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비쌀 만하다2022.02.04.
느지막한 오후의 봄볕이 아스라이 떨어지는 룸 안. 나린이 화연을 향해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사진으로 볼 땐 몰랐는데 실물로 보니 윤완의 얼굴이 어머니를 쏙 빼닮은 것 같았다. 그만큼 미인이었고, 시리도록 차가웠다.
“어서 와요. 앉아요.”
화연이 눈짓으로 앞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린은 단정한 자세로 화연이 가리킨 곳에 앉았다.
“식사하기는 이른 것 같아서 차만 준비해 달라고 했는데, 괜찮죠?”
“네.”
이 말이 식사까지 같이할 마음은 없다는 뜻을 에돈 것이라는 걸 결코 모르지 않았다. 함께 에돌아 전달된 적의에 긴장이 되어 손에 마른 땀이 쥐어진다. 곧 꽃 향이 은은한 차가 마련되었다. 금 여사는 다과를 받쳐 들고 온 직원이 나갈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그 와중에 시선만은 꼼짝 않고 나린의 외양을 살폈다. 이윽고 둘만 남겨지자 탐색을 마친 화연이 입을 열었다.
“갑자기 보자고 해서 놀랐죠?”
“아닙니다.”
“오늘 마지막 출근이라고 들었는데…….”
“네.”
인사 사항을 전부 보고받고 있었나 보다. 감시당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나린도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오늘 만나자고 한 건 물어볼 게 있어서예요.”
금 여사는 덮어놓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조금 민감한 질문이 될 수 있는데…….”
“괜찮습니다.”
“그럼 사양 않고 물어보죠.”
“…….”
“연 회장님 댁에서 나왔다고 들었는데, 다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인 건가요?”
양해를 구했던 대로 민감하고 개인적인 질문이었다. 너무 직선적이고 차가워서 삐죽삐죽 찌르는 바늘 같았다. 나린은 그가 윤완을 낳고 길러준 어머니임을 되새기며 불쾌함을 누르고 대답했다.
“네.”
“채 여사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던데요.”
금 여사는 지난 토요일 채 여사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낮게 읊조렸다. 만나자는 연락 후 찾아온 채 여사는 나린이 여전히 테라 그룹 울타리 안에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니 함부로 할 생각 말라고.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직접적인 표현은 하나도 없었지만 한마디 한마디 죄 그런 으름장. 그 바람에 오늘 약속을 잡는 데에도 긴 고민이 뒤따라야 했다.
“…….”
나린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걱정하고 챙겨주는 채 여사의 세심함에 울컥했다. 테라 호텔은 뛰쳐나왔어도 채 여사나 세훈과의 인연은 변함없이 소중했다. 나린이 말이 없자, 금 여사가 화차를 한 모금 머금어 입술을 촉촉이 적신다.
“나린 양.”
찻잔이 내려진 뒤 눅눅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나린 양을 받아들이기로 한 건 조건이 있어서였어요.”
처음 듣는 얘기에 나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슨…… 조건이요?”
금 여사의 입 끝이 득의의 미소로 실룩거렸다.
“땅이요.”
처음부터 알려줄 심산으로 얘길 꺼냈다. 이 순진한 양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기에.
“……땅……이요?”
“연 회장님께서 나린 양 앞으로 삼성동 땅을 증여하기로 되어 있었어요.”
“…….”
“몰랐나 보군요.”
“네…….”
금 여사의 의도는 적중했다. 나린은 그제야 왜 혼외자라는 신분으로도 반대당하지 않았는지를 깨우쳤다. 내 결혼 얘기가 거래가 된 것이었다니. 땅을 대가로 거래가 된 것이었다니! 나린의 표정이 걷잡을 수 없이 경직되어 갔다. 상대가 적잖이 놀랐다는 걸 확인한 금 여사는 도리어 빙긋 온화한 웃음을 웃었다. 미디어를 통해 익히 알려져 있는 가짜 미소였다.
“놀라게 했다면 유감이에요.”
“…….”
“또 하나 물어볼게요.”
“……네.”
넋이 나간 나린은 그저 들려오는 대로 답을 해주었다.
“나린 양이 그 집에서 나오고, 상황이 변한 것 같은데…….”
금 여사의 말이 머릿속에서 자동 번역된다. 거래 조건은 물 건너간 것 같은데…….
“그럼에도 우리 윤완이랑 계속 만날 생각인 건가요?”
온화한 말투인데도 싸늘함이 느껴지는 아이러니. 괜히 그의 어머니가 아니구나. 얼굴만 닮은 게 아니었구나. 별말 아닌데도 입을 떼면 눈물이 날 것 같은 비참함이 나린을 휘감았다.
