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얼굴은 보고 살자2022.02.11.
테라 호텔 2501호. 토요일 출근을 한 윤완을 제외하고 세훈과 준우, 태준이 모처럼 모임을 가졌다. 위스키 잔 세 개가 시간차를 두고 부닥치며, 둔탁한 마찰음을 냈다. 준우와 세훈이 기분 좋게 잔을 들이켜는데, 입술을 적시는 둥 마는 둥한 태준이 벼락과도 같은 말을 뱉었다.
“나 돌아오는 목요일에 미국 간다.”
“출장?”
단숨에 비운 세훈의 잔을 채워주며 준우가 무심히 되물었다.
“아니, 그냥 쉬러. 한 일 년쯤 있다가 오려고.”
“뭐?!”
준우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미니코스로 만든 새우 카나페를 집어 먹던 세훈 또한 사레들려서 쿨럭쿨럭 기침을 해대었다.
“뭔 소리야, 갑자기?”
준우는 금세 걱정하는 얼굴을 했다. 쫓기듯 급박히 결정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서 결심했어.”
“뭐가 안 될 것 같은데? 쿨럭.”
마른기침이 가시지 않았음에도 세훈이 성마르게 묻는다.
“그냥, 선보는 거 힘들어서. 난 도무지 너희처럼 적당한 상대 골라서 결혼 진행하는 게 안 된다.”
말을 마친 태준은 쓰게 웃어 보였다.
“그냥 일 년만 맞선을 쉬게 해달라고 말씀드려 보면 안 돼?”
세훈이 대안을 제시하자,
“그게 되겠어? 허락하신대도 집에서 얼굴 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스트레스 주실 텐데.”
은 여사의 은근한 고집을 잘 아는 준우가 대신해서 답을 했다.
“그렇겠다. 그러고 보면 너희 어머니도 참 대단하셔. 어디서 그렇게 끝도 없이 선 자리를 찾아오시는지.”
태준은 말없이 위스키를 목 안으로 털어 넣었다. 세훈의 말처럼 며느릿감을 무한정 발굴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맞선 상대들의 조건은 처음에 비해 많이 약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부와 명예, 둘 중 하나는 틀림없이 갖춘 상대들이었다. 한 가지라도 확실히 잡겠다는 어머니의 굳은 의지에 태준도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근데, 미국 가는 건 어떻게 허락받았는데?”
태준에게 위스키를 따라주며 준우가 물었다. 술자리에서 친구들을 챙기는 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의 역할이었다.
“거짓말했어. 지아 못 잊겠다고. 일 년만 시간을 달라고.”
“그게 통했다고?”
“대신 미국에서 돌아오면 바로 결혼 진행하는 걸로 약속드렸거든. 누구든, 어머니께서 원하시는 상대로.”
결국 위험한 거래를 대가로 한, 시간 벌기에 불과한 임시방편인 셈이었다. 준우의 걱정이 짙어졌다.
“일 년 후엔 어쩌려고.”
“몰라.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그렇게 어렵냐? 정략결혼을 받아들이는 게.”
“어.”
나는 사랑을 해봤으니까. 지아와 함께하면서 좋아하는 사람이 주는 설렘과 행복이 뭔지 배웠으니까. 나린 씨를 보면서 같이 있으면 즐겁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여자가 있다는 걸 경험해 봤으니까.
“말이 나와서 말인데, 준우 넌 행복해?”
우수에 찬 태준의 눈이 불시에 준우를 공격했다.
“내가 뭐.”
정곡을 찔린 준우는 흠칫 어깨를 들썩였다. 태준은 준우를 놓아주지 않고 질문을 구체화했다.
“다현이 마음에 담고, 다른 사람 선택하고도 행복하냐고.”
답을 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약혼녀 은영은 분명 좋은 여자다. 성향도 비슷하고 가치관도 제법 닮아 있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점이 가장 닮았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녀는 대뜸 사귀던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집안의 반대로 관계를 정리하고도 한동안 많이 아파했노라고. 다시는 그 같은 상대는 만나지 못할 것 같다고.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집안이 요구하는 결혼을 하고자 한다고 했다. 그 점이 아이러니하게도 준우의 마음을 움직이는 동인이 됐다.
“전 이 약혼, 진행해도 좋아요. 준우 씨가 이런 나라도 상관없다면요.”
처연한 얼굴을 한 은영이 용기를 낸 순간,
“좋습니다. 물론 저도, 은영 씨가 이런 절 상관없어한다면요.”
