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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어떤 악몽을 만나도 (73/101)

#73. 어떤 악몽을 만나도2022.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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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 여사와 헤어진 후에 나린은 뒤숭숭한 마음을 정돈할 겸 거리를 쏘다녔다. 허기가 질 즈음하여 집으로 돌아와선 윤완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 말았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억울한 마음을 전부 쏟아내 버리고 말 것 같아서.

16558039912369.jpg‘그럴 수는 없지. 윤완 오빠 잘못도 아니고…….’

지이이잉. 전화할지 말지 갈등하느라 침대에 내던져둔 폰이 진동했다. 발신자 표시를 보자 손이 멋대로 전화를 받는다. 혼자 이겨내야지 다짐했으면서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나 보다. 무엇보다 강력한 위로가 되어 줄 걸 아니까.

16558039912369.jpg“여보세요?”

16558039912377.jpg[지하주차장이야. 나와.]

덮어놓고 용건부터 말하는 건 사귀기 전이나 후나 똑같은 사람. 한결같은 일방통행에 설핏 웃음이 샜다.

16558039912369.jpg“저희 집 주차장이요?”

16558039912377.jpg[응.]

16558039912369.jpg“오늘 못 만난다고 했잖아요.”

16558039912377.jpg[수정 씨랑 통화했어.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나와.]

예상 못 한 스파이의 존재에 나린의 입이 빼주룩해졌다. 그렇게 별로라고 노래를 부르더니 그새 저 사람 편이 됐다 이거지, 강수정.

16558039912377.jpg[내가 올라가?]

16558039912369.jpg“아뇨. 내려갈게요.”

폰만 집어 든 채 지하로 내려간다. 고개를 휘휘 돌리자 어렵지 않게 윤완의 차를 발견해낼 수 있었다.

16558039912369.jpg“제 얘기 못 믿어서 수정이한테 전화한 거예요?”

조수석에 오른 나린은 짐짓 목소리를 높였다. 거짓말한 주제에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16558039912377.jpg“…….”

그런데 불현듯 고개를 들어 마주한 윤완의 표정이 심상찮다. 어두운 표정을 마주한 나린은 마음이 쓰였다. 무슨 일 생겨서 온 건가.

16558039912369.jpg“무슨 일 있어요?”

대답 없이 그가 나린을 꽉 끌어안았다. 그런가 보다. 무슨 큰일이 생겼나 보다. 그게 오늘 나한테 생겼던 일과 같은 일은 아니면 좋겠는데…….

16558039912369.jpg“무슨 일인데요.”

나린이 묻자 그녀를 감싸 안은 팔이 풀리고, 큼지막한 손이 작고 둥근 어깨 위로 이동했다. 윤완의 팔 길이만큼의 거리가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16558039912377.jpg“무슨 일은 너한테 있잖아.”

나린의 동공이 넓어졌다가 이내 제 크기를 찾는다.

16558039912377.jpg“왜 숨겨. 무슨 일이든 나한테 다 말하라니까.”

16558039912369.jpg“어떻게 알았어요?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16558039912377.jpg“아니. 채 이사님께서 우연히 아시고 전해주셨어.”

16558039912369.jpg“큰엄마가요?”

16558039912377.jpg“응.”

16558039912369.jpg“아, 걱정하셨겠다. 이따 전화 드려 봐야겠어요.”

윤완은 기가 막혔다.

16558039912377.jpg“채 이사님께서 걱정하실 생각은 되고, 내가 걱정할 생각은 안 되고?”

16558039912369.jpg“모를 줄 알았죠.”

윤완의 주먹 쥔 손이 나린의 이마에 콩, 짧게 머물다 갔다. 아프지 않게, 하지만 어리석었던 상황 판단을 일깨워주기엔 충분한 세기로.

16558039912377.jpg“지난번 이직 문제도 그렇고, 신혜원 때도 그렇고. 무슨 일이든 다 말하라고 했잖아, 숨김없이.”

전쟁에서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데…….

16558039912369.jpg“애도 아니고 뭘 그런 걸 얘기해요.”

16558039912377.jpg“내 눈엔 애야.”

16558039912369.jpg“네?”