“…….”
윤완을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비슷한 장면을 그려본 적이 있었다. 남다른 가정환경이 결혼할 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쯤 늘 염두에 두었던 일이었다. 지숙이 걱정을 할 때면, 걱정 말라고, 나 싫다고 하면 나도 싫다고 할 거라고……. 반대하는 집엔 절대 가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더랬다.
“평생 외숙모랑 살아도 상관없다니까요. 결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에요.”
그렇게 당당하게 선언했었는데.
“네…….”
“…….”
그랬는데…….
“저는 도윤완 부사장님과 헤어질 생각이 없습니다.”
어떤 시련이 주어진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람. 약속했으니까. 씩씩하게 잘 버티겠노라고. 석양이 붉게 물든 한강변에서 그와 했던 입맞춤과 맹세. 그걸 기억하며 나린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용기를 그러모은 나린의 답에 화연은 계속해서 가식적인 미소로 맞섰다.
“그렇군요. 잘 알았어요.”
당장 헤어지라는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나린이 고개를 들어 화연과 시선을 부닥친다. 웃고 있는 눈, 웃는 모양의 입매임에도 표정 전체에 냉기가 가득하여 오싹 소름이 끼쳤다.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더 만날 일 없을 거예요.”
이렇게 말한 화연은 초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쪽으로 두어 발짝 뗀 화연이 홀연 걸음을 멈추더니 따라 일어선 나린을 돌아본다.
“난 분명 별말 안 했어요. 그렇죠?”
“…….”
“그러니 채 여사님께 오해 살 말은 전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
“그리고 오늘 이 만남, 윤완이한테 비밀로 할 것 없어요. 뭐, 비밀 지켜준다 어쩐다 하면서 내 환심 살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길 바라요.”
속에 있던 경고까지 모조리 쏟아 놓은 화연은 걸음을 재개하여 문밖으로 나갔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섧게 들렸다. 휘휘한 적막 속에 홀로 남겨진 나린이 스르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찻잔에서 나는 꽃 향이 코를 찔러서, 토할 것 같은 메스꺼움이 급습한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콱 막혀서 블라우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드라마 속 단골 장면을 이렇게 재현하다니, 인생 참 드라마틱했다. 아니지. 내 인생은 출생부터가 드라마틱했으니까……. 입술 틈으로 픽 바람이 새며 헛웃음이 흘렀다. 제 것도 아닌 땅이 결혼 조건으로 오갔다는 사실이 너무도 씁쓸했다.
‘진짜 비싸네, 그 사람 옆자리.’
그래도 울지 않았으니 잘한 거라고 생각했다. 별의별 일을 다 겪다 보니 단련이 됐는지 웬만한 일엔 눈물도 나지 않는 것 같다, 이젠. 몇 시쯤 됐으려나. 시간을 확인하려 폰을 꺼내자,
[저녁에 술 한잔하자. 마지막 출근 기념으로 맛있는 거 사줄게.]
무음으로 해두어서 몰랐던 그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의 언어들은 눈치도 없이 다정해도 너무 다정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물기가 어린다. 눈을 감으니 까만 머릿속으로 그와 함께했던 나날들이 오소소 쏟아지며 높지막한 산을 이루었다. 싱가포르에서의 선물 같았던 시간들. 추운 날 꽁꽁 언 몸을 사르르 녹여 주었던 고백. 전시회장에서의 깜짝 포옹과 가슴을 뒤흔들었던 생일 밤의 프러포즈. 무수히도 많이, 모자람 없이 행복했던 기억에 심장이 힘차게 뛰었다. 화연으로부터 들은, 흉기 같던 말들은 기분 좋은 추억에 파묻혀 저 바닥 아래로 처박힌 후였다. 그러자 비쌀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그 이상으로 가치 있을 만하다고. 씩씩하게 눈물을 거둔 나린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오늘까지만 우울해하고 내일부터는 다시 밝고 사랑스러운 그의 연인으로 되돌아가야겠다. 그러니, 오늘만 봐주세요. 딱 오늘 하루만. 힘겹게 손가락을 움직여 거짓 답을 완성해 낸 나린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러면서, 이 일은 또 어떻게 전해야 하나, 고민이 깊어졌다. *** 나린과 헤어져 차에 오른 금 여사는 곧장 일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예요.”
[무슨 일이오? 급한 일 아니면 이따 집에서 얘기합시다.]
“저, 그 애 만나고 가는 길이에요. 연나린.”
[뭐……?]