준우도 흔쾌히 그녀를 받아들였다. 마음을 바라지 않을 상대. 마음을 주지 않아도 죄책감이 필요 없는 사람. 준우에게 이보다 더 완벽한 짝은 없었다.
“행복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준우가 모호한 답으로 스리슬쩍 넘기는데 세훈이 위스키 잔을 거칠게 내려놓는다.
“염장들 지른다. 내 앞에서.”
태준과 준우의 시선이 한꺼번에 세훈에게로 쏠렸다. 주목을 받게 된 세훈은 시선을 즐기듯 팔짱을 꼈다.
“너흰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봤잖아. 태준이 넌, 한지아, 준우 넌, 다현이.”
“…….”
“그 로봇 같은 도윤완도 나린이가 있고.”
“…….”
“근데 난 뭐냐?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라도 있는 너네가 부럽다.”
묵직하고 진지한 어조에도 특유의 장난기 어린 표정만큼은 여전했다. 덕분에 침체되었던 공기가 다시금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준우가 픽 실소했다.
“결국엔 도윤완만 승자네. 현재진행형인 건 그 녀석뿐이니까.”
“누가 아니래. 전생에 지구를 구했나 봐, 그 녀석은.”
세훈이 재빨리 맞장구를 치자 분위기가 완전히 풀어졌다. 준우와 세훈은 다시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 유쾌함에 맞출 자신이 없는 태준은 시선을 내려뜨리며 쓸쓸히 술잔을 입에 갖다 댔다. *** 룸 안으로 들어서는 나린을 보고 채 여사가 팔을 움찔거렸다. 하마터면 반가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손을 흔들 뻔했다.
“잘 지냈니.”
충동을 다스린 채 여사는 안부부터 물었다.
“네. 큰엄마도 잘 지내셨어요?”
“……응.”
아주 잠깐, 연 회장이 몸져누운 사실을 알릴까 고민했다. 하지만 나린에게도 연 회장에게도 이로울 게 없단 생각이 들어 관두었다. 두 사람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나린에게는. 아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
“외삼촌 댁에서 지내는 거지?”
“네.”
배회하던 채 여사의 손가락이 찻잔 손잡이에 걸린다.
“오늘 보자고 한 건 그냥……,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지난번 금 여사님 만난 일도 걱정되고.”
그 마음 씀씀이를 잘 아는 나린이 해사하게 웃었다. 채 여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걱정하고 챙겨주었다는 건 금 여사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날 어려웠던 자리가 그쯤에서 마무리된 것도 채 여사가 사전에 압박을 넣어준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채 여사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한테는 좀 더 의지해도 될 텐데.
“실은 저도 한 번 찾아봬야지 하고 있었어요.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나린이 다부진 어조를 하여 말했다.
“뭔데?”
“그동안 받은 것들 돌려드리고 싶어요. 제 앞으로 된 회사 지분이랑 외삼촌께 주신 아파트. 대신 갚아 주셨던 대출금이요.”
그간 테라 호텔 손녀로서 받았던 것들을 줄줄이 읊고 나니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단기간에 참 많이도 받았다. 어쩌면 이게 할아버지가 용서를 비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죄책감을 덜어내 보려는 노력의 산물들. 사과하겠다며 무턱대고 선물부터 보내왔던 윤재희 부사장이 떠올랐다. 이 세계 사람들끼리는 면면이 참 많이도 닮아 있다. 아니지. 윤완 오빠만 빼고. 준우 오빠랑 세훈 오빠도 빼고. 채 여사는 곤란하다는 듯 팔짱을 꼈다. 사서 고생하는 데 참 일가견이 있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거 회수하려면 세금이 얼만데, 그냥 갖고 있으면 안 되는 거야?”
까칠한 말투를 한 건 의견을 관철시킬 목적이었을 뿐 윽박지르려는 의도는 결코 없었다.
“네. 무엇보다 외삼촌 뜻이 강하세요.”
“…….”
“죄송합니다.”
승혜의 과거를 알게 된 다음 날, 승태는 곧바로 이사 갈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지숙과 수정 또한 반대하지 않았다. 승태의 의지가 너무 강력해서 외삼촌에게 주어진 몫만큼은 그대로 두고 싶었던 나린도 말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어때? 할아버지가 주시는 게 아니라 아빠가 주시는 거라고.”
무심한 말투와 달리 나린을 보는 채 여사의 얼굴엔 애정이 함빡 담겨 있다. 채 여사는 나린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태용으로부터 들은 뒷얘기를 꺼냈다.
