. 왠지 영화관 같은 덴 안 가봤을 것 같기도 하고…….”
또, 또 외계인 취급. 나도 가봤거든. 스페셜관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긴 했지만…….
“토요일에 가자.”
“좋아요. 어떤 영화 좋아해요?”
“아무거나. 네가 보고 싶은 거.”
“그럼, 뭐 있는지 보고 알아서 예매할게요.”
“그래.”
함께 떡볶이를 먹으며 영화 보러 갈 계획을 세우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일 그룹 왕자님, 도윤완 부사장님과. 그와 만나면서 소박하고 평범한 데이트는 포기했었기에 기분이 오묘했다.
“영화 본 다음엔 맛있는 거 사 주세요.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데서, 엄청 비싸고 한 입 먹으면 감탄이 막 절로 나오는 그런 거.”
그를 위하는 마음에서 과장된 표현을 보탰다. 그가 노력하는 만큼 그의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함께해주고 싶었다. 나린의 진심을 헤아린 윤완의 눈빛 가득 애틋함이 퐁퐁 샘솟았다.
“그날은 집에 못 들어간다고 미리 말씀드리고 나와.”
명령처럼 덧붙여진 말에 나린의 양 볼이 붉게 달아오른다. 고개를 사선으로 틀며 눈을 흘겼지만, 그럼에도 끝끝내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 피팅룸 커튼이 걷히자 드레스 차림의 세연이 화사한 자태를 드러낸다. 화연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짝, 박수를 쳤다.
“바탕이 예쁘니까 뭘 입어도 예쁘네.”
“아니에요, 어머님. 어머님께서 안목 있게 잘 골라주신 덕분이에요.”
자선 파티를 앞두고 화연이 세연에게 드레스를 선물하기로 했다. 세연은 들리는 평판과 달리 자상하고 친절한 화연이 마음에 들었다. 도일 그룹 며느리 자리만으로도 엄청난 횡재인데, 예비 시어머니마저 이렇게 예뻐해 주시다니. 인생이 이토록 꽃길이어도 되나 싶다. 드레스 선정을 마친 화연과 세연은 가까운 호텔 스카이라운지를 찾았다.
“우리 비서한테 호텔 룸 번호 알려줘. 내일 파티 시간 맞춰서 스타일리스트 보내줘야 하니까.”
“네, 어머님.”
“윤완이랑은 오랜만에 보는 거지? 뭐든 첫인상이 중요해. 그 애가 깜짝 놀랄 만큼 예쁘게 하고 등장했으면 좋겠어. 물론 지금도 예쁘지만.”
세연의 미모가 부디 윤완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길. 기도하는 심정으로 화연이 부드럽게 조언했다.
“저……. 실은 엊그제 이미 만났어요.”
쭈뼛거리던 세연은 사실을 실토했다.
“벌써?”
“네. 세훈 오빠네 호텔에서 우연히요. 제가 마침 거기 묵거든요.”
보기 좋게 무시당했다는 말은 할 수 없어서 슬쩍 빼고 보고했다. 이미 첫 만남을 망쳤다는 실망스러운 소식을 전할 수는 없었다. 화연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테라 호텔이라니. 묵어도 하필.
“호텔부터 옮겨야겠네.”
“왜요?”
한숨이 화연의 입술 틈새를 뚫고 나왔다. 이제 더는 숨길 수 없었다. 윤완에게 듣고 실망하기 전에 선수를 쳐서 먼저 세연의 협조를 구해야만 한다.
“사실은, 세연이한테 말 안 한 게 있어.”
“…….”
세연이 고개를 갸웃하자, 화연의 얼굴에 캄캄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지금 우리 윤완이가 반대하는 결혼을 하겠다고 우기는 중이거든.”
“어머.”
기계에 견주어도 지지 않을 무감정의 대명사, 윤완 오빠가? 세연은 그제야 자신에게 찾아온 이 행운을 납득하게 되었다. 준우가 극구 만류하던 것도 이것 때문인 모양이다.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심 기분은 상했지만 그래도 침착하게 웃어 보였다.
“속상하시겠어요, 어머님.”
어차피 사랑에 기댄 결혼을 할 마음은 없었으니까. 철저히 조건과 이득을 따져서 신분 상승을 이룰 심산이었으니. 그래, 무슨 상관이야. 도일 그룹 안주인 자리. 그것만 생각하자. 세연이 생각보다 개의치 않아 하자 화연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누가 아니래. 철석같이 믿다가 제대로 뒤통수 맞았어.”
“근데, 호텔은 왜요?”
“그 상대가 테라 호텔 혼외자거든.”
“어머나……. 그, 다현이 배다른 자매요?”
화연은 이쯤 해서 말을 아꼈다. 아들의 미래가 위기에 처해 있는데 남의 과거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세한 얘긴 차차 하는 걸로 하고.”
주스 잔에 감겨 있는 세연의 손을, 화연이 꼭 감싸 쥔다. 간절한 바람이 화연의 눈빛에 짙게 실렸다.
“나는 우리 세연이만 믿을게. 부탁이야. 꼭 우리 윤완이 마음 돌려서 내 며느리가 되어줘.”
“걱정 말고 저만 믿으세요, 어머님.”
미모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세연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