“당신이 아버님께 말씀드려주세요. 전 그 애, 도저히 며느리로 못 받아들이겠다고. 어차피 삼성동 땅도 없던 일이 된 것 같으니 그러라고 하시겠지만요.”
[윤완이 몰래 그 앨 만났단 말이오? 윤완이가 알면 어쩌려고…….]
“알아도 상관없어요. 못난 녀석.”
복장이 터진 금 여사의 입에서 잘 쓰지 않는 거친 언사가 튀어나왔다.
[나도 못마땅하지만, 윤완이 녀석 자극할까 봐 참고 있는 거요.]
“당신은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그렇지만 저한테도 참으라고 하진 마세요. 전 도저히 안 되겠어요.”
두 눈으로 나린의 행색을 확인하고 나니 인내심이 바닥난 금 여사였다. 그간 제 곁에서 보고 자란 것들이 있는데 왜 그런 아이를 눈에 들어 했는지 납득하려야 납득할 수 없었다. 출생 배경이 꼬이다 못해 엉망진창인 아이를. 이젠 테라 호텔 손녀 타이틀마저 사라진 그 초라한 아이를.
[음. 일단 혜원이 사태도 있고, 자중하는 게 좋겠소. 우리가 골랐던 상대도 결코 옳았다고는 할 수 없지 않소?]
일현은 혜원의 갑질 사태를 환기하며 침착하게 화연을 진정시켰다. 이건 윤완의 협박 아닌 협박을 기억하고 내놓은 궁여지책이었다. 웬만한 일엔 놀라지 않는 일현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그 발언. 나린을 위해서라면 도일 그룹도 버리겠다던…….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이상,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유일한 후계자인 윤완이 도일 그룹을 떠나면 그 자리는 볼 것도 없이 조카들 손에 쥐여질 것이다. 도문형 회장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화연도 양보가 없었다.
“전 제 방식대로 할 테니 말리지 마세요. 그럼 바쁘실 텐데, 이만 끊을게요.”
통화를 종료한 화연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나린으로부터 들었던 말을 곱씹자 두통이 몰려 왔다.
‘뭐? 헤어질 생각이 없어? 맹랑한 것.’
그러다가 누굴 탓하겠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도 모르고 아들을 맹신했던 내 아둔함이 문제지……. 두통이 더욱 극심해진다. 어떻게 해야 성인이 된 이래 꺾어 본 적 없는 아들의 고집을 이길 수 있을지 묘안을 떠올려야 했다. *** 윤완은 눈싸움이라도 하듯 폰 액정을 노려보았다. 마지막 출근을 기념하여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했는데 돌아온 나린의 답은 예상에 없던 거절이었다.
[오늘은 수정이랑 어디 가기로 해서 안 될 것 같아요.]
계속 들여다본다고 해서 내용이 바뀔 리도 없건만 몇 번이고 메시지 창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그러면서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저 메시지가 진실이 아니라는 걸. 퇴근 즈음, 채 여사가 전화를 걸어 왔다.
[금 여사님께서 나린이를 만나신 것 같아. 친한 지인이 ‘연화랑(蓮花廊)’에서 보고 알려줬는데, 금 여사님께서 들어가신 방에 나린이가 들어가더래.]
“……!”
[내가 이미 말씀드렸는데도 그러셨네. 나도 항의하겠지만 도 부사장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전화를 끊은 윤완은 나린의 소재를 파악하려 바로 수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린이 입원했던 날 수정의 전화번호를 받아두었던 선견지명이 스스로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다.
[나린이요? 방금 집에 들어왔는데……. 방에 있을 거예요. 전화 안 받아요?]
“아뇨, 나린이한텐 안 했습니다.”
[엥? 그럼 왜 저한테 먼저 전화했는데요?]
“이유는 묻지 말고 나린이 어디 못 가게 붙잡아주세요. 전화 왔더란 말도 하지 말고요. 부탁합니다.”
[……알겠어요.]
수정을 포섭한 뒤 서둘러 차 키를 집어 들고 지하주차장으로 향한다.
‘그렇게 말씀드렸는데도 기어이 나 몰래 만나셨다, 이 말이지…….’
운전대를 붙잡은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지며 가속 페달을 밟은 발에도 점차 힘이 가해졌다.
‘반대를 해도 나한테 하시지, 왜 나린이야. 대체 왜.’
교차로 빨간 불 앞에 정지한 윤완은 주먹 쥔 손으로 운전대를 쾅 내리쳤다. 초록색 신호에 맞춰 다시금 도로 위를 질주하는 차는 주인의 기분을 닮아 맹렬하고 사납기만 했다.