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전부가 여기 있는데2022.02.15.
태준이 미국행을 선언하고, 눈 깜짝할 사이 사흘이 지났다. 내일이면 그가 라스베이거스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회사에서 돌아온 준우는 허전한 기분에 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항엔 안 나와도 돼. 토요일에 술 마신 게 배웅이지, 뭐.]
폰을 타고 넘어오는 태준의 목소리엔 뜻밖의 활력이 넘쳤다. 시한부 도피성 외유에 불과할지라도, 쳇바퀴 같은 생활을 벗어나는 게 무척이나 신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쓸쓸하지 않겠어?”
마지막 계단을 지난 준우가 물었다.
[아니. 괜찮아.]
태준의 답을 들으며 문손잡이를 비틀자, 암흑일 거라 확신했던 그의 방이 예기치 못한 빛으로 꽉 들어차 있다. 방 한가운데에 당당히 선 침입자를 발견한 준우는 섬뜩함을 느끼며 정지했다.
“오빠!”
그의 영역에 무단 침입한 그녀가 맹랑한 걸음을 떼어 달려오고,
“내가 다시 전화할게.”
당황한 준우는 서둘러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한세연?”
선명히 겹쳐 보이는 어릴 적 얼굴과 변함없이 생기발랄한 목소리에 곧장 침입자의 신분을 알아차렸다. 미국 국적의 한국계 사업가와 결혼해서 한국을 떠난 둘째 고모의 막내딸, 한세연. 방학 때마다 그의 집에 머물다 갔기에 어렸을 땐 제법 가까운 축에 속하던 고종사촌이었다. 그러나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로는 좀처럼 얼굴을 볼 수 없었고, 친척 모임에서 나오는 얘기들로 간간이 근황을 전해 듣는 게 고작이었다. 가장 최근에 소식을 들은 건 약혼 파티에서. 어렵사리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도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며 친척 어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던 게 기억이 났다.
“오. 이렇게 예뻐졌는데도 바로 알아본단 말이야?”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세연은 결코 농담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장난을 쳤다.
“한국엔 언제 왔어?”
“어제. 외삼촌, 숙모께 인사드리고 오빠 올 때까지 기다렸어. 늦었지만 얼굴 보고 가려고.”
“그래도 그렇지,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면 어떡해.”
준우는 예의 없는 그녀의 행동을 짚어 주었다.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그랬지. 어릴 땐 오빠 방에서 잘만 놀았다, 뭐.”
“그건 어릴 때 얘기고, 지금은 나이가 몇인데.”
“알았어.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지르퉁해진 세연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준우가 창가 빈백 소파로 가 앉자 세연도 쪼르르 그가 있는 곳까지 따라온다.
“숙소는 어딘데?”
“강남 테라 호텔.”
“왜 여기 안 있고.”
“숙모께서 번거로우실 테니까.”
세연도 내심 이 집에서 지내고 싶었지만, 무뚝뚝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숙모의 눈치가 보여 포기했다. 떠들썩한 걸 싫어하는 준우로서는 어머니의 성격에 절을 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근데 프로젝트를 하나 할 예정이라서 꽤 오래 머물 것 같아.”
세연은 준우에겐 하등 쓸모없는 신변 정보를 술술 읊어댔다.
“무슨 프로젝트? 어디 로펌에 취직이라도 했어?”
드디어 힘들게 딴 변호사 자격증을 활용하려나 보다, 넘겨짚으며 준우가 대꾸했다.
“아니.”
“……그럼?”
“결혼을 해 보려고.”
역시 사람은 간단히 변하지 않는다. 어렵고 힘든 걸 싫어하는 저 애가 진짜 프로젝트 같은 걸 할 리가 없지.
“결혼하는데, 프로젝트씩이나?”
준우는 슬슬 세연을 상대하는 게 피곤해졌다.
“엄청난 자리를 제안받았거든.”
어디 재벌가에서 선이라도 들어 왔나.
‘뭐, 태준이는 맞선 중단하고 미국으로 가니까 아닐 테고…….’
“잘됐네.”
갈수록 의미심장해지는 세연의 어조와 달리 준우의 반응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뭐야, 그 미적지근한 반응은? 못 믿는 거야?”
“아니. 재벌이 다 거기서 거기지.”
“그냥 그런 재벌이 아냐. 오빠도 들으면 깜짝 놀랄 거야.”
“어떤 상댄데?”
준우의 답이 점점 기계적이 되어간다.
“도일 그룹.”
쾌활하게 터져 나온 음성에 준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
내려앉는 심장을 따라 손도 턱, 아래로 떨어지며 소파에 부닥쳤다.