“서방님은 원래 널 되찾아 올 생각이셨대. 근데 다현이 때문에 포기했다고 하더라.”
“…….”
“널 찾아오면 다현이의 출생 배경이 밝혀질 테니까. 다현이는 죽은 동서를 친엄마라고 굳게 믿고 있었거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것도 염려됐을 거고.”
“…….”
“시간이 더 흘러서는 준우랑 약혼이 잘못될까 봐 아예 단념했나 봐.”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기였다. 모든 사정을 속속들이 이해할 순 없겠지만, 과거 사연을 안 후부터 아빠는 더 이상 원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저 혼외자인 줄로만 알았을 때 이따금 원망했던 걸 미안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빠가 준 거라고 생각하면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어?”
한풀 누그러진 채 여사의 말투가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나 다시 입을 뗀 나린의 선택은 도돌이표였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받을 수가 없어요. 특히 테라 그룹 지분은, 이런 걸 관리해 본 경험도 없고요.”
이번엔 채 여사의 마음이 흔들렸다.
‘하긴. 지분은 문제긴 하지.’
가능성이 희박해도, 누군가 작정하고 순진한 저 앨 이용하기라도 하면…….
“그건 방법을 찾아볼게.”
이게 무슨 낭비람. 세금을 생각하자 속이 쓰려서 채 여사의 입술에 머문 미소도 덩달아 쓴맛이 된다. 이런 셈에 밝지 못한 나린은 그저 제 의견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아파트는 그냥 살면 안 될까? 돌아가신 어머니도 그걸 바라실 거야.”
채 여사가 협상을 시도했으나 나린은 꿈쩍하지 않았다. 이건 승태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벌써 이사 갈 집 알아보고 있어요. 말씀드렸듯 누구보다 외삼촌께서 그렇게 하길 원하시고요.”
채 여사는 나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꼿꼿한 눈빛, 차분한 미소. 의연함으로 반짝이는 나린을 보며, 채 여사는 왜 저 아이를 예뻐할 수밖에 없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사는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동경하는 세상에 데려다 놓고 싶은 존재. 이 세계의 민낯을 낱낱이 알기 전엔 채 여사도 꿈꾸었던 그런 사람.
‘그랬었지. 나도 한때는 너처럼 그렇게 살고 싶었지.’
옳다고 믿는 대로 자유롭게. 내가 태어난 곳이 감옥이란 걸 깨닫기 전에는. 날 수 없는 새장이라는 걸 알기 전에는. 나는 너를 딸처럼 여겼다는 걸 알까. 하루하루 진짜 가족으로 받아들여 가고 있었다는 걸. ……너는 내게 세훈이 동생이나 다름없었다는 걸.
“그래도 회사 지분 외의 것들은 다시 생각해줘. 필요하면 내가 외삼촌 찾아뵙고 설득할게.”
“…….”
“응?”
채 여사가 마지막으로 간곡한 표정을 해 보였다.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힘이 되어 주고자 하는 마음을 뿌리칠 수 없는 나린이 마지못해 대답한다. 한시름 놓은 채 여사는 멋대로 입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말들을 누르느라 숨을 골랐다. 눈 딱 감고 한 번만 할아버지를 용서해줄 순 없겠느냐고, 할아버지도 지나간 일을 몹시 후회하고 있을 거라고. 할 수만 있다면 시아버지를 대신하여 빌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러나 그게 나린을 더 힘들게 할 걸 알기에 참았다.
‘정말 이걸로 이 애와 테라 그룹의 인연은 끝인 걸까.’
시간이 흐르면 이 아이의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그 사이 태용의 건강이 더 악화되진 않을까 걱정이다. 이대로 태용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남겨진 나린이 받을 상처가 걱정됐다. 이런저런 상념에 채 여사가 착잡해 하는 사이, 나린이 채 여사로부터 받았던 한도 모를 카드를 내밀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채 여사를 향해 기울어진 상체는 진심이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이렇게 한 번씩 얼굴은 보고 살자.”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던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건 그래서였나 보다. 허리를 세운 나린이 채 여사와 눈을 맞추자, 채 여사의 눈에서 긴한 간절함이 전달되어 왔다. 두어 번 깜빡이던 나린의 눈이 찬찬히, 동그랗게 휘어졌다.
“네, 큰엄마.”
나린이 그려내는 순수한 웃음을 보며, 채 여사는 다시 이 아이를 집에 데려다 놓고만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