16558039912377.jpg“그러니까 나한테는 무조건 다 말해. 내가 네 보호자니까.”

나린은 어깨를 들썩이며 쿡쿡 웃어댔다. 이런 닭살 돋는 얘길 매우 진지한 얼굴로 하는 그를 보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16558039912377.jpg“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

그 사이 기습적이고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되었다.

16558039912369.jpg“별말씀 안 하셨어요.”

나린은 밝은 얼굴, 심상한 어조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16558039912377.jpg“그래서, 네 기분은 괜찮았어?”

이 질문엔 주춤하고 말았지만. 헤어지라고 협박을 당한 것도 아니었고, 돈 봉투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물 따귀를 맞는 불상사도 없었는데 이상하리만치 비참했던 기분.

16558039912369.jpg“아니요.”

16558039912377.jpg“그럼 별말씀하신 거야.”

16558039912369.jpg“근데 진짜 별말씀 안 하셨어요.”

16558039912377.jpg“네가 생각하는 그 별말씀 아닌 말이 뭔데. 해 봐. 내가 판단할 테니까.”

16558039912369.jpg“그냥……. 테라 그룹에서 아주 나온 거냐. 결혼 전에 땅을 받기로 한 건 알고 있었냐.”

16558039912377.jpg“…….”

16558039912369.jpg“윤완 오빠랑은 계속 만날 생각이냐. 뭐 그런 얘기?”

혼담에 거래가 오간 얘기까지 하시다니.

16558039912377.jpg“별말씀하셨네.”

16558039912369.jpg“그냥, 제 생각을 확인하고 싶으셨나 봐요.”

그럼에도 나린이 크게 충격받거나 절망하고 있지 않는 듯하여 다행이었다.

16558039912377.jpg“그래서 네 대답은?”

16558039912369.jpg“다 그렇다고 했죠.”

16558039912377.jpg“…….”

16558039912369.jpg“테라 그룹엔 다시 안 돌아갈 거고, 땅은…… 처음 듣는 얘기고…….”

16558039912377.jpg“…….”

16558039912369.jpg“안 헤어질 거고.”

윤완의 손이 나린의 머리칼을 흩어 놓는다.

16558039912377.jpg“잘 대답했어.”

나린도 윤완에게 얘기하다 보니 꽉 막혔던 속이 차츰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혼자서만 삭였던 말들이 하나둘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16558039912369.jpg“땅 얘기 듣고 얼마나 황당했는데요. 무슨 옆자리가 그렇게 비싸요?”

나린이 장난치는 척 툴툴거리자 윤완의 눈이 가늘게 양옆으로 늘여졌다. 귀여운 투정에 입술은 더욱 깊은 골짜기를 이루었다. 그를 생각해서, 그의 어머니라서 참느라 분했을 텐데도…….

16558039912377.jpg“비싸지. 비싸고 아무나 살 수 없지.”

16558039912369.jpg“뭐라고요?”

한술 더 뜨는 윤완의 태도에 황당해하는데, 그의 손이 곧게 뻗어지며 나린을 품에 안았다.

16558039912377.jpg“너 아니면 내어줄 수 없는 자리니까.”

여전한 숲의 향기. 어질어질, 나린을 환상 속으로 데려다 놓는 그의 품 안.

16558039912377.jpg“미안해.”

윤완이 음계를 낮춰 속삭였다.

16558039912369.jpg“윤완 오빠가 왜요…….”

16558039912377.jpg“나는 네 외삼촌, 외숙모께 환대받았는데 우리 집은 너한테 그렇게 못 해줬잖아.”

나린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내려앉았다.

16558039912369.jpg“윤완 오빠 잘못은 아니긴 한데, 듣고 보니 좀 억울하긴 하다.”

윤완은 더욱 힘을 주어 나린을 껴안았다.

16558039912377.jpg“그 자리에서 못한 말 있으면 지금 해. 들어줄게.”

이때다 싶었는지 나린이 두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틈이 벌어지며 시선이 얽힐 공간이 생겨난다.

16558039912369.jpg“진짜죠? 진짜 다 얘기할 건데, 후회 안 하는 거죠?”

16558039912377.jpg“응…….”