“역시. 이 정돈 돼야 놀라는구나? 도일 그룹이 대단하긴 하네.”
“도일 그룹 누구?”
부디 윤완이는 아니어라. 아니어라. 그렇게 되뇌면서도 불길한 예감은 점점 짙어져만 갔다. 아닐 리가 없다는 걸 은연중에 직감한 준우였다. 미국에 있던 세연이 한방에 귀국할 정도의 자리라면.
“도일 그룹 금화연 여사님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더라고.”
역시, 불길한 예감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안 돼.”
준우는 단호히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 그 댁에서 원한다는데 왜 오빠가 안 된대?”
“안 된다면 안 돼.”
섣부르게 나린의 존재를 알릴 수 없는 준우는 무작정 안 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왜? 윤완 오빠, 뭐 문제 있어?”
“어. 문제 있어. 그러니까 안 돼.”
“혹시 신혜원이랑 혼담 오갔던 거 말하는 거야?”
저 소문이 미국까지 퍼졌다니. 미국까지 날아간 소문이 대단한 건지, 미국에서 소문을 주워들은 저 애가 대단한 건지.
“……그런 것도 있고.”
알맹이 빠진 준우의 얼버무림에 세연은 싱겁다는 표정을 했다.
“약혼했다가 파혼한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흠이라고.”
“아무튼 안 된다면 안 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당장 미국으로 돌아가.”
“싫어.”
세연은 준우의 매서운 눈초리를 피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문젠데 그래?”
그녀가 거듭 준우를 닦달한다. 준우는 숨을 고르는 동시에 표현도 골라냈다.
“……도윤완, 절대 너한테 마음 주지 않을 거야.”
줄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것뿐.
“그 오빠 성격이야 나도 잘 알지.”
세연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애시당초 그녀가 바라는 결혼에 감정은 필수 요건이 아니었다. 사랑에 목매는 결혼은 세상 물정 모르는 이상주의자들이나 하는 거니까.
“근데, 오빠. 난 그런 거 상관없어.”
세연의 표정이 변했다. 별생각 없이 가볍게만 들리던 말투도 궤를 맞추어 변하였다.
“오빠도 알잖아. 우리 아빠, 그저 그런 평범한 사업가신 거.”
세연의 아버지도 제법 경제적 성공을 이룬 기업가였지만 외가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다. 세연은 외할머니댁에 올 때마다 엄마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이런 선천적인 배경을 제 손으로 다운그레이드시키다니.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우리 엄마처럼 안 살 거야. 사랑 같은 거 관심도 없어.”
“…….”
“도일 그룹이라는데, 도전해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해.”
세연이 당돌하게 웃는다.
“오늘 반가웠어. 이만 가 볼게.”
멍하니 선 준우를 뒤로 한 세연은 발랄한 걸음을 밖으로 옮겼다. 어릴 적 철없던 모습만 기억하고 세연을 만만히 봤던 준우는 크게 일격을 당한 기분이었다. *** 한밤중에 준우로부터 긴급 소집이 있었다. 마침 근처에 있던 태준이 제일 먼저 달려오고, 세훈과 준우도 차례로 2501호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윤완이 숨도 돌리기 전에, 준우가 세연의 귀국 사실을 터뜨렸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거론되자 어느 누구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러니까, 윤완이 어머니께서 세연이를 끌어들이셨다는 거네?”
이마를 잔뜩 찌푸린 세훈은 한마디로 상황을 요약했다.
“응. 근데 문제는 세연이가 꽤나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 같다는 거지. 당장 미국에서 날아온 것만 봐도…….”
준우의 탄식에 태준은 윤완의 안색부터 살폈다. 조용히 있는 게 오히려 더 불안하다.
“나린이 얘기는 했어?”
마침내 반응을 보인 윤완의 입에서 나린에 대한 걱정이 튀어나왔다. 누가 연나린밖에 모르는 바보 아니랄까 봐.
“안 했어. 알았다간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잘했어.”
“술 한잔할래?”
태준이 즉석에서 제의했지만 윤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모임은 그걸로 끝이었다. 네 사람은 침묵 속에 로비로 내려왔다. 막 프런트 앞을 지나는데, 기막힌 우연이 네 남자의 발길을 멈춰 세운다.
“어? 오빠들!”
쨍한 음성이 밤의 고요를 일순간에 박살 냈다.
“양반은 못 되네.”
떫은 표정이 된 세훈의 입에서 곱지 않은 어투가 삐져나왔다.