큰 시합을 앞둔 선수처럼 한껏 숨을 들이켠 나린은 보란 듯이 입꼬리를 샐그러뜨렸다.

16558039912369.jpg“나도 싫어요, 도일 그룹 며느리 자리. 그런 거창한 타이틀, 하나도 관심 없다고요.”

16558039912377.jpg“…….”

16558039912369.jpg“그냥 너희끼리 예쁘게 잘 살면 된다. 그게 효도다. 그렇게 믿어주시는 좋은 분들 만나고 싶었는데…….”

16558039912377.jpg“…….”

윤완은 나린이 풀어 놓는 앙앙거리는 말들을 잠자코 들어주었다. 심각한 얼굴을 해야 하는데도 자꾸만 미소가 비어져 나왔다. 초름한 얼굴이 윤완의 눈동자 한가운데 달처럼 걸린다.

16558039912369.jpg“그래도 열심히 버틸 거예요.”

체념과 의지를 한꺼번에 표출해내는 모순.

16558039912369.jpg“헤어질 수 없으니까.”

나린은 반듯하게 그와 눈을 맞추었다.

16558039912369.jpg“너무너무 좋아하니까.”

언제 새치름했냐는 듯 나린의 얼굴은 사랑스러운 미소로 뒤덮여 있었다. 자그맣고 하얀 손이 포근하고 부드럽게, 그의 손등 위에 올라앉았다. ……이 손, 놓을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여실히 전달되어 오는 진심에 윤완의 심장이 쿵쿵 떨어질 듯이 울려댔다. 함께하는 날이 늘어 가는데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설렘. 이젠 잃어버리고는 살아갈 수 없는 아이.

16558039912377.jpg“영광이네.”

윤완은 제 손등을 감싸고 있는 나린의 손 위에 반대편 손을 포개었다.

16558039912377.jpg“영광이야. 네 선택이 나라서.”

그리고 포개어진 손처럼, 두 입술도 부드럽게 포개어졌다. 뜨겁게 달궈진 열기를 몸 안으로 받아들이자, 나린의 체온이 조금씩 조금씩 상승되어 갔다. 온도가 오를수록 심장박동이 째깍째깍 달려서 계절을 바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추운 겨울을 헤매고 있었는데, 어느덧 녹음이 완연한 여름 숲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랬지. 나쁜 기억은 언제나 그의 포옹으로, 다정한 키스로……. 그렇게 기분 좋게 갈음되고는 했었지. 술에 취한 준우 오빠에게 안겼을 때도. 전시회장에서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도. 그러니 두렵지 않아요. 끝엔 결국 내 옆에 있어 줄 거니까. 어떤 악몽을 만나도, 누구보다 다정히 위로해줄 걸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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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에 돌아온 윤완은 화연을 찾아가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16558039912377.jpg“제가 그렇게 부탁드렸는데도 그 앨 찾아가신 건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반대를 하시려거든 저한테 하시면 되잖아요. 그 앤 남이고, 전 더 가까운 아들인데요.”

윤완의 선공에 화연도 지지 않고 맞불을 놓았다.

16558039995719.png“너한테 말하면 알아먹기는 하고? 그리고, 모르게 만난 적 없다. 비밀로 할 필요 없다고 똑똑히 말했는데, 그 말은 안 전하던?”

16558039912377.jpg“나린이는 아무 말 안 했습니다. 테라 호텔 측에서 전화해줘서 안 거죠.”

16558039995719.png“안 그래도 채 이사한테 전화 왔더라. 걔가 무슨 성역이라도 되는 것처럼 왜들 그리 난리인지.”

16558039912377.jpg“어머니!”

16558039995719.png“잘 들리니까 큰 소리 낼 것 없다.”

한마디 한마디 빼놓지 않고 받아치면서도 괴로운지, 화연은 고개를 돌려 아들을 외면했다. 격렬히 대립 중인 모자 사이에서 일현은 어느 쪽 편도 들지 못하고 두 눈만 꾹 감았다.

16558039912377.jpg“전 이해가 안 갑니다. 그 애가 왜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까?”

윤완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으레 그 차분한 어조로 되돌아왔다.