“와. 진짜 백만 년 만이다.”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세연의 눈동자가 윤완에게 고정되자, 준우는 실수를 깨달았다. 모임 장소 선정에 오류가 있었다. 세연이 여기 묵는다는 얘길 들어 놓고선. 그렇다고 해도 동선이 이렇게 겹친 건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다들 왜 이렇게 말이 없어? 내가 너무 예뻐져서 못 알아보는 건 아니지?”
과하도록 밝은 음성이 카랑카랑 울려 퍼졌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세훈은 온몸의 기가 다 빨리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이다, 세연아.”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린 태준이 그나마 호의적인 인사를 건넸다.
“태준 오빠, 반가워.”
태준을 스친 세연의 시선은 제자리를 찾듯 다시 윤완에게 달라붙었다.
“오빠들, 그동안 사진으로 보긴 했는데 실물이 더 멋있네.”
세훈은 억지 미소를 짜냈다. 윤완 오빠라고 딱 집어 말하든지. 도윤완만 빤히 쳐다보질 말든지.
“안녕.”
그래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어서 건성으로 손을 드는 척 마는 척했다.
“안녕, 세훈 오빠.”
이제 인사가 남은 건 한 사람뿐. 금 여사의 전화를 받고 비행기에 오르면서부터 특별하게 다가오는 주인공을 향해, 세연의 두 눈이 말똥말똥 떠졌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묵묵무언이었다.
“윤…….”
기다림에 지친 세연이 운을 떼는 순간,
“간다.”
차가운 음성이 뒤쪽에 있는 친구들을 향해 흘렀다. 세연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그는 호텔 밖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윤완과 엇갈리는 순간, 세연의 몸이 빙그르르 뒤돌고. 완벽히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두 볼이 화끈거렸다. 반겨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알은체조차 하지 않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인사 정돈 당연한 예의 아닌가?’
냉정히 멀어져 가는 윤완의 등을 지켜보며, 세연이 크게 울상을 지었다. *** 잠자리에 들려던 나린은 윤완의 연락을 받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아파트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오자 그가 보도블록 위를 서성이고 있다. 총총 달려간 나린이 뒤에서 살포시 그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오늘따라 어쩐지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왜 이렇게 처졌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기분 좋은 기습을 당한 윤완의 얼굴에서 피로가 가셨다. 윤완은 나린의 팔을 풀고 몸을 돌려 그녀와 마주 섰다.
“괜찮아. 다 풀렸어.”
“피곤하면 집으로 가야지 여길 왜 와요.”
“이렇게 얼굴 봐야 풀리니까.”
결혼하고 싶다. 결혼해서 한 공간에 살았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이 남자가 지칠 때면 언제든 안아서 위로해줄 수 있도록.
“……집에서 많이 힘들죠?”
냉전 중이니 집도 더 이상 편안한 보금자리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번 만났을 때 한 말 때문인지, 아니면 채 여사를 의식해서인지, 금 여사는 정말로 나린을 더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몫까지 모조리 그가 떠안고 있을까 봐 마음이 무거웠다.
“걱정 마. 어머니랑 안 마주쳐도 될 만큼 충분히 넓은 집에 사니까.”
“네?”
엉뚱한 대답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웃기려는 의도가 하나도 없는, 매우 진지한 답이었을 테지만.
“웃으니까 좋네.”
윤완도 나린을 따라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 세연의 등장은 웬만한 일엔 끄떡없는 그에게도 당황스럽고 부담되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비이성적인 고집이 점점 감당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는 중이다. 그럼에도 나린을 상처 입히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이기는 것보다 그게 훨씬 중요한 싸움이니까.
“아 참. 저 내일부터 한 달간은 백수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웃음을 잃어버릴 순 없으니.
“잘됐네. 더 자주 볼 수 있을 거 아냐.”
“윤완 오빠가 바쁘잖아요.”
“시간 나면 다 너 만나러 올게.”
“알겠어요.”
내 말에 알겠다고 답할 때 참 예쁜 아이. 아니라고 할 때도 말할 수 없게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나린아.”
“네?”
윤완의 고개가 낮아지며 나린의 귀에 높이를 맞췄다.
“사랑해.”
마음을 울리는 고백에 움츠러든 어깨를, 나린이 으쓱 끌어 올린다.
“……간지러워요.”
평화로운 미소가 두 사람의 얼굴을 꼭 닮게 물들였다. 윤완은 나린을 품 안 깊숙이 보듬었다. 이 아이가 있는 세상이라면, 어디든 이렇게 따뜻하고 행복하겠지. 여차하면 포기하지 못할 게 뭘까. 내 전부가 여기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쉬워지는 것 같았다. 어떤 싸움에도 지지 않을 기운이 꽉꽉 충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