16558039995719.png“몰라서 물어? 안 그래도 출신이 탐탁지 않은 아이, 그나마 테라 호텔이라는 배경이라도 있어서 마지못해 허락했던 거다. 근데, 이젠 그마저도 없잖니?”

16558039912377.jpg“그게 이해가 안 갑니다. 테라 호텔 배경이 대체 왜 그렇게 중요한 건지요.”

16558039995719.png“중요하지. 기업 경영을 하다 보면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오게 돼 있어. 네 아버지도 네 외가 덕을 얼마나 보고 있는지, 아마 짐작도 못 할 거다.”

16558039912377.jpg“압니다.”

16558039995719.png“알아? 아는데도 그래?”

16558039912377.jpg“네. 외가의 도움이 없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건 아니니까요. 과정이 좀 더 어려워질 뿐이죠.”

16558039995719.png“……뭐?”

16558039912377.jpg“그런 도움 없이 살아남지 못할 기업이라면 무너지는 게 맞다고 봐요, 전.”

16558039995719.png“너…….”

아들이 발산하는 냉기에 말문이 막힌 화연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혈압이 올라 어찔어찔했다. 윤완은 계속해서 제 의견을 피력해 나갔다.

16558039912377.jpg“세상은 변하고 있고, 제가 살아갈 세상은 두 분께서 사셨던 세상과는 또 다를 겁니다. 아마 제 자식은 이렇게 당연하게 경영권을 물려받지 못할 수도 있겠죠.”

16558039995719.png“…….”

16558039912377.jpg“앞으로 어떤 세상이 와도, 전 그에 맞춰 도일 그룹을 지켜내고 성장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변화에 발맞춰 경영 철학도 유연하게 바꿀 거고, 내려놓아야 할 게 있으면 가차 없이 내려놓을 거고요.”

16558039995719.png“…….”

16558039912377.jpg“하지만 그 애가 옆에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습니다.”

16558039995719.png“…….”

16558039912377.jpg“그게 그 애를 고집하는 이유입니다.”

16558039995719.png“…….”

16558039912377.jpg“그래도 안 되는 것입니까?”

금방이라도 활활 타올라서 재가 될 듯한 윤완의 눈빛이 화연의 눈동자를 짓눌렀다. 화연은 얼음 불꽃 같은 아들의 눈을 보며 더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16558039995719.png“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난 싫다. 정 못 헤어지겠으면 딱 일 년만 더 만나고 헤어져라. 연애만 하고 결혼은 다른 사람이랑 해.”

화연은 막무가내로 우겨댔다. 애초에 윤완을 말로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비상식적인 반대를 몸소 확인한 윤완은 그저 답답한 마음이었다.

16558040052081.jpg“늦었으니 그만들 하고, 다음에 다시 얘기합시다.”

일현이 적당한 때에 끼어들며 중재에 나섰다. 지칠 대로 지친 화연은 남편의 시의적절한 개입이 반가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과의 말다툼은 혼을 쏙 빼놓는 일이었다. 윤완 또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일단 물러났다. 방을 나서기 전 윤완이 화연에게 누차 당부하였다.

16558039912377.jpg“제발 부탁이니 다시는 그 애 만나지 마십시오.”

부글부글 끓는 속을 겨우 달래고 있던 화연이 눈을 부라린다.

16558039995719.png“오늘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라고 했는데, 그 말은 안 전했나 보구나. 걱정 마라. 다신 안 만날 거다.”

약속인지 억하심정인지 모를 화연의 어깃장에 윤완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윤완이 방을 나간 뒤 화연은 남편에게 매달렸다.

16558039995719.png“여보, 도와주세요. 저 녀석, 이러다가 진짜 그 애랑 결혼이라도 하면…….”

상상만으로도 고통스러운지 금 여사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16558039995719.png“……저 정말 못 견뎌요.”

16558040052081.jpg“흠.”

일현은 답을 피했다. 마음 같아선 그도 백 번이고 아내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그러다가 윤완이 정말로 도일 그룹을 떠날까 두려웠다. 회사 일을 해나갈 때 보아온 아들의 추진력과 과단성을 잘 알기에. 모자간의 전쟁이 모쪼록 큰 탈 없이 끝나기만